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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5. 2024

전투와 방위: 멀리 내다보는 것과 멀리 돌아오는 것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2024) 


모든 게 그대로인데 변한 건 나뿐임을 느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갈 때 창밖을 보면, 달리는 건 실제로 자신뿐임에도 창 밖으로는 숱한 물체들이 ‘스쳐 지나간다’. 영화를 보는 것도 그렇다. 영화가 어떠한 감상이나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건, 그가 화면 위에 ‘고정’되어 있는 덕택이다. 영화의 지리학은 많은 경우 기억을 좌표 삼기 때문에 항상 대중의 참여를 요구한다. 한 영화가 기억되는 방식은 영화가 지나오는 시대에 영향받으며, 그런 점에서 영화는 풍경의 일종이기도 하다. 동양 미술에서는 위아래나 양옆으로 펼쳐지며 연장되는 형태의 그림이 존재했음을 떠올리자. 이와 같은 연장은 정해진 프레임을 갖고서 운용되기보다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향해가는 여정에 있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화면은 한 곳에 고정되어 무대를 비추는 장치이기보다 관객과 동행하며 기억을 연장하기도 한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영화는 뒤처지거나 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 돌아보았을 때 영화가 달리 보인다면 이와 같은 점은 우리가 그만큼 많은 세월을 달려왔다는 점을 뜻한다. 


최근 개봉한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나 <듄>,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등은 모두 과거작을 리부트한 것이다. 많은 경우 이런 작품은 과거와 오늘에 이르러 달라진 점 등을 찾는 일이 주된 글감이 되곤 한다. 이 행위 자체가 작품을 보는 일에 대한 한 가지 관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작품이 살아 움직이며 생동한다는 인상을 준다. 다윈이 말하는 진화의 관점에서 이들 영화는 시대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생존해왔다는 것이다. 영화는 어떤 것을 취득하거나 버리는 방식으로 진화한다. 영화는 가장 존재할 법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퓨리오사>의 이야기는 본편의 주인공인 맥스보다 더 주인공 같았던 퓨리오사를 토대로 진화한 듯 보인다. 제목도 ‘매드맥스’가 아닌 ‘매드맥스 사가’로서 전작의 프리퀄임을 병기한다. 흥미로운 점은 <퓨리오사>는 이들 이야기의 시작점이 맥스의 등장이 아니라, 퓨리오사의 과거임을 말하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퓨리오사>는 매드맥스 시리즈를 오래된 시리즈물로 보기보다 리부트된 시대 안에 가둔다. 역사를 새로 쓰는 게 아니라, 어떤 역사를 가두고 있다. 


역사를 가둔다는 표현을 상기해보자. 판데믹 이후 세상에서 ‘감금’은 더는 타의적이거나 부정적인 행위인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감금은 현상이 이론을 앞서 간다는 점에서 창발적이었다. <퓨리오사>의 경우, 캐릭터는 21세기의 매드맥스 사가 안에서 발생한 캐릭터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토대로 어떠한 ’감금’이 발생하고 이를 토대로 매드맥스 사가 전체를 들여다보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가령 오래된 시리즈물을 본다는 건, 관점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관찰자의 태도를 요구한다. 같은 일이라도 표현법이나 화법이 달라지는데 이런 변화는 영화가 그 자체로 하나의 관찰자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영화 또한, 우리와 함께 시대를 횡단하면서 기억의 변화나 감퇴를 겪기도 하고 혹은 나이가 들어 보다 유해지기도 한다. 20세기의 매드맥스 시리즈가 보다 폭력적이고 국가적이라면, 21세기의 ‘맥스’는 그보다는 나이 들어 유해지거나 혹은 탈국가적인 면모를 보인다. 바꾸어 말해 <퓨리오사>의 이야기는 오히려 매드맥스 사가의 일부이기보다, 맥스가 도달하지 못할 여정의 끝자락에 자리한 ‘집’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퓨리오사>에 관해 말해야 하는 중대한 사실 중 하나는, 영화가 이야기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분노의 도로> 본작과 <퓨리오사> 본편 사이에는 이야기상의 공백이 있다. <분노의 도로>가 제작될 때까지만 해도 <퓨리오사>는 결정되지 않은 이야기였으며 이를 따라 인물의 과거나 행적은 베일에 싸였었다. 이는 <퓨리오사>의 결말이 <분노의 도로>의 시작점에 이어지는 일은, 작중 시점이 아니라 현실 시점으로 바라보아질 수 있음을 뜻한다. 즉, 만약 여인들에게 나누어준 복숭아가 실락원을 암시한다면 <퓨리오사>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관해 말한다. <퓨리오사>의 결말은 퓨리오사가 자신에게 희망을 앗아간 이가 되려 삶의 희망을 맺게 해준 듯 보인다. 전작이 낙원에서 추방됨으로써 인간이 되는 과정과 희망을 품는 일을 보여준다면, 본작은 낙원을 추방함으로써 인간에서 벗어나는 일과 희망을 탈락하는 일을 보여준다. 하지만 황무지에 희망이 탈락되었기에 퓨리오사는 이를 나무뿌리로 빨아들여 과실을 거두고자 했다. 만약 감정과 언어가 뿌리와 열매의 관계라면, 나무의 수관에 물을 올리는 건 혁명의 속성을 따르기 마련이다. 


