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Jan 16. 2024

죄인의 원무곡


<스즈메의 문단속: 다녀왔어>는 영화의 마지막에 ‘다녀왔어’라는 대사 한 마디가 추가된 판본이다. 스즈메와 소타가 영화의 초반과 같은 구도로 재회할 때, 소타가 스즈메에게 ‘다녀왔어’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원본에서 대사 한 줄 추가되었을 뿐이지만 <스즈메>의 이 판본은 원본과는 맥락이 다르게 읽힌다. 가령 원본의 침묵이 <초속 5cm>의 연장선에서 바라본 <너의 이름은>과 이를 답습하는 간극의 연장선에 있다면, 특별판에서 추가된 대사는 이야기를 바깥에 확장하지 않고서 내부로 마무리한다. 영화의 초반에 스즈메가 집에 돌아와 이모에게 건네는 ‘다녀왔어’라는 대사는, 극의 중반부에 소타의 집에 방문한 스즈메가 ‘들어갈게요’라고 혼잣말하는 일로 뜀박질하여 영화의 후반부로 나아간다. 영화의 후반부에 명계로 건너간 스즈메가 재액신 미미즈에게 ‘돌려 드리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바로 앞에 도쿄의 상공에 펼쳐진 재액과 아래에 놓인 백만 명의 사람들의 이미지로 연결된다. 그 말인즉, 이들로서는 평범하게 일상을 영유했을 뿐이지만 그런 삶은 스즈메의 노력을 통해 다시금 이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다른 한편 스즈메가 명계의 미미즈를 봉인하고 난 뒤 마주하는 어린 시절의 자신은 바로 앞에 언급됐던 3월 11일 자의 일기에 응답하며, 검게 처리된 이미지의 간극에서 영화는 유년기에서 성년기로 점프한다. “스즈메는 재해를 겪고 난 뒤 ‘언제 죽어도 좋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 ‘살고 싶다’는 기분이 소용돌이치고 있기에 생명력이 넘치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신카이 마코토는 스즈메의 캐릭터성을 ‘3월 11일’ 이후 새로 시작되는 인물로 규정하면서 이후의 이야기를 추가판본에 빗댄다. 3월 11일 이전의 기억을 잊어버린 스즈메는 그녀의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하며 이는 그녀가 명계에서 목격한 인물이 사실은 ‘어머니’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관한 복선이 된다. 그런 점에서 스즈메가 소타와 함께 떠난 여정은 그녀가 스스로 진술하듯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오는 일, ‘귀향’의 주제의식을 갖는다. 


‘스즈메’의 특별판은 ‘다녀왔어’라는 대사를 통해 작품 전반에 복귀와 결합의 운을 불어넣는다. 어떤 면에서는 수미상관의 구조를 완성하기도 하는 이 대사는 스즈메를 비롯한 모두에게 ‘돌아와야 할 것’을 명령한다. 스즈메의 이모가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며 스즈메에게 진솔한 사과를 건네는 일은 “어른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책임지려 하지 말 것”을 명령하며, 이는 이따금 자신을 벗어난 것처럼 여겨지는 감정들에 대해 자유를 불어넣는다. “다녀왔어”라는 말로 맺음되는 <스즈메>는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듯 보인다. <너의 이름은>이 ‘잊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한편 <스즈메>는 이들에게서 ‘잊는다’라는 말에 관한 진술과 이에 이르게 된 계기를 소개한다. 일반적으로 재난을 다루는 영화라면 전자에서 출발하기 마련이지만, <스즈메>는 3월 11일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스즈메가 문득 폐허를 마주하는 일에서 이야기를 출발시킨다. 물론 그 방식이 잘생긴 남자인 소타를 따라가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점만큼은 장르적 공식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이어지는 전개에서 스즈메가 이상하리만치 재난에 매료되는 이유를 영화는 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다. 스즈메는 어째서 자신이 마주하는 풍경들에 매료되었던 것일까. 분명 스즈메는 소타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 자신이 뽑은 것이 미미즈를 봉인했던 돌임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스즈메가 재난에 매료된 것은 불러온 사태에 관한 책임감 때문이 아니며, 범인의 시선으로 볼 때 그녀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묘사에서 스즈메는 그저 잘생긴 사내의 “근처에 폐허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따라갈 뿐 자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나 담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여지진 않는다. 이야기를 처음 따라갈 때 관객은 스즈메가 폐허를 방문하는 이유가 소타를 발견하기 위함이 아닐지를 추론해보지만, 이런 가정은 미미즈의 누설을 보고 달려온 소타에 의해 곧바로 반박되어 영화는 스즈메와 소타가 다이진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뒤바뀐다. 결과적으로 이 전개에서는 이야기의 바깥에 자리한 이모가 관객의 입장이 되어, 스즈메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을 설명하고 있다. 


