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랜드>(2024)
직업으로서의 평론가가 하는 고민 중에 하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한 플랫폼은 자체적인 인력풀을 꾸려 지면을 끌어가는데, 다들 보는 눈이 비슷비슷하니 한 작품에 경쟁이 붙을 때도 있다. 가령 조나단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김태용의 <원더랜드>가 비슷한 시기 개봉했는데, 대부분은 전자를 하고 싶어한다. 결국 비평적으로 흥미롭거나 다루기 좋은 작품은 더 능력이 있거나 분야적으로 더 전문적인 이가 맡게 되고는 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를 반대로 응용해서, 비평적으로 소기의 성과가 있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자신의 우수함이나 전문성으로 포장하려는 일도 있다는 점이다. 확실히 모두가 마이크를 잡을 수 없다는 점은 수긍이 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량이 성능으로 대체되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다. 가령 <존오인>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계속되는 나치 독일의 범죄 사실을 고발한다. 이 진술은 아마도 우리가 인식하는 근미래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고발 자체의 윤리의식과는 별개로, <카포>를 인용하며 미끄러지는 관찰자의 시선이 우리의 근미래를 더 밝게 해줄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잘 이해하는 것처럼 세르쥬 다네는 “강제 수용소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과 영화는 올바르다는 사실을 동시에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이미지들의 이상스런 세례식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마치 발타자르처럼, 여기서 관객은 ‘올바르게’ ‘존재한다’는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짊어진다. 마치 쌍봉낙타처럼, 형식에 대한 문제와 실존에 관한 질문이 양립할 때 관객은 세례자가 된다.
기독교에서는 형식과 질문이 일치할 때를 두고서 이를 어떠한 형상으로 본다. 고쳐 말하자면 질문에 응답하는 형식으로써 형상이 호명되는 때가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에 대한 시각성으로의 환원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의미작용의 일환이다. 반면 영화에서 형상의 문제는 신학적이라기보다 미학에 더 가깝다. 어떠한 사건이 분명하게 일어났을 것임에도 이를 역사가 목격하지 못했다면, 이와 같은 진실의 사례를 어떻게 후천적으로 구성할 것인지의 문제의식이 홀로코스트에 있다. 여기에는 소시민적이기에 간과된 것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숨겨진 시각적 상황들에 반하려는 시도 또한 있다. 홀로코스트는 분명히 일어난 사건이기에 반대로 관객 또한 분명한 증인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보아야만 하는 자리에 서는 일은 반대로 이미지의 생성과 응결을 강제하면서 관객이 응급상황에도 밖으로 탈출할 수 없게끔 한다는 점에서 위험소지가 있다. 이처럼 목격을 강제하는 일은 과거에 응당 필요한 조처로 여겨졌지만, 판데믹 시기를 거치며 감금에 대한 해석의 방식이 달라지면서 그 해석의 방향이 달라진다. 가령 감금은 정말로 교화나 훈육의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존오인>은 관객이 있는 검은 방을 밝은 방으로 바꾼다는 점에서 세계와 통용하지만, 의미의 고정에서 외부를 배제하기에 세기의 배면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가 일구어낸 성과와는 별개로 바깥의 상실에서 연결을 지시하는 대목은 미래에 대한 선제타격과도 같다는 점에서, 우리가 돌아보게 될 미래를 상실하게 될 우려가 있다.
<원더랜드>에 관해 말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영화가 아니라 영화의 전후다. 전후의 시점에서 전쟁 당시를 바라보는 홀로코스트와 마찬가지로 <원더랜드>는 판데믹 시기의 한 문제의식을 바라본다. <원더랜드>는 비대면 상황에서 서로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감금의 속성과 결부지었던 판데믹 시기의 한 담론을 되풀이한다. 가령 작중에서 정인(배수지)은 왜 자신을 우주에 있는 것으로 설정했느냐고 묻는 태주(박보검)의 질문에 “내가 생각하는 것 중에서는 가장 멀리 있는 곳이어서”라고 답한다. 정인에게 우주는 가장 먼 곳인 동시에 비현실적인 장소다. 정인이 태주의 현실 상황과 거리를 두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이 결정은 죽음이나 이별에 대한 현실감각을 늘어트림과 동시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 연결된다고 본다. 이를 위해 주체는 스스로에 감각을 차단해야 하고, 또한 공간을 창출하거나 포섭하는 일에서 멀어져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원더랜드>는 조나단 글레이저의 전작인 <언더 더 스킨>의 감각에 어느 정도는 통용된다. <언더 더 스킨>의 인상 깊은 소화 장면을 떠올리면 우리는 영화가 갖는 검은방의 기능과 판데믹 시기의 암부가 관객을 거리의 산책자로 만들고, 이를 다시금 풍경을 체화하지 않는 주체로 변환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두 영화를 같은 선에 두고 바라보려는 건 아니다. 다만, 고전적인 형태의 감금을 밀고 나가는 일과 판데믹 시기의 감금을 밀고 가는 일, 그리고 이들 모두가 서로를 과거에 사로잡는다는 점에서 이들 영화는 생각할 만한 거리를 던진다.
