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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01. 2020

<진격의 거인>의 세 번째 시즌에 관하여


1. 


<진격의 거인>의 세 번째 시즌은 작품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단락이다. 기승전결 중에 본격적인 전개가 이루어지기에 그렇다. 물론 여기서 전개라는 단어가 전술전략에서의 그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아두어야 한다. 전술전략에서 전개의 의미란 ‘정해둔 역할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를 명령함’이다. 그 맥락이라면 이전까지 깔아둔 복선을 회수한다는 점에서 ‘전개’라는 표현은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군사작전을 다루는 <진격의 거인>에서 전개라는 표현은, 서사적 측면과 작품의 구성적 측면 두 가지 모두로 사용되므로 하나로 통칭하다간 오독의 가능성이 있다. 이를테면 우익 사관을 지닌 작품이라는 호칭이 그렇다. 


<진격의 거인>을 둘러싼 논쟁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일본 편에서 사용된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설명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일본의 정서는 동아시아 전체로 보면 한국과 ‘어느 정도’는 유사한 면이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더욱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면이 있다. 이런 비유가 석연치 않을 수도 있겠지만, 동아시아에 인접해 있는 세 개의 나라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형제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는 악연 혹은 그 이상의 것으로 맺어져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서로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완전하게 냉철하지는 않다.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어느 정도는 서로에게 뜨겁다는 뜻이다.

 

그 뜨거움이 열혈의 대표주자인 소년만화 장르에 겹쳐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은, 다름 아닌 아지랑이야. 그건 신기루와 작동원리가 유사하지만 실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르다. 신기루는 멀리 있는 것을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방식이고, 아지랑이는 분명한 사실을 두고서 아래로부터의 열기를 느끼는 방식이다. 이 중 <진격의 거인>은 후자에 가깝다. <진격의 거인>에는 일본이 아니라면 떠올릴 수 없는 요인들이 배경으로 자리해 있다. 이를테면 강대한 힘을 지니고도 초대왕의 제약으로 인해 벽 안에서 숨어 살아야만 하는 파라디 왕국의 모습은 전후 일본 국가의 설립 과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강대한 힘으로 세계를 지배했다가 전쟁에서 패한 후, 섬으로 들어가 최후의 자위권을 행사하는 모습이 그렇다. 


이는 마치 일본 제국이 미군정에 의해 해체된 후 평화 헌법이라는 대전제를 하사받은 것처럼 파라디 왕국의 금제(禁制)로 작동한다. 파라디 왕국의 레이스 왕가는 모든 거인을 통솔할 시조 거인의 힘이 있으면서도 초대왕의 의지에 번번히 잠식당하고 만다. 작중에서는 이를 두고 ‘강제된 평화’라고 부르는데 ‘새장 속의 새’라는 메타포가 그것을 가로지른다. 설명하자면, 새장 속에서 새는 안전하지만 결코 자유롭다고는 볼 수 없다. 본디 새는 하늘을 나는 생물이며, 야생이 위험하다 하여도 자연을 향해 날아야 하노라고 주인공은 말한다. 따라서 자유와 진리의 탐구라는 주제의식은 이야기 측면 뿐만 아니라 군사적 측면에서의 전개로 읽히기도 한다. 


등장인물을 비롯한 개혁파의 주된 목표는 그런 금제를 깨뜨리고 파라디 왕국을 정상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는 정상국가화이며 다르게 보면 ‘전쟁가능국가’라는 호칭의 이면에 숨은 정상성이라 할 수 있다. 즉, 전쟁이 가능한 게 기본 상태이다. 그런데 작품의 두 번째 시즌까지가 본토 방위를 위한 자위 성격의 군사력 증대를 요구했다면, 세 번째 시즌에서는 본격적으로 세계에 대해 알아가면서 선제공격을 위한 군사력 확장을 다짐한다. 그래서 이는 금제=평화 헌법 해제의 근거로 내세우는 ‘자위적 성격의 선제타격’ 논리를 보좌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2. 