이모의 입장에서 바라본 스즈메를 생각해보고 싶다. 스즈메의 이모는 그녀가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이모는 스즈메가 왜 집을 나섰는지를 알지 못하며 마지막에 가서도 그녀의 진의는 “부모님이 계신 곳을 찾아가고 싶었다”는 즈음으로 숨겨진다. <스즈메>는 그 제목에서 스즈메가 영화 내내 하고자 하는 행위를 가리키므로 ‘문단속’은 영화 마지막의 도쿄 상공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옛 일본 황궁 터에 놓인 뒷문이 도쿄의 상공에 펼쳐진 미미즈의 장막에 연결될 때, 이곳에서는 구세계가 현세를 자기들과 동일한 ‘바깥’으로 끌어내리고자 하는 악의가 생겨난다. 요는 작중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한다고 알려진 대지진이 이들 세계에 대한 대멸종의 전조처럼 보인다는 점이며, 그런 점에서는 현대 일본 사회에 범유행한 바깥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그 이야기란 것은 바로 현대 일본 미디어가 이하의 두 가지 측면에서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는 점이다. 주기적으로 재난이 닥친다는 점에서는 세계가 무너지고 반복된다는 ‘리셋’의 감각이 있고, 재난이 닥쳐온 이후를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것들을 잊어야 한다는 ‘종말’의 감각이 있다. 요약하자면 새로 시작해야 하면서 여태까지 해왔던 것을 잊어야 한다는 두 개의 입장이 있으며, 여기서 문제시되는 건 이 둘 간에 완벽한 전환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세계가 끝나고 신세계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제시되는 전회의 지점은 상반된 것을 한 자리에 제시한다는 점에서 모순된다. 작중에서 스즈메의 태도는 정확히 그렇게 보인다. 스즈메는 새로 시작될 재난을 마주하면서도 자신이 기존에 겪었던 재난과 이별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마찬가지로 스즈메의 이모에게 문은 부모의 자리를 대신하지만, 정작 부모가 되어줄 수는 없다는 내외적 거리감을 가리키는 듯 보인다. 스즈메가 자신의 유년기와 이별하면서 성년이 되어야 한다면 스즈메의 이모는 그런 스즈메와 이별하고서 보다 원숙한 태도를 보여아만 한다. 스즈메의 이모는 스즈메와 같은 사건을 겪었음에도, 그녀의 보호자라는 입장을 따라 사건과는 거리를 두는 방식에 차이가 있어야만 한다. 


