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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08. 2024

그 외화면들과 정반대의 아름다움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


씨네 21의 오진우는 조나단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두고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가스 냄새를 감지하다』가 생각났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의견을 물려받아 영화를 보며 들었던 생각을 갈무리해보고 싶다. 우선 역사와 파국에 관해서다. 역사 안에 많은 제국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사라졌으며 현재 진행형으로 남은 건 미국뿐이다. 우리의 세기에서는 소련이 마지막으로 무너진 제국이었는데, 흥미로운 점은 ‘붕괴’의 원인이나 결과는 마치 ‘가스냄새’처럼 다가온다는 점이다. 한 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는 사태를 수습하고 나서야 그 사건의 원인에 대해 추론하지 그게 왜 벌어졌는지를 당장에 감지하지는 못한다. 쉽게 말해, 제국은 분명 하루아침에 무너진 게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의 시각 안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알렉세이 유르착은 “붕괴는 그것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감히 예측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막상 붕괴가 시작되자 곧장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흥분되는 사건”이었다고 말한다. 모든 게 영원할 것만 같던 시기, 붕괴는 갑작스레 찾아왔고 이내 ‘종말’은 하나의 흥미로운 ‘사건’이 되었다. <존오인>이 다루는 시점도 그렇다. 나치제국의 1943년은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에 균열이 벌어지는 시기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졌고, 이탈리아가 항복했으며, 독일 전체가 총력전에 들어섰다. 독일의 항복이 2년여 남은 시점이었지만 수용소에서 반년을 넘기기 채 힘든 상황에서 2년은 그야말로 ‘영원한’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은 영원했고, 영화는 그 외화면과 정반대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디디-위베르만은 위의 책에서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작스럽거나 느린 파괴를 거쳐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파국의 속성을 ‘무색무취의 가스’에 빗댄다. 이 착상은 당시 나치독일이 유대인 학살에 사용했던 지클론 B를 떠오르게 한다. 광부들은 막장에서 누설되는 가스에 대한 안전책으로 작은 카나리아를 키웠지만, 현실의 길고 긴 터널에서 누설되는 건 모든 것이 영원하리라는 사실뿐이었다. 오늘날 유독가스는 가스가 누출되는 일을 감지할 수 있게끔 내용물에 ‘냄새’를 혼합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유대인을 위한 ‘샤워실’에서는 그들에게 닥쳐올 ‘파국’이 예견되어서는 안 됐다. 이 두 사례를 비교하면 우리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이 드러내는 것은 “느리지만 천천히 파괴되는 것, 갑작스레 출몰해오는 미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디디 위베르만이 <사울의 아들>에 대해 쓴 책인 『어둠에서 벗어나기』에서 언급한 대목을 떠올려보자. 디디 위베르만은 지옥에서 건져 올린 네 장의 사진을 두고서 ‘권력의 서치라이트가 활보하는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반딧불의 잔존’에 빗댄다. 이 책에서 디디 위베르만의 주된 주장은 네 장의 사진이 느리지만 천천히 다가오는 파국의 순간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사진을 촬영한 존더코만도는 영원에 파묻혔지만, 사진은 오늘날에 살아남아 파국의 속성을 전하고 있다. 이 사진들은 단순히 아우슈비츠의 내부를 촬영했다는 점 이외에도, 영원의 순간을 언급하기에 의미가 깊다. 영원의 순간을 찍은 네 장의 사진은 훗날 파국의 형상으로 재몽타주화되었다. 


