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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04. 2024

현실의 잔영에 연결되기

<드림 시나리오>(2023) 

illstration by John Godfrey


<드림 시나리오>는 꿈에 관한 많은 속성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영화의 몇몇 특징을 떠오르게 한다. 첫 번째, 영화를 두고서 집단 무의식에 빗대는 많은 논의가 있다. 이 논의들은 영화가 대중의 의식을 반영한다고 말하면서, 이에 대한 근거로 영화의 ‘동시대성’을 든다. 한 영화는 시대상의 변화를 마주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시대에 따라 영화를 바라보는 시점이 달라지기에 영화는 항상 ‘집단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칼 융이 주장한 집단 무의식 설에 기반한다. 칼 융은 인간의 무의식을 파고들면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무의식의 바다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따르자면 역사에 반복되는 여러 유사 사건들은 인류의 무의식에 그와 같은 ‘데이터’가 쌓이기 때문이다. 특히 벤야민의 경우, 영화는 이와 같은 집단 무의식에 불을 붙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영화를 혁명의 매체로 파악한다. 벤야민은 영화에 흩어진 인간 무의식의 근원을 찾는 일을 혁명의 넝마주이에 빗대면서, 이를 다시금 하나로 승화하면 비로소 파국의 흐름을 끊는 혁명이 일어나리라고 보았다. 영화를 두고서 ‘깨어남’의 매체로 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집단 무의식으로서의 영화란 그와 같은 꿈을 부수기 위해 태어난 것이었다. 


이 맥락으로 <드림 시나리오>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우리는 다소 이질적인 대목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는 주인공인 폴(니콜라스 케이지)을 사람들의 꿈에 등장시키면서 이에 관한 논의를 심리학으로 확장한다. 후반부에 폴은 “칼 융이 옳았다”는 점을 입증하는 사례가 되어, 꿈에 접속하는 기구를 발명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즉, 영화에서 폴은 인류에게 꿈이 확장되거나 개발될 수 있는 영역임을 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프로메테우스가 된다. 헌데 프로메테우스의 삶이 어떻게 끝났지를 떠올려보자.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에 혁명이 되었지만, 그에 반해 자신은 혁명의 넝마주이가 되고야 만다. 인류학적인 면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사실상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에 대한 언급에 가깝고, 영화에서 폴이 그렇다. 우리가 폴을 평가할 만한 대목은 그가 부수어낸 것이 과연 어느 쪽인가 하는 것이다. 폴이 집단 무의식을 발견한 일은 그동안의 삶에서 사람들을 깨어나게 한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접근하지 못하던 집단 무의식을 깨어나게 한 것일까. 과학자는 항상 인류가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다고 말하면서 1퍼센트의 가능성을 말하곤 한다. 이를 따르자면, 우리가 무언가를 알게 된 시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발생한다. 


벤야민이 영화에서 얻으려 했던 건, 영화가 현실을 닮았지만 반대로 현실이 아니기에 ‘깨어남’의 현실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꿈이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처럼 생생하기에 그에서 얻는 경험이 트라우마나 대리만족 등의 분과로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서 대중은 폴이 실제로 위해를 가하거나 한 것이 아님에도 트라우마를 느낀다. 폴은 현실과 꿈이 완전히 동떨어진 영역이라 항변하며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하지만, 이내 자신의 꿈에 등장한 자신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앞선 입장을 바꾼다. 폴이 대중에 울먹이면서 자신 또한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항변하는 일은 아내에 의해 “제대로 된 사과가 아니”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만약 타인에 대한 사과가 사건에 대한 깊은 이해와 동감을 바탕으로 한다면, 폴이 느낀 감정은 폴의 현실과 꿈 사이에 간극을 허문다. 이때 폴의 모습은 그동안 가로막혔던 이해에 다가섰다는 점에서 경험에 근간한 진술로서의 공감을 지시한다. 이전까지는 대학교의 학장처럼 꿈을 꾸지 않기에 그 꿈을 이해할 수 없었던 폴은 꿈을 꿈으로써 집단 무의식에 다가선다. 이 경우, 폴은 그 꿈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바꾼 게 아니라 되려 자신이 폭발의 중심에 서기에 꿈의 행위 당사자가 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잔 벅 모스는 일찍이 자본주의 사회를 ‘꿈의 세계’에 빗대면서, 벤야민의 ‘혁명’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반역의 시도로 평가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자본주의 세계를 두고서 항구평화론에 빗댄 일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여름의 정취를 좋은 꿈의 영역으로 넘겼다. 그러나 꿈의 좁아지는 문턱 앞에서 여름이 끝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나면, 이제 좋은 꿈은 우리가 보듬지 못한 영역들에 관한 적대감으로 변이한다. 폴에 접촉한 연예회사는 폴의 이미지가 호감에서 비호감으로 넘어가더라도 그를 인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꿈에서 탈락하는 것은 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폴은 마치 하나의 바이러스처럼 이미지의 유불리와 관계없이 줄곧 살아남는 것처럼 보인다. 성공한 비즈니스 밈이 된 폴에게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쓸모는 탈락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여름이 끝나지 않는다는 건, 좋든 싫든 간에 폴이 자본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밈의 특징 중 하나는 외형이 본질을 넘어선다는 점에 있다. 바꾸어 말해 폴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보다는 늘 같은 이미지나 변형된 판본으로 타인의 꿈에 등장해온다는 점이 회사로서는 더 중요했다. 