처음에 퓨리오사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잊지 않고 간직하지만, 트럭 운전수 잭이 황무지는 어디를 가도 다 똑같고, 당장에 있을 곳은 여기라고 말하면서 이와 같은 마음은 반전된다. <퓨리오사>는 집으로 가는 방향을 알지만 정작 희망이 있는 방향은 모르는 듯 보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곧 희망에 이르는 길이 아니게 될 때 모험은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희망을 거두어 과실을 맺게 한다. 실낙원은 그곳이 어떤 실제적인 뜻에서의 ‘풍요’이기보다 ‘좋았던 시절’을 가리키는 용어에 더 가깝다. 살기 좋았던 때를 추억하며 당시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일은, 우리가 아는 희망이 앞으로 나아가는 일과 같은 방향에 있지 않음을 뜻한다. 방향 상실의 황무지에서는 앞쪽 말고 뒤쪽도 충분히 희망일 수 있으며, 영화 내내 방향에 집착하는 일은 거진 그렇게 보인다. 아마 <분노의 도로>에 이르러서야 여인들을 데리고 모험을 감행한 것은 그 때문일 테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끝나는지”라는 점. 희망이 상실된 시대는 전방위에서 좁혀들어 와진 ‘포위’와 ‘감금’의 사태와도 같다.


어느 오래된 영화를 시간이 지나 다시 보았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과거의 경험과 동일하지 않다. <퓨리오사>와 <분노의 도로> 사이에 놓인 간극은 이상하리만치 과거와 희망을 일치시키려는 작업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리부트는 자신이 머물렀던 곳을 재구성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매드맥스 시리즈가 어떠한 분노의 감정을 두고서 이를 한 곳에 정착할 수 없게 하는 방식으로 횡무지를 표현한다면, <퓨리오사>는 퓨리오사 개인에게서 ‘정착’을 발견하고서 이를 하나의 ‘감금’으로 사유한다. 쉽게 말해, 이곳에 펼쳐지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퓨리오사이며 그런 점에서의 퓨리오사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기억이 그대로 있더라도 이를 마주하는 주체가 바뀌었다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힐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개인에게서 성장을 발견하는 일은 그만큼 과거를 멀리 내다보게 되었음을 뜻한다. 결국 영화의 제목은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매듭지으면서도, 그녀를 특정한 시점에서 벗어나 그냥 이야기 안에서 오래된 인물처럼 느껴지게 한다. 


영화는 항상 하나의 ‘시선’을 동반한다. 영화는 만드는 쪽이든 보던 쪽이든 간에 항상 특정한 ‘시선’을 동반하므로, 영화의 목적은 그 자체로 여정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으로 <퓨리오사>를 바라보면, 21세기 매드맥스 사가에서 퓨리오사의 모습은 그 자체로 어떠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퓨리오사>는 오래된 과거를 복수심에 대한 좌표로 사용하지만, 복수가 완성되었을 때는 그로 인해 시간을 잃어버린다. 수미상관을 이루는 구조가 하나의 감금을 이루고 나면, 이제 영화는 하나의 시대에서 벗어나 시대를 횡단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제 황무지는 어떠한 여정에서 배경이 아닌 공간이 되고야 만다. 복수가 완성된 퓨리오사는 이제 공간의 주인에서 벗어나 맥스에게 이름을 내줘야만 한다. 이와 같은 설계의 방식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아마도 황무지의 사용법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일 것이다. 본래 황무지란 한 시대를 극단으로 몰고 갔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막장’을 보여주는 역할이었다.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자본주의 막장이나, 아니면 <로건>이 말하는 엑스맨의 멸종이나. 이들 모두는 과거와 미래를 잃어버리고서 현재에 고립되고야 만다. 


<퓨리오사>도 매한가지지만, 오히려 과거를 잃어버림으로써 영화는 탈신화화한다. 영화가 묘사하는 생명의 땅은 <분노의 도로>에서 이미 오래전에 멸종된 것으로 드러나지만 적어도 <퓨리오사> 본편에서는 정말로 존재하는 낙원이다. 즉, 생명의 땅은 영화의 프레임 바깥 어딘가에 자리하며 이야기 구조로 본다면 <퓨리오사>의 낙원은 이미 바깥에서 내부를 회상하는 형식이라 보아야 할 테다. 바로 이 형식이 판데믹 이후에 우리에게 허락된 이야기 구조다. 이전 시대에 감금이라는 말이 이야기의 기승전결 안에서 활동하는 인물의 양식을 가리켰다면, 오늘날 감금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에 대한 타임캡슐에 가깝다. 아주 오래된 과거가 그곳에 있다고 믿는 일은, 영화가 보여주는 것과 관계없이 작중 이야기나 인물에게서 외부의 자신을 투영해서 미래를 관철하는 일과도 같다. 바꾸어 말해, 이미 오래된 과거가 되어버린 생명의 땅은 그 실존이나 생존 여부와 관계없이 퓨리오사가 개인의 복수심을 복수하는 개인으로 환원하는 일에 밀접히 연관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퓨리오사가 거둔 나무열매처럼, ‘낙원’의 진실은 사유하는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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