여기까지가 <진격의 거인>을 우익 사관을 다룬 작품이라고 비판하게 되는 첫 번째 대목이다. 그런데 이는 첫 인상이 좋지 않다는 것이면서도, 다음 인상은 또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논의를 계속해보도록 하자. <진격의 거인>을 바라보는 두 번째 인상은 이것이 역사를 서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를 서사화한다는 것에는 역사 왜곡이나 단순한 향유에만 그치게 될 우려가 상시 공존하지만, 하나의 역사로 묶인 이들 모두에게 어필할 수단이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상품이기도 한 본작에서는 결코 간과될 수가 없는 부분이다. 


물건을 팔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거나 띄워버리는 식의 국수주의라는 것이 아니다. <진격의 거인>에서 발견되는 일본의 역사적 요인은, 본격적으로 그것을 주장하기보다는 일본에서 잘 팔리도록 일본의 정서를 가져다 넣은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정서를 가져다 놓은 게 우익적 요인이니 결과적으로는 그런 쪽의 정서로 종합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더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시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는 언제나 소수의 의견을 묵살해왔으며, 바로 그렇기에 우리가 보는 것이 모두 전부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뻔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들 모두가 주류 사회의 의견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당장 한국부터가 군사 정권 시절에 언론 검열에 시달렸으며, 세상이 그에 동조하는 듯 보여도 자유와 진리를 위해 투쟁한 이들은 여전히 있었다. <진격의 거인>의 첫 번째 시즌부터 세 번째 시즌까지는 그것을 주축으로 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공 에렌 예거의 아버지가 사용하던 지하실에 어떤 비밀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서, 진실을 은폐하려는 정부에 대항해 해체 위기에 몰린 조직을 구해내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이루게 된다.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이는 이상하다. 금제를 깨부수고 정상국가화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보수적인 면을 투영하지만, 진실을 은폐하는 정부에 대항해 자유와 진리를 탐구한다는 점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후자 또한 골상학과 같은 부류의 왜곡된 마음일 수도 있다만. 기본적으로 자살특공대에 가까운 조사병단 조직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들이 체제에 대항하는 과정을 본다면 반전의 논리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첫 번째로 자살특공대처럼 보이는 점을 성찰해본다면, 자살특공대의 성립은 국가에 대한 (의심 없이) 맹목적인 추종으로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신뢰는 국가를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사병단이라는 조직의 유대로 귀결되는 면이 있으므로 조사병단의 설립 취지인 자유와 진리의 탐구에 맞물려 돌아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실상은 현대 일본의 우익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에 더 가까워 보인다. 1960년대, 일본에서 격렬한 학생 운동이 벌어졌을 때를 살펴본다면 그렇다. 일본의 학생 운동은 베트남전을 비롯한 미일안보조약의 쇄신 과정에서 많은 담론을 펼쳤는데, 그중에 하나는 평화 헌법이 과연 자국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지에 관한 물음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해설이 필요할 듯한데, 이하는 다음과 같다. 


3. 


