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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10.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외화면에 관한 단상


영화의 매체적 성질을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하고 싶다. 영화에서 프레임의 역할은 무엇일까? 송경원 평론가는 게임과 영화의 차이점이 정보의 양에 있다고 말하면서, 게임이 프레임 안을 정보로 장악하는 반면 영화는 프레임 밖에서 침투해오려는 무언가를 상정한다고 말한다. 게임이 몰입과 체험을 위해 ‘바깥’의 정보를 제한한다면, 영화는 프레임 밖의 외화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어떻게 보면 영화는 항상 ‘바깥’에 감시당한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 그런 점에서는 구속과 감시가 영화의 의미작용을 이루는 주된 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바깥’이 없을 때 아무런 의미를 내포하지 못한다고 말이다. 가령 우리는 영화에서 ‘바깥’을 감지하지 못할 때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투명함을 지닌다고 여기게 된다. 뤼미에르의 초기 영화들이 유독 투명하게 보인다면, 그 이유는 사람들이 카메라가 무엇인지를 잘 몰랐기 때문이었음을 떠올려보자. 그곳에 프레임은 없었고, 따라서 ‘바깥’도 없었다. 사람들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았기에 반대로 카메라 또한 세계의 ‘바깥’을 제공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뤼미에르의 초기 필름은 아무런 의미작용 없이 있는 그대로 현상을 투과해간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 초기영화가 특별했던 건, 영화가 어떠한 응시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점과 관련 있다. 푸코의 말처럼 시선이 곧 권력이 된다면, 프레임에서 ‘바깥’의 역할은 내부에 권력을 부여해서 이를 ‘특권화’하는 것일 수밖에 없으므로 오늘날 영화의 ‘효과’란 감시에 따라 성립하는 권력구조의 파생물과도 같다. 이게 바로 우리가 ‘영화적’이라 표현하는 것의 정체다. 


이제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회스가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는 일련의 과정이 오늘날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모습에 병치된다. 여태껏 아우슈비츠의 내부를 보여주지 않던 영화는 이 장면에 들어서야 비로소 아우슈비츠의 내부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에야 보여줬기에 그 충격이 배가되는 감은 있지만, 의도적으로 ‘바깥’을 숨겼다는 점은 의구심이 든다. 왜냐하면 외화면의 은폐는 영화에 시선을 투과한다는 점에서 이를 있는 그대로의 사실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가령 영화에는 열화상 카메라를 통해서만 보여지는 사실관계가 있는데, 이는 마치 가시광선으로 보이는 세상은 그저 삶을 투과할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쉽게 말해 영화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고, 그럼에도 볼 수 없는 진실이 여기에 있다는 뜻처럼 보인다. 열화상 카메라에 담긴 사과가 아우슈비츠의 노동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음을 염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건 일종의 낙원추방이다. 진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영화의 바깥에 나서는 일이라는 점,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회스의 일상은 영화이고, 그런 영화를 외화면 삼아 작동하는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상투화되는 진실성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났던 일을 우리가 알 수 없기에 되려 아우슈비츠는 존재했다고 보는 관점에서, 수용소 외부의 울타리는 영화에서 프레임의 기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울타리가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이들 수용소에서의 진실을 감시권력의 일종으로 여기게 된다. 