“‘인식 가능성’의 현재 속에서 사태에 비판적 역량을 마련하는 것은 바로 대조와 차이다.” 존더코만도가 찍은 네 장의 사진은 서로 동떨어진 네 개의 쇼트로 구성되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들 사진 간에 존재하는 간극을 되새긴다. 우리가 아우슈비츠에 대해 알 수 없는 사실이 이들 쇼트 간의 거리보다 더 컸던 것이다. 바로 이 목격담으로 인해 우리는 아우슈비츠가 정말로 실존했던 장소임을 알 수 있었다. 나치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항변하면서 존재를 말살했던 일에 대한 단 하나의 파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존오인>은 그런 관점에서 논해볼 수 있는 영화다. 오늘날 아우슈비츠에 관해 말하는 작품들은 모두 아우슈비츠의 ‘내부’를 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생존자의 수기를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내부의 관점으로 밝혀져야만 비로소 사실(어둠)에 대한 하나의 증명(반딧불의 잔존)이 되기 때문이다. <존오인>은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의 일상을 따라가며 배경 너머에 보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영화는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혀 보여주지 않으며 심지어 중간에 한스가 수용소에 들어갈 때는 아예 화면에 섬광을 터트려버린다. 마치 어떠한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이, 혹은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는 듯 보이는 이 과노출은 존더코만도가 찍은 네 개의 사진이 우리에게 기적처럼 전달된 사실을 상기시킨다. 필름 사진은 많은 경우 노출 과다로 인한 프린트 손상을 겪었으며, 바꾸어 말해 사진이란 것은 은판 위에 아주 오래도록 자행되어온 학살의 시간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나치독일에게 가스실은 제국이 영원하리라는 사실을 전파하는 무대와도 같았다. 무색무취의 가스실은 사망에 이르는 30여 분의 시간을 영원에 가깝게 했고, 아우슈비츠에서는 1942년에서 종전 바로 직전까지 150만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파국의 순간은 느리지만 확실히 찾아오고 있었다. 모든 죽음이 영원과 수평선을 달릴 시기에 아우슈비츠는 갑작스레 해방을 맞이했다. 죽음의 무도회는 인간의 몸과 기밀문서가 같은 곳에 놓일 때 비로소 종말을 마주했다. 복도를 거닐던 군인들의 총성이 선명했던 어느 날 밤, 아침을 마주한 수감자들은 수용소의 정문으로 진입해온 탱크 소리를 듣는다. 오늘날 수용소에서 삶을 기록한 많은 수기들에서는 이와 같은 파국의 순간이 찾아오는 일을 선명하게 묘사한다. 가령 프리모 레비는 “우리는 이곳에 오기 전 삶에 대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흐릿했고 아득했다. (...) 반면 수용소에 들어오는 순간 각자 전혀 다른 일련의 기억들이 시작되었다. 매일 상처가 덧나듯 현재의 경험에 의해 상기되었다.”라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아우슈비츠라는 검은 방이 희생자에 한 이미지를 덧씌우는 경험은 극장이라는 검은 방이 관객에 파국의 기억을 새겨넣는 것과 얼추 유사한 과정을 거친다. <밤과 안개>를 찍었던 알랭 레네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졸업 작품으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찍었다. 우리가 극장의 어둠에 속해 목격한 것은 영화의 결말과 함께 과잉노출로 산화돼버린다. 이제,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권해효는 홍상수의 <여행자의 필요>에 관한 인터뷰에서 “해순이 하는 말이 아무런 맥락 없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나중에 영화를 볼 때 그 반복들이 쌓여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굉장히 묘한 감상이 일었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권해효가 출현한 홍상수의 전작 <탑>이다. 권해효는 “이번에도 각 촬영 장소를 계속 방문하면서 ‘이 공간엔 어떤 사람이 놓여 있어야 좋을까’라는 고민에 몰두했다.”고 진술한다. 경우는 다르지만, <존오인>은 아우슈비츠를 현대 영화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홍상수의 작법과 유사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조나단 글레이저의 이 영화에서 아우슈비츠는 내부자의 시점에서 부분적으로 상상되어 하나의 추상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학살과는 전혀 맥락이 다른 것들이 나중에 영화를 볼 때 점진적으로 하나의 ‘파국’을 향해가는 일에서 오묘한 감정을 준다. 이를테면 영화의 후반부에 정원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바로 옆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비료를 얻는다. 혹은 두 아이가 정원의 건물을 두고 서로를 감금하며 장난하는 일은 감금이나 구속에 대한 단어의 속뜻을 지위적으로 뒤바꾼다. 인물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카메라는 <카포>의 트래블링 쇼트(Travel shot)에 관한 속뜻인 ‘트레블링카(Treblinka)’를 겉으로 드러낸다. 홍상수는 여행자(Traveler)를 찍었고 여기에서는 이자벨 위페르가 아무런 맥락도 없이 등장하지만 결국에는 행위의 반복에서 존재 그 자체를 증명한다. 이른바, 증명된 주체가 공간의 속성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증명된 공간에서 주체의 속성이 등장한다. 