제 1차 평화 헌법의 제정 시기, 일본이 패전해 미군정의 통치하에 있던 중의 일본 정부에 통치 권한을 위임함으로써 발효된 군사조약의 내용은 ‘미군이 일본에 진주해 일본을 비롯한 태평양 일대를 방어하는 대신, 일본 국가는 군사력을 포기하며 오직 자위 수단만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1960년에 이루어진 신(新) 군사조약은 ‘미군의 일본 진주’를 ‘주일미군기지’의 정식 창립으로 개정하는 안을 담고 있었다. 이때의 학생 운동은 베트남전을 필두로 한 반전 기류에 탑승해, 전후 일본이 완전한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미군이 일본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완전한 과거사 반성’을 통해 ‘올바른 힘의 사용법’을 획책하고, 그에 따라 평화 헌법이란 ‘타인에 의해 보호받는 항구적이고도 일시적인 평화’가 아닌, ‘자신의 손에 의해 과거와 미래, 정의를 실현하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 다음으로 작중에서 “이제부터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거인이 아닌 인간”이라고 말하는 대목을 본다면, ‘인간을 닮았지만 전혀 인간이 아니고 지성도 없는 괴물들’로부터 인간의 조건을 철저히 분리해두던 이들, 자기들 안에서도 충분히 ‘거인’이 될 수 있는 이들이 있고, 이는 곧 전쟁의 범주가 ‘나와 너’에서 ‘우리’로 확장됨을 의미한다. 동시에 괴물의 속성은 거인에서 인간 전체로 확장되고, 이러한 상황 속에 인간은 내면의 괴물을 어떻게 색출하는지 혹은 분리해내는지가 최대 화두로 떠오른다. 이 모습은 일본의 학생 운동이 자신의 외부를 제국주의 시절의 잔재, 폭력의 괴물들로 지정함과 동시에 내외에 숨어든 ‘쁘락치’ 색출에 몰두하던 것을 떠오르게 하며, 금제를 깨뜨리려는 시도는 그런 의미에서의 평화 헌법 격파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작중 조사병단의 모습은 현대 일본의 평화 헌법 개정 시도가 아닌 근현대 일본의 대체역사물로 편입된다. 예컨대, 평화 헌법 개정이 성공한 현대가 아니라 평화 헌법 개정을 ‘시도했었던’ 과거의 다른 맥락으로 작품을 바라볼 여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작품은 <지팡구>와 같은 일본의 대체 역사물로, 작품의 우익 성향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는 점 또한 동일하다. 어느 특정한 쪽으로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마도 ‘생략에 대한 비판’일 것 같다. 


이를테면 일본의 현대사에서 전쟁을 논할 때는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진격의 거인>의 세 번째 시즌에서 밝혀지는 몇몇 진상들은 ‘산업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한 ‘마레 제국’을 보여줌으로써 전쟁범죄 담론을 전 세계로 확장한다. 작중 마레 제국에서, 수용구에 갇힌 채로 생활하며 팔에 표식을 착용해야만 하는 에르디아 인들의 모습은 독일 제국의 유대인 학살을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고, 그런 맥락에서는 인류의 평화라는 거대한 개념에 부합하나, 오래전에 세계의 패권주자였던 에르디아 인이 거대한 힘에 패주하여 파라디 섬으로 이주했다는 대목은 핵을 맞고 쪼그라들어 버린 일본의 전후체제를 묘사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마레 제국이 연합을 이루어 에르디아 인을 몰아냈다는 점에서 연합군을 떠올리기도 하나, 이는 과한 상상이다. 오히려 본 작품에서 세계를 거진 하나로 뭉쳐진 것들로 묘사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거인들의 시조 유미르 프리츠가 최초로 거인화한 사실을 ‘악마화’라고 기록된 마레 제국 측의 묘사를 덧붙여 본다면, 에르디아 인의 파라디 섬 유배는 악마 같은 성질의 내적 격리이며, 격리를 통해 정화가 완료된 현시점의 이야기는 과거사를 정리해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정화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을 모르는 이들의 속죄를 과연 반성적 성격의 정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정확하게는 그들의 선조가 계속해서 백성들의 기억을 지우던 모습을 지적해야 한다. 


4. 


이것이 재기를 꿈꾸는 구제국의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파라디 왕국의 초대 왕은 자신이 패전했음을 인정한 채로 최후의 평화를 만끽하고자 했다. 이와 동시에 최후의 평화를 만끽한다면서 왕국 전체를 거인으로 둘러놓은 면은 모순으로 지적된다. 방벽이 거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풀려났을 때는 전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대목은, 전술적이고 범세계적인 무기에 의해 보장받는 반발적인 폭력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 시대에서는, 자위 수단으로 사용됨과 동시에 최후의 보루이면서 세계를 공멸로 몰아가는 무기는 ‘전술핵무기’ 밖에 없다. (이는 냉전시기의 대표적 분위기이기도 하다.)


이 가정이라면 ‘거인 대전’에서 패배해 파라디 섬으로 이주한 에르디아 인들의 모습은 명실상부한 대체역사가 된다. 거인의 능력을 통해 과거와 미래 계승자의 기억을 공유하는 진격의 거인이 자유와 진리를 탐구하는 이에게 주로 계승된다는 점도 그렇다. 작품의 첫 도입부에서 ‘2000년 후의 너에게’로 시작되는 문장이 작품의 결말부에서 ‘2000년 전의 너로부터’로 끝나는데, 인간 전체의 싸움으로 확장되어 가는 작품의 이야기 전개를 본다면, ‘역사는 언제나 반복되어 왔고’ 인제는 그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논의 아래에서 일본의 반전-반핵운동은 이이제이(以夷制夷)가 된다. 그말인즉슨, 악인은 악인끼리 잠들고 후일은 선인이 도모한다는 것이다. 