영화에서 회스의 집은 아우슈비츠가 내다보이는 곳에 자리한다. 영화상에서도 이는 아우슈비츠 내부의 소음이 외부에서 섞여들어 오는 방식으로 묘사된다. 카메라는 안을 들여다보지 않지만, 소리는 울타리를 넘어오므로 오히려 영화가 현실로 탈출해오는 구도가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아우슈비츠를 진실하게 만드는 건 회스의 집이다. 수용소장의 특권으로 내려다보는 아우슈비츠는 역사적 사실이기보다 권력의 속성 안에서 역사를 연결하는 표면에 가깝다. 사실상 회스의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이 영화에서 ‘집’은 공간의 반복에서 하나의 정경을 형성하고, 그 정경에서 울타리 너머는 우리에게 포섭되지 않은 장소이다. 이 영화는 낙원을 찾는 일과 정확히 같은 원리로 동작하는 셈이다. 낙원에서 추방된 사람이 자신을 어떠한 ‘바깥’으로 규정하고서 내부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아우슈비츠는 우리가 돌아가야 할 무언가로 여겨진다. 이미 낙원에서 밀려났기에 되려 낙원을 목표 삼아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이른바, 아우슈비츠를 증명하는 문제의식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지의 논제였다. <존오인>에서 미심쩍은 것은 영화가 아우슈비츠를 어떠한 역사적 사실로 바라보기보다 눈을 뜨는 이상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순환논증에 빠져있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영화가 아우슈비츠를 보여주기 위해 택한 게 아우슈비츠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우리가 본 것은 그저 공리에 불과하다. 실존하는 아우슈비츠 기념관을 바깥 삼아 작동하는 영화의 내부는 감시권력이 부자유에서 자유를 이행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아우슈비츠에 대해 잘 몰랐다면 이 영화는 의미구조를 끌고 갈 수 없다. 이미 아우슈비츠라는 현실의 장소를 알고 있기에, 그 현실을 바깥 삼아 동작하는 영화의 내부 시선에 동조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니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현실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으로 장면이 전환되는 일은 어떠한 진실이 밝혀지기보다 영화가 여태껏 쌓아올린 시선의 높이를 외부로 발산해보려는 운동에너지의 역학에 불과하다. 아우슈비츠나 회스의 행적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영화에 투영되는 시선과 권력에는 분명 문제의 소지가 있다. 영화의 이런 작법은 아우슈비츠에 대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검증을 위해 사용된다는 점에서 온전하게 비판할 수만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결무고하다고 만도 볼 수 없다. 가령 송경원은 <사울의 아들>에 대한 비평에서 시선의 제한이 ‘보여주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감각의 확장’을 위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 맥락에서 그는 “액자가 그림의 요소가 될 순 있어도 액자를 먼저 짜놓고 그림을 그리는 법은 없다.”라는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존오인>은 우리의 일상과 회스의 삶을 혼합함으로써 외화면의 존재를 지우는데 이로 인해 아우슈비츠의 주변부는 아무런 특색 없이 버려지며, 반대로 그들의 일상 자체가 작중 아우슈비츠에 관한 하나의 ‘외화면’이 되어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액자’는 감각의 확장을 위해 사용된다는 점에서 아우슈비츠의 비극적 사건을 전달하는 일에 도움을 주지만, 그 감각을 느끼는 것이 과연 누구의 신체인지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자칫하면 헛된 메아리에 그치거나 혹은 낯선 빙의가 될 가능성이 공존한다.  


이따금 영화에서 우리가 느끼는 그리움의 정서는 많은 경우 영화와 삶을 갈라놓는 ‘벽’을 논하는 일로 나아가고는 하는데, <존오인>에는 그 그리움이 아우슈비츠의 의미로 대체되어 있다. 다소 과격하게 말한다면 <존오인>의 내용은 게임이 게이머를 사로잡는 방식과 유사하다. 정보를 철저히 내부로 제한하면서 감각의 체험을 극대화하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외화면의 존재를 현실에서 끌어오면서 영화에서 느꼈던 감각을 관객의 신체와 삶 전반에 분배하려 든다. 결과적으로 영화가 수행한 건 수도에 집중되었던 시설물을 지방으로 분산하는 지방분권화 정도의 역할에만 그친다. 물론 혹자는 영화가 보여주려는 게 자신의 내부 논리에 포섭되더라도,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을 더 의미 있게 받아들이도록 돕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갖는 사회학적 기능 중 하나가 아니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근친상간이거나 자가수분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아우슈비츠를 떠난 사람은 아우슈비츠에 대해 말할 수 없으므로, 오히려 관객을 내부에 남기는 방식으로 이를 증명하려 한다. 우리가 영화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이 지옥이 펼쳐진 과정도 해결책도 아닌, 외화면이 대체해버린 카메라의 입장에 ‘선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냐는 자문이다.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가 마치 증명 불가능한 논제라는 점을 전제하고서 그 사실을 반박하는 것에 주력하기에 되려 아우슈비츠 자체를 증명 불가능한 하나의 수단으로, 또한 이를 둘러싼 시선과 정치권력의 문제로 비화한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조나단 글레이저의 전작인 <언더 더 스킨>은 갑작스레 숲으로 도망치는 외계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내 얼굴 가죽을 벗겨버리고야 만다. 마치 이미지의 추상 앞에서 이를 정면으로 응수하는 듯한 이 모습에서 우리는 영화가 검은 방을 설계해 그 안에서 인간을 소화했던 일을 떠올린다. 이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이미지와 함께하면서 ‘외화면’을 삼키는 것은 음악의 몫이 될 수도 있음을 입증했다. <존오인>도 마찬가지다. 미카 레비와의 협업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외화면을 집어삼키는, 어쩌면 역사에 관한 것일 수도 있는 소화의식을 펼치는 일에 주력한다. 유대인의 뼈는 다 타지 못한 채 강물을 타고 내려오는데, 어떤 면에서 이는 수용소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간접적인 묘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미지가 소화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영화가 어떤 감각을 소화하는 건 맞지만, 그럼에도 초과하는 것은 있기 마련이라서 우리의 체험으로만 포섭되지 않는 것도 분명 존재한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네 장의 사진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면서 중요한 사진이 되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사진들은 어떠한 감시에도 속하지 않은 채 그들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아우슈비츠에 탈출하는 일이 불가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이 사진에는 ‘바깥’이란 게 없었다. 네 장의 사진은 어떠한 규칙이나 원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채 그 자신을 어둠 속의 반딧불처럼 내보였다. 이들 사진은 카메라에 의해 촬영되었지만, 마치 카메라가 없던 것처럼 투명한 세계의 표면으로 자신을 높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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