<존오인>은 일상을 다루는 방식에서 홍상수의 영화를 떠오르게 한다. 이 생각은 두 영화가 다루는 소재나 감독의 성향과 관계없이 현대영화의 한 경향성을 따른 것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어서 많은 감독이 영화를 보는 만큼은 사람들이 정주하기를 바란다. 자크 오몽의 진술을 빌리자면 현대영화의 한 경향은 영역을 전개하는 것에 있다. 영역을 전개해서 증명된 공간을 펼쳐두어야만 비로소 영화의 의미과정으로서의 주체가 대두한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아주 분명하게도 역사의 현장이었지만, 그 사실이 희생자들의 주변증언만으로 증명되었기에 유효성을 의심받았었다. 고쳐 말하자면 한 개인이나 단체의 증언이 주변 상황이나 소속된 사회에 따라 신빙성을 의심받는 일이 오늘날에는 굉장히 잦다. 그렇다면 여기서 영화는 어떤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존오인>의 특징으로 언급했던 ‘바깥’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속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 일상과 주체의식은 떼려야 뗄 수 없으며 반대로 주체는 스스로가 어떠한 ‘결정’ 상태에 있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 위자벨 위페르는 홍상수 영화에서도 여전히 위자벨 위페르고 아우슈비츠는 모든 삶에서 절멸의 장소로서만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존오인>은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들의 결정이 하나의 순간을 향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했고, 영화가 끝나는 순간은 여행자의 시선처럼 아주 조용하지만 슬기롭게 진실에 다가서고 있었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열화상 카메라를 이용한 장면일 것이다. 오늘날 디지털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에서 언급해둘 만한 것은 낮과 밤을 바꾸어 촬영하는 데이-포-나이트와 같은 카메라 기법이다. 쉽게 설명하면 콘트라스트를 반전해서 낮에 찍은 장면을 밤에 찍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이 기법은 임철민의 <야광> 같은 작품에서 일상의 한순간을 묘사하는 것에 사용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조나단 글레이저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열화상카메라에 찍힌 이미지는 그외 화면들과 정반대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소녀가 거기 있다는 사실만이 보이고 인물은 마치 반딧불처럼 빛난다”고 진술한다. 영화의 후반에 아우슈비츠의 노동자들에게 음식을 전달한 소녀가 집으로 귀환할 때, 열린 창문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영화에서 콘트라스트의 역할이 ‘어둠’이 아닌 밝음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린다. 영화가 보여주는 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밝음이라면 콘트라스트가 적용된 화면은 그녀가 일상의 밖에 나섰음을 보여준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장면들은 영화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며 그렇기에 영화의 ‘바깥’으로 작동한다. 그녀의 행동은 영화 안에서 다른 인물에 의해 감시되고 있지 않으며, 우리가 볼 수 없는 아우슈비츠의 어둠과 정확히 같은 자리에 놓인다. 여기서 조금은 더 앞으로 나아가자면 아우슈비츠 내부에 멈추는 열차가 우리에게 관측되지 않는 건, <열차의 도착>이라는 영화사 이후 우리가 더는 무언가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디디 위베르만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네 장의 사진들을 두고서 ‘반딧불의 잔존’에 빗대기도 했는데, 공교롭게도 임철민의 <야광>은 한국사회에 내재한 남성 성소수자들의 크루징 스팟을 디지털 표면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반딧불의 잔존을 연상케 한다. 직접적으로 비교될 수 없지만 이 영화에서 임철민의 의도는 디지털 앱 안에서만 존재하는 성소수자들의 장소를 보여주는 것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조나단 글레이저는 <존오인>에서 아우슈비츠를 어둠 안에서만 비로소 볼 수 있는 곳으로 묘사한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아우슈비츠의 참상에 연결된 장면은 소녀가 집을 빠져나와 노동자의 작업도구 아래 음식을 놓아두는 장면뿐이다. 요컨대 반딧불의 명멸이 어두컴컴한 밤에서만 관측된다면, 우리는 그들을 위해 극장의 어둠으로 사라져야만 하는 것일까? 누군가는 “우리는 담장 너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몰랐다”고 진술했던 아우슈비츠 동네 주민들의 진술을 두고서 ‘어둡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이들은 아우슈비츠의 ‘바깥’에서 일상을 영유하며, 그렇기에 되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벌어진 상황을 의미적으로 더 굳건히 하는 면이 있다. 가령 사물의 기억과 몸의 경험이 혼합될 때 희생자의 몸은 토굴 옆에 놓인 나무토막과 별반 다르지 않아진다. 한 개인이 느린 파괴를 거쳐 사라질 때 그곳엔 아우슈비츠라는 거대한 기억만이 갑작스럽게 등장한다. 그러니까 ‘바깥’이 있다면 그게 ‘아닌 것’은 자연스레 무언가를 지시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증명된 공간에서 우리는 ‘주체’를 확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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