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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04. 2024

영화의 힘은 삶을 붙드는 것에 있다

<로봇드림>(2023)


“우리가 그 세계를 자유롭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파편화되었기 때문이다. 파편화되었기 때문에 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영화는 물리적 현실의 구원을 장려하는 데 특별히 적합한 매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로봇드림>(2023)에 대한 접근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이를 하나의 무성영화로 받아들이는 일이고, 두 번째는 연애나 우정을 다룬 드라마로 보는 일이다. 이 둘은 각각의 논의로 보아도 좋겠지만, 흥미롭게도 이 둘을 연결하는 대목에서 유독 빛을 발하는 것 같다. 가령 전자에서는 하스미가 제안한 “모든 유성영화는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무성영화에 대한 일방적인 찬사의 말이지만, 어떠한 변주를 향해 달려가는 유성영화에서 ‘틈’을 발견할 때는 마치 세상이 멈춘 것만 느껴져서, ‘무성’이라는 표현을 재고하게 된다. 소리가 세계의 구성요소라면, 그런 소리가 멈출 때 세계는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무성’은 세계가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는 순간이고, 연애 드라마로 치면 마음을 서로에 들킨 순간이다. ‘헉!’ 소리와 함께 음악이 작동하지 않게 되는 순간, 영화는 하나의 무성영화가 되어 서로의 틈새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어준다. 


이를테면 음악 ‘September’가 주된 지배요소로 사용되는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틈’은 영화의 결말이다. 도그와 로보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할 때, 화면은 로보의 If를 보여주는데 이 장면이 로보의 회상임이 밝혀지는 대목에서는 외부의 소리가 침투한다. 잠시 소리가 멈추었다가 돌아오는 대목에서 관객은, 이전에 경험했던 일을 근거로 좀 전의 일이 로보의 상상이었음을 깨우친다. 영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로보의 회상을 떠올려보자. 바다에서 조난한 보트여행객이 해변에 올라 로보의 녹슨 몸에 기름칠을 해주었을 때, 로보는 기쁜 마음으로 일어나 도그의 집 문을 두드린다. 이때 낮은 쇳소리가 화면에 침투하는데, 화면이 전환되면 쇳소리의 정체는 로보의 다리를 내려찍는 소리였음이 밝혀진다. 좀 전의 보트여행객의 미소는 ‘착한 것’에서 ‘사악한 것’으로 전환되고, 만남의 ‘순간’은 원치 않게 들어선 ‘틈’으로 변모한다. 영화의 결말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두 존재의 ‘순간’을 ‘틈’으로 환원한다. 


김소희는 <로봇드림>에 대한 비평에서 분리된 몸과 투과하는 흔적에 대해 논하며 ‘로봇’의 문제를 신체의 문제에 연결한다. 이와 같은 연출은 퀴어-섹슈얼의 맥락에서도 그렇지만, 영화가 기본적으로 ‘컷’과 ‘숏’이라는 접합의 예술이라는 점을 연상케 한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영화에서 음악은 기관 없는 신체를 형성하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도그와 로보가 서로 헤어진 이후로 계속되는 ‘공상’은 하나로 이어졌던 두 존재의 삶을 접합하려는 시도이며, 그러나 기계적으로 두 존재의 숏은 한 자리에 접붙여질 수가 없다. 그저 모호한 접합면에 붙들어질 뿐이며, 여기서 ‘음악’은 이와 같은 ‘기관’들이 하나되는 ‘신체’를 구성한다. 김소희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프랑켄슈타인’쯤 될까. 어쩌면 성별이나 애정 면에서 다소 모호한 면이 있는 두 존재의 모습에도 같은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둘 중 누구를 남녀에 빗대거나, 우정과 사랑을 저울질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삶을 무마하려는 음악의 거대한 선율 안에 붙들린다. 


흥미로운 점은 테이프가 끊어지는 연출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흥겨운 음악 소리가 프레임 안을 지배할 때, 테이프가 늘어지거나 하는 소리가 나며 시퀀스가 전환되는 연출이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더는 비디오나 테이프를 현생활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 현시대에도 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재고의 여지가 있다. 무언가가 ‘끊어진다’라는 일이 시각적으로 표현됨에 따라 음악이 중단되는 일은, 음악이 포섭했던 삶의 접합면을 드러내기에 효과적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순서가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데, 포섭되었던 게 제자리로 돌아갈 뿐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원래 둘이었던 게 다시 둘로 돌아가는 것일 뿐, 하나였던 게 둘로 갈라지는 게 아니다. 영화가 포섭해둔 순간들에서 보여지는 ‘틈’은, 멀어지는 힘에서 달라붙는 힘을 발현한다. 차이가 반복을 연성하듯이 영화는 시퀀스에서 숏으로, 숏에서 컷으로 축소됨에 따라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는 힘을 발휘한다. 그러니 헤어진 두 연인을 연상시키는 마지막 장면은, 반복의 연장선에 있다.


도그와 로보를 이어주는 것은 이들이 함께 보내던 시간을 대변하는 곡 ‘September’다. 영화의 마지막에 음악이 화면을 뒤덮자 도그와 로보는 각자의 자리에서 춤을 춘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화면의 절반을 분할해, 각자의 위치에 있는 두 존재를 하나의 면으로 접합한다. 이때 가운데 놓인 선명한 틈은 두 존재가 본래부터 둘이었던 존재라는 점을 부각한다. 특히 봉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한 이 춤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붙드는 게 바로 영화의 역할이라는 걸 깨닫는다. 어떤 이질적인 것을 봉합하는 게 영화의 주된 기능 중 하나라면, 어떤 이질적인 이들을 하나로 잇는 것 또한 영화의 기능인 것이다. 가령 영화관이라는 공간은, 평소라면 한자리에 모이지 않을 이들을 하나의 꿈으로 잇는다. 즉 영화의 기능은 무엇보다 숏과 숏 사이를 연결하는 것만큼이나,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무성영화도 마찬가지다. 무성영화는 소리가 자연스러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이례적’인지를 말해준다. 


영화는 불변의 순간과 이질적인 연결의 조합이라는 점에서, 철과 유기체의 조합인 두 존재를 닮았다. 잡음투성이인 삶에서 존재를 발견하는 일은 영화 매체가 갖는 발견의 미학을 대변한다. 삶의 여러 이질적인 순간이 소리에 감춰져 있고, 콘서트나 극장에 가는 건 그런 점에서 거대한 군중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김소희의 지적으로 돌아가자면, <로봇드림>은 숏과 시퀀스의 반복에서 어떠한 감정을 끌어내는 것만큼이나 영화를 하나의 존재로서 끌어안는다. 영혼이 찢어지고 형태가 무너질 때 영화는 존재를 포섭한다. 도그와 로보가 헤어진 후에도 줄곧 서로의 영화로 돌아가듯이 영화는 개인에게 존재의 틀을 제공한다. 말하자면 영화의 힘은 삶을 붙드는 것에 있다. 영화를 보는 일이 또 하나의 이별처럼 느껴지는 그탓이 아닐까. 음악영화의 기능이 삶의 어떤 순간을 봉합하는 것이라면, 무성영화의 기능은 봉합 안에서 삶의 어떤 순간을 드러내는 것이다. 영화가 존재를 포섭하는 방식은 그 자신의 분열을 드러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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