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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25. 2024

더는 좋은 꿈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

<트래쉬 험퍼스>(2009)

“영화관에서 우리들은 혼자 있지 않다.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은, 관객을 어두운 객석 속의 고립된 구경꾼으로 묘사하길 좋아하는 일각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사회적인 경험일 수 있다. 고립된 영화 관람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보다 공동체적인 영화 관람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질베르토 페레스, 『영화, 물질적 유령』 -


만약 영화가 하나의 꿈이라면,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은 꿈에 뛰어드는 일일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극장에 불이 꺼지고 나면 사람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꿈의 세계에 접어든다. 이때 요점은 영화가 하나의 합의된 행동이라는 점이다. 영화를 보러 가는 이들은 영화 속 세계가 ‘진짜’라고 여기지 않으며, 단지 자신이 꿈을 꾸기 위한 현실로서 ‘영화’를 승인한 것뿐이다. 어떤 이에게는 노래를 부르는 일이 꿈을 발산하는 일이듯, 영화는 사람들에게 개인의 이상을 현실에 ‘누설’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는 현실에 뚫린 창문과도 같고, 오즈랜드는 바로 그 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영화를 두고서 실재에 빗대는 일은 그런 점에서 ‘영화’가 왜 현실과 공존불가능한 가치인지를 말해준다. ‘깨어남’은 ‘불면증’과 같은 자리에 놓일 수 없고, ‘꿈’은 ‘죽음’과 같은 자리에 놓일 수 없다. 영화는 정확히 낮과 밤의 관계와도 같아서, 둘 중 하나에만 머무를 수도 없으며 어디까지나 ‘다음’을 위해 마련된 자리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관람은 잘 짜여진 각본과도 같다. 프로레슬링의 무투가 사실은 합을 맞춘 연기극이듯이, 영화가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이상적인 세상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 ‘조우’의 욕망이다. 두 레슬러가 합을 맞춰 [각본]을 수행할 때, 현장에는 스펙터클이 일시적으로 ‘누설’된다.


하모니 코린의 영화에서 눈여겨볼 만한 점은 별다른 각본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가령 잭 바론과의 인터뷰에서 코린은 “젊은 시절의 과도한 행위들, 즉 심야 TV 쇼의 퍼포먼스 아트, 약물, 몸싸움, 불면증 등이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코린의 이 말은 영화가 현실의 무언가를 ‘낯설게’ 보여줌으로써 다큐멘터리적인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에 목적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건 영화의 다큐멘터리성이 영화 텍스트가 아닌 관객으로 지시된다는 점이다. 코린은 인터뷰에서 “나 자신을 어디에 두면 좋을까요?”[1]라고 말하며, 이와 같은 상황은 점점 더 세분화하는 미디어 텍스처 환경에서 ‘자기’란 매체의 즉물성을 조합해서 만들어진 ‘추상게임’에 가깝게 됨을 보여준다. 오늘날 주체는 특정한 관점을 갖고서 상황을 대하기보다 다양한 상황에서 특정한 자기를 도출하는 경향이 있다. 단적으로 말해 미디어 스케이프 안에서 개인은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미래를 ‘목격’하고, 이와 같은 관찰은 자신의 현재 상황을 특수한 의미에서의 ‘예비’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일컫자면,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의 거대한 꿈속을 살아간다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그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치 영화가 만인의 연인인 것처럼, 우리가 현실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그렇게 보면 코린의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거리를 배회하면서 사물에 상호작용하는 일은 어느 정도 이해의 여지가 있다. 많은 경우 코린의 영화에서 사물은 인물의 물리적인 행위력에 반대하는 방식으로 정체감을 호소한다. 카메라가 그저 공간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기만 하면 풍경에만 소속될 게 분명한 이 사물들은 등장인물에 의해 겁탈(말 그대로 그들은 쓰레기통을 겁탈한다)당하거나 혹은 망치질을 당하기도 한다(<트래쉬 험퍼스>). 이와 같은 점은 영화에서 사물은 인물의 행위에 관해서만 존재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마치 남편이나 아내가 둘 중 더 나은 쪽에 포섭되어 OO의 아내/남편으로만 존재하듯 코린의 영화에서 인물은 사물에 작용함으로써 그들을 영화 속 세계에 불러온다. 대표적인 것은 영화의 중후반부에 묘사되는 밤 시퀀스에서 가로등과 랜턴 간의 기묘한 연결이다. 영화는 별다른 내러티브 없이 진행되지만, 그 사실이 드라마가 없다는 점까지 배제하지는 못한다. 영화는 소화전을 향하던 불빛이 가로등에 내걸리거나, 인물의 얼굴을 향해 쏘아붙여지고 또한 건물 내부의 샤워 부스 안에 걸쳐지거나 하는 일을 보여주면서 서사를 뜨개질한다. 다소 엉성하고, 추락하는 의미를 막아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이곳에 ‘약한 연결’이 존재한다는 점만큼은 확고히 언급한다. 