즉, 본작에서 거인을 배척해야 하고 타도해야 할 절대 악으로 규정했던 점을 생각해본다면. 그 절대악의 기준이 거인에서 인간으로 옮겨가는 세 번째 시즌의 이야기로부터, 세상의 모든 거인을 없앰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항구적’ 평화 획득을 획책하는 네 번째 시즌의 이야기로 나아가는 셈이다. 이때의 항구적 평화란 벽 안에 갇혀 자유와 진리를 억압당한 채로 얻는 자폐적 능력이 아니라, 개방된 공간에서 인간과의 대화를 통해 끌어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능력이다. 다시 말해서 평화는 곧 능력이다. 작품은 능력이 없는 이는 잡아먹히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능력이라는 게 꼭 힘의 운용만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물론 초대 파라디 왕이 파라디 섬으로 패주해왔다는 점과, 그가 나라의 패망을 인정했으면서도 여전히 자위권만은 내려놓지 않았다는 점을 두고서 패전 당시 덴노의 인간 선언을 떠올릴 수도 있다. 파라디 왕국에서 조사병단이 정권을 뒤엎기 전까지 왕은 그저 허울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분명, 가짜 왕을 세워둔 후 귀족에 의해 통치되던 파라디 왕국의 상황은 패전 국가로서의 일본에 부합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천황제의 폐지로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은 레이스 일가*가 자신을 그저 혈통으로만 이용할 뿐이라는 계승자 히스토리아 레이스에게 선택권을 주었으며, 그는 전장에서 진정으로 활약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왕으로 거듭난다. 그래서 이는 천황제의 정상화로 읽히기도 한다. (*주 : 파라디 왕국의 레이스 왕가는 가짜 왕에 밀린 후 레이스 일가로 살아왔음.)


이를테면 일본의 패전 후 전범재판에서 천황제의 폐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오갔던 것과 같은 사례를 말한다. 하지만 히스토리아 레이스도 타인에 의해 추종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왕가의 상징물로만 남을 뿐이다. 애초에 거인의 힘이라는 판타지적 요소가 결합된 세계관에서 현실과의 일대일 결합이 무리이기도 하다. (이점이 상상은 자유라는 방종으로 연결될 우려도 있다만. ‘그럼에도’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작의 자유와 비평의 자유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또한 만화 원작에서 결말까지에 해당하는 이야기에서는 다시금 국면이 변하므로 아직은 논의를 마무리 지을 수 없다. 다만 본 글의 의도는 <진격의 거인>에 대한 시선 중에 우리가 갖지 못한 다른 분과에서의 시도를 해보고자 함이었다. 우리는 작품을 마무리 지을 네 번째 시즌을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다. 


추가 : 약자가 강자일 수도 있으며 강자가 약자일 수도 있다. 작품을 관통하는 또 다른 주제인 이 문장은 보기 좋은 진리이자 정의 같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무서운 말이다. 세 번째 시즌 이후에 남은 만화의 내용에서는 해당 부분이 도드라지게 되는데, 자칫하면 만화 전체가 망가져 버릴 위험도 존재한다. 결말이 어떻게 날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덧붙임 : 아마 제 예상대로라면, 작품의 결말은 "파라디 왕국 없이 파라디 왕국에서 꿈꾸었던 미래를 획책할 수 있겠는가"일 겁니다.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의 당사자인 우리가 진정으로 사라져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진보적 의식입니다. 말하자면, "거인이 없는 세상에도 큰 사람(거인)은 있을 것이다."라는 테제가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날이 올지 의문을 품으면서도 우리는 믿지만, 그날이 오면 그들은 그자리에 없을 겁니다. 진격의 거인이 가진 기억능력도 마침표를 찍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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