영화는 현실의 당사자가 될 수 있을까? 영화가 항상 현실의 인상에 불과하다는 표현은, 영화의 지위를 현실의 아래에 두기보다 잔영을 남기는 현실에 제동을 거는 일로 여겨졌다. 현실에서 좌절된 꿈이 잇따라 꿈의 영역으로 떨어지는 일은, 꿈을 두고서 ‘현실을 연결하는 것들’에 관한 잠재적인 이미지로 여기게 했다. 사람들에게서 꿈을 꾸는 일은 그 자체로 꿈의 추락망 안에 떨어지는 일을 막아주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꿈의 영역에는 하한선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점으로 인해 이 꿈은 실패한 혁명이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 초반에 폴이 스스로 진술하듯, 얼룩말이 얼룩에서 얻는 이점은 집단 안에 있을 때 포식자에게 개체를 식별할 만한 요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논의에서 개체는 집단이 남긴 잔향처럼 파악되어, 포식자에게 한 개체를 쫓는 일은 집단의 잔재를 따라가는 일이 된다. 영화도 그렇다. 영화는 누군가의 현실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모두의 현실이기도 하기에, 우리 자신은 항상 모두의 꿈이 되고야 만다. 영화를 하나의 집단 무의식으로 파악할 때, 영화 안에서 별개의 요인을 쫓는 일은 어떠한 의미 관계로 도출되지 못한다. 영화를 집단 무의식으로 파악하는 일은 그래서 오직 ‘혁명’이라는 폭발 사태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폴은 꿈의 영역을 다룬 최초의 인물로서 혁명의 넝마주이가 되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늘어진 필름처럼 흐트러져야만 한다. 로라 멀비가 영화에 남긴 유명한 말 중 하나는 1초에 24번의 죽음으로 현상되는 영화 필름이 흐트러지는 일이 그 정지 상태의 얽힘에서 죽음의 불가능성을 입증한다는 점이었다. 영화에서 폴이 사람들의 꿈에 처음 등장했을 때를 떠올려보자. 처음에는 관찰자로 등장하면서 개인의 긴급 사태를 방관하지만 이내 그는 사람들에 위협을 가하는 원초적인 위험으로 변이한다. 특히 이 과정은 반복되어 등장한다는 점에서 연속적이며, 그런 점에서는 한 이미지가 생명을 갖고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가 묘사하는 그대로 밈이라는 표현을 사용해볼 법한 이 이야기에서는 우리가 영화를 꿈에 빗대는 이유가 최소한 우리보다는 더 오래 살아남으리라는 점이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꿈에 접속하는 기기라는 점에서는 곤 사토시의 <파프리카> 같은 소재가 떠오르기도 하는 가운데, 우리가 꿈에 접속하려면 적어도 개인의 삶보다 더 오래되어야만 장소가 존속 가능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말하자면 영화는 항상 개인을 초과하기에 이를 멈출 수단은 혁명이라는 것이다. 


영화사가 인류학의 한 기원을 설명하듯 분석심리학에서 꿈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었다. 자기가 되지 못하고 탈락된 잔재가 꿈이라고 보는 입장에서 ‘집단’은 오히려 ‘내’가 되지 못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인식과는 반대다. 이 경우 인간 존재가 꿈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일본의 모 애니메이션 IP인 [디지몬]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디지몬]은 인간의 세계에 디지털이 침투하는 일을 두고서 꿈의 현상세계에 대한 재편으로 바라본다. 인간을 연결하는 게 꿈이라면, 디지털 세계는 인간 세계의 인프라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꿈의 세계로 볼 수 있을 테다. <드림 시나리오>는 한 인간이 집단 안에서 데이터화되는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 매체가 갖는 흥미로운 자산을 끌고 들어온다. <드림 시나리오>는 오늘날 디지털 세상을 떠도는 밈이 웹을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집단 무의식으로 이용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한 인간이 변별력을 지님에 따라 꿈의 세계가 불멸에 대한 욕구를 간접적으로 채워주는 곳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꿈 세계를 여행하는 일은 거진 잠을 자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가 집단 무의식을 표현하는 창구라면 여기서 관객은 그 자체로 밈이 될 수도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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