영화는 다이진을 막지 않으면 재앙이 계속되리라는 단서를 제시하면서 다이진만을 잡으면 모든 일이 끝날 것처럼 말하는데, 이야기가 후반에 들어설 무렵에는 다이진 스스로가 스즈메가 했던 말을 돌려주며, “스즈메, 네 아이가 되고 싶었어”라는 초장의 대사를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스즈메가 다이진을 처음 마주했던 창틀에서 그녀는 “너, 우리 집 아이가 될래?”라고 물었으며 이 장면은 영화가 따라가던 문단속의 여정이 사실은 ‘잊었던 것’에 관한 일임을 지적한다. 스즈메가 창틀에서 만난 다이진에게 물었던 말은 명계에 다녀왔던 어린 스즈메에게 스즈메의 이모가 건넸던 말과 정확히 같다. 그러니까 스즈메가 다이진을 대하는 입장이 이모가 스즈메를 대하는 입장이기도 하다는 걸 고려하면, 이들의 관계 또한 그렇거나 유사하다는 걸 알게 된다. 이야기상에서 순차적으로 제시되었던 아래 상황을 떠올려보자. 스즈메의 이모가 사다이진에 영향을 받아 자신에게서 ‘소중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던 부정성을 내보일 때 그녀는 “너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는 식의 발언을 한다. 그러나 스즈메의 이모는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스즈메에게 자신이 했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스즈메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때는 없었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감정은 온전한 하나일 수만은 없으며 어느 정도는 모순점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미미즈를 봉인하는 두 개의 돌이 다이진과 사다이진이라는 ‘소중한 것’과 ‘소중하지 않은 것’이라는 설정은 작품이 재난에 대하는 태도를 제시한다. 이른바 ‘바깥’에서 바라본 세계가 모순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이 지적은 스즈메가 살아가는 세계가 왜 합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면서까지 삶을 살아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된다. 스즈메의 이야기는 무언가를 떠나보내거나 떠올리는 일 어느 하나에만 집중하지 않고, 또한 어느 하나에 영향을 미치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 않다. 변화를 끌어내지 않고서 과거와 미래가 서로를 끌어안는 방식이 될 때 이곳에는 상호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재가 하나의 중첩된 지점으로 자리한다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가 다소 성숙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그렇다. 스즈메와 스즈메의 이모, 양쪽 모두에 어른이 되는 과정이기도 한 일련의 사건들에서는 무언가에 대한 강박적인 태도나 압력이 있지는 않다. <초속 5cm>가 갈라지는 것들에 대한 무기력함을 계절의 변화에 빗대는 일이 모노노아와레 같은 정서로 묘사된다면 <너의 이름은>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해법이라기보다 비술에 더 가깝다. 가령 <너의 이름>이 운명의 빨간 실을 사용하는 방식은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것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이어지는 것도 있다고 말하는 일이다. <너의 이름>은 마지막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 신카이 마코토 본인에게 <초속 5cm>의 확장된 판본에 해당하고 이를 위해 영화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혜성을 출연시켜, 영화가 서로 상반된 두 곳으로 갈라진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즉 여기서는 무언가 ‘찢어진다’는 감각이 형성되지만 이것들은 모두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제시될 뿐이라는 점에서 인물 개인에 자체적인 수행성을 담보하지는 않으며 여기서 회복되는 것은 되려 세계이다. <너의 이름>과 <스즈메> 사이에 자리한 결정적인 차이는 전자가 세계에 중점을 둔다면 후자는 인물에 중점을 둔다는 것으로, 대중성에 주안점이 있다는 <스즈메>의 감독 자체적인 평가는 현시대에 필요한 것은 세계를 바꾼다는 의식보다 개개인을 바라보며 지켜보아 주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다. <너의 이름>에서 혜성이 명실상부 인간이 손을 댈 수 없는 부류의 재난이라면 <스즈메>에서 미미즈는 너무 거대해서 인간이 그저 막을 수만 있을 뿐인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미미즈를 세계의 생물군에 포함하면서 인간과 공존하기에는 너무 과도한 것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자연이 원죄의 대상도 극복의 대상도 될 수 없다(<원령공주>)고 말했던 이전 시대의 관섭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세계를 바꾸는 게 불가능해서 개인을 바꾸라는 게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처럼, 재난이나 인간이 생태계의 일원일 뿐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이들 시대의 감정은 보편화할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이는 세계를 하나의 무대가 아니라 영화로 사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으스스하고 기이한 시간 운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