코린의 <트래쉬 험퍼스>에서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인형이 어느 순간 살아있는 생명으로 뒤바뀌거나 하는 일이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서구권에서 특히 금기시되는 게 아동 관련 묘사라는 걸 떠올리면, 생명이 아니라 인형에 가해지는 폭력은 많은 이에 불쾌함을 불러올 공산이 크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초반에 폐건물에서 행해지던 반달리즘의 묘사가 가정 내에서의 살해 행위로 이어짐에 따라, 한 사물이나 도구가 공유하는 의미 맥락을 따라 인물의 다음 행동을 추론하게 한다. 여기서 인물은 도구를 이용하기보다 그런 도구가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기 위해 인물을 이용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내 코린은 아기 인형이 아니라 실제 아기를 등장시키면서 관객의 우려를 불식시킨다. 아마도 중장년이거나 노년에 해당할 여인은 아이를 작품에 등장하는 그 어떤 폭력행위와도 연결짓지 않으며, 단지 평범하게만 행동할 뿐이다. 생각해보면 코린의 <구모>에서도 모성애는 사물 세계에서 유일하게 타인에 ‘의지’하지 않았었다. 욕조에 앉아 아이를 대접하는 이 장면은 후면 벽에 걸린 베이컨 조각만큼이나 아무런 맥락 없이, 있는 그대로 긍정되기에 오히려 영화 안에서 더 강조되는 듯한 면이 있다.  그러니까 이를 따라 우리가 영화에 해볼 만한 질문은 영화에서 사물은 지향이 아니라 반향이라는 점이 아닐까 한다. 


판데믹 시기를 거치며 변화한 나의 생각은 영화 관람이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행동이라는 점이다. 많은 경우 시네필은 영화를 사적으로 소유하거나 경험하러 들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항상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욕구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무언가에 관해 말하는 일은 항상 좌절되기 마련이어서, 대개는 어떠한 지시사항에 의해 자기를 특정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쉽게 말해 자신의 언어로 무언가를 풀어내는 게 아니라, 특정한 언어로만 자기를 대하게 되는 모습을 발견하는 때가 있다. 판데믹 시기에 우리가 어떠한 행동에서 서로를 향한 유대감을 발견했던 것은, 영화를 관람하면서 자신을 세상에서 ‘분리’해놓고 싶은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현실 세계가 흘러가는 쪽이라면 영화 속에서는 자신을 머물게 하고, 그에 자신을 도출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곳은 남겨지거나 버려진 게 아닌 현실의 반(反)작용으로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코린의 영화에서 사물이 덩그러니 놓여있다고 느끼는 게 인물의 상호작용 덕분이듯, 한 세계가 태어나려면 다른 세계가 파괴되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코린의 영화에서 느끼는 당혹감은 많은 경우 우리가 세상을 비집기 위해 존재하는 감정이다. 이제는 판데믹 시기가 어땠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코린의 영화는 결국 우리의 세상이 작은 입자들로 메워진 거대한 스크린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코린은 위의 인터뷰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영화를 볼 때 기억에 남는 건 거의 한두 장면이에요. 그렇다면 전부 그런 장면으로 구성된 영화를 만들 수는 없을까?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을 커피 테이블이나 저녁 식탁에서 대화하는 사람들과 낭비해야 할까.” 이 말은 어쩌면 이렇게도 들린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억에 남는 건 몇몇 장면뿐이에요. 그렇다면 영화(榮華)란 결국 길게 연장된 순간에 불과한 건 아닌지. 결국 연결을 위해 존재하는 시간은 낭비에 불과한 건 아닐까.” 깊게 놓인 한두 장면에 오래도록 삼켜진 잔향은 어떤 면에서 이음새가 없기 때문에 터널의 끝을 알 수 없는 상황과도 같다. 터널에 대고 고함을 치면 메아리치는 현실을 우리는 ‘깨지 않는 꿈’이라 부른다. 그러나 카벨이 영화를 두고서 “과거의 세계”라고 말했던 것처럼, 코린은 우리에게 몇몇 과거의 순간이 아니라 그저 과거의 세계 전부가 소중했을 뿐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관해 진술했던 대로 역사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아니라 어떠한 판단이나 특성이 개입할 때 유독 빛난다. 반딧불의 명멸이 보여주는 건 깨어남과 잠듦의 반복이 눈에 비치는 세계로의 입구를 두들긴다는 점이다. 세계는 연결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며, 오히려 어떠한 순간을 드러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 코린의 영화는 그런 점에서 더는 좋은 꿈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을 말해준다. 




[1] 잭 바론, “하모니 코린이 말하는 영화의 미래”, 전희란 역, 지큐코리아, 웹사이트, 2023.11.18. 

https://www.gqkorea.co.kr/2023/11/18/%ED%95%98%EB%AA%A8%EB%8B%88-%EC%BD%94%EB%A6%B0%EC%9D%B4-%EB%A7%90%ED%95%98%EB%8A%94-%EC%98%81%ED%99%94%EC%9D%98-%EB%AF%B8%EB%9E%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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