<원더랜드>에는 유리벽에 안팎이 반사되어 서로 중첩되는 연출이 자주 나오고는 하는데, 이는 영화 등에서 다소 흔한 연출이면서도 영화 안에서는 시기적으로 별개의 의미를 얻는 듯 보인다. 스크린을 창에 빗대고, 이를 다시금 거울에 빗대는 영화 이론에서 이들 연출은 관객과 영화 간에 간극을 지우면서 두 세계를 배면에 맞붙이는 효과가 있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바깥을 상실한다는 점에서 자발적으로 감금의 사태로 진입하는 일이고, 대면 중이지만 정말로 만나고 있지는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이들 소재는 과학적이기보다 드라마에 더 가깝다. 서로를 연결하려면 오히려 절단이 필요하다는 것, 영화에서 이는 서로를 대면하지만 상대방을 진실되게 여기지는 않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정인이 기억하는 태주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한 번의 초기화를 거친 태주는 과거에 추억을 함께했던 그 사람이 아니다. 영화 후반에 해리는 바이리(탕웨이)를 초기화하자는 현수(최우식)의 제안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부모님을 한 번 초기화해봤기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답한다. 이들 진술에서 영화가 제시하는 것은 연결이다. 인간의 의식에 연속성이 있어야만 하나의 인격이 유지되듯, 이를 절단하거나 하면 겉만 같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만약 영화가 하나의 꿈이라면, 이들 인물이 줄곧 들여다보는 스크린 인터페이스는 우리에게 영화와의 절단이 꿈을 적대하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일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요컨대 한 세계를 만난다는 건, 서로의 꿈을 적대하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결론이 나온다.
영화에서 줄곧 등장하는 거울상은 굉장히 다양한 형태의 단절을 묘사한다. 휴대전화 형태의 디바이스는 화면이 꺼지면 검은 화면으로 돌아가 개인의 얼굴을 비추고, 유리창 형태의 디스플레이는 표시 기능이 꺼질 때 건너편의 세계를 마주하게끔 한다. 이는 과거에 영화가 하나의 영역을 전개해서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과는 달리 관객의 현실에 직접적으로 영역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신기에 가깝다. 그러나 영화가 관객에 직접 다가선다는 것은, 바꾸어 말해 우리가 영화의 앞에 서 있을 만한 공간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가 스크린에 최대한 밀착하려 할 때 우리는 진실의 앞에 서 있을 자리를 잃는다. 즉 한 영화가 개인의 삶과 분리되지 않을 때 개인은 영화 앞에서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항상 영화의 몫이었다. 그래서 혹자는 홀로코스트에 관해 말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영화를 찍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영화가 갖는 감금의 기능은 진실의 위치를 특정해서 구획하고 이에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배치하는 일에 효용이 있다. 그 말처럼, 홀로코스트에 대해 말하는 일은 몹시 쉽다. 홀로코스트는 실제 사건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말하는 일은 있는 그대로의 진술이 된다. 그러나 만약 관객이 있을 자리가 곧 진술이 된다면 홀로코스트는 증명이 아니라 부재에서 그 당위를 인정받기만 할 뿐이다. 판데믹 시기에 제작된 <원더랜드>의 뒤늦은 도착이 보여주는 게 그렇다. <원더랜드>는 무언가를 증명하기보다 증명하지 못한다는 점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영화이다.
<원더랜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만 어떤 목소리를 얻거나 언어로써 통용된다는 점에서 국지성이 있다. 이 점이 한 시대의 풍경을 간직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나쁘게 말하면 이미 옛것이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구태여 판데믹이 아니더라도 이런 연출은 분명 우리가 피폐하게 여겼던 과거와는 다른 점이 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이 기술들이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다분히 현실적인 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원더랜드>는 넓은 범주에서 현실을 떠나있는 것들을 디지털화하는 일을 다루고, 그런 점에서 비현실이 현실 안에 드러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런 점이 영화가 거울을 통해 드러내는 실재의 이미지론과 얼핏 닮았다고 느낀다. 영화의 후반에 해리는 데이터의 바다에 있는 바이리의 인격을 초기화하지 않았고, 이를 통해 진실은 영화의 입을 빌려 전해진다. 여기서 진실은 우리가 현실에서 지각하는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라 진솔하게 고백한다는 쪽에 가깝고, 이와 같은 고백은 그녀가 스스로를 감금 상태에 놓아 외부세계를 내면으로 받아들일 때야 비로소 가능했다. 그런데 외부가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자기를 특정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우리가 영화에 관해 말하는 일은 그 현실이 깨어진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진실을 위해 외부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의 상실을 염두하기에 이는 전적으로 영화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우리는 한 영화를 두고서 그가 현실에 바깥을 내어주기를 요청하고, 연결의 중단은 오직 탈진실의 과정을 향해서만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