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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01. 2024

허구의 반대말이 현실이라는 착시


허구의 사실이 역사가 되는 건 가능할까. 송경원은 <노 베어스>에 대해 쓴 에서 “허구의 반대말이 현실이라는 착시”를 언급하면서 영화에서 외화면의 기능은 허구의 영화에 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영화에서 프레임은 무언가에 반(反)대하는 게 아니라 대비(非)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따르자면 영화를 보여주는 작은 격벽은 영화를 우리 현실에서 떨어트려 놓는 게 아니라, 영화와 영화가 아닌 것을 구분 짓는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 허구의 의미가 그렇다. 영화의 바깥에는 허구가 아닌 것이 자리할 뿐이다. 사실상 모두가 각자의 현실을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영화’는 오히려 우리가 모일 수 있는 하나의 장소를 제공한다고도 여겨진다. 이를테면 멀티버스를 다룬 영화들에서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영웅이 한곳에 모여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묘사되곤 한다. 이는 UN 설립 이후의 현대 사회가 ‘공공의 적’을 마주하는 일에 ‘익숙’하다는 점을 연상케 하며, 바꾸어 보면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당사자들을 한곳에 모을만한 게 그리 쉬운 ‘사건’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영화는 모두를 위한 현실이 되어줄 수 있다. 각자의 현실 ‘바깥’에 자리한 이 공간은 누구의 현실이 아니면서도 동시에 모두의 현실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프레임의 역할은 우리의 현실을 공격하거나 밀어내는 게 아니라, 지켜내야 할 것과 안아주고 싶은 것을 구분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의무는 ‘보존’이다. 


무언가를 지키는 일은 무언가에 반기를 드는 게 아니다. 송상호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대한 에서 “영화가 스스로 구축해낸 세계를 스크린 내부에 가둬버린다”고 비판하면서 “외화면의 아우슈비츠를 끝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유지”한다고 덧붙인다. 이 의견을 따른다면 영화는 회스의 악행을 화면에 기록하여 보존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아우슈비츠의 참상도 가둬버린 것으로 보인다. 아우슈비츠 전체가 영화 속의 일로만 여겨지고, 우리가 아는 현실과는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기에 <존오인>은 실패작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관객이 무언가를 생각할 만한 거리를 두지 않은 이 영화는 우리의 세계가 치킨게임에 빠져있다고 착각하게 한다. <존오인>은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않으며, '영화 안에서 ‘홀로코스트’라는 키워드를 분리해내는 일은 어디까지나 허구에 불과하다. 가령 원본은 자체로 단일하기에 더는 재현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허구’는 원본이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영화는 어떠한 현실을 보여주기는 해도 정작 ‘원본’이 아니기에 ‘허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 따르자면 영화의 마지막에 루돌프 회스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현실의 홀로코스트 전시관을 병치하는 일은 회스가 그와 같은 허구의 사실에 증오심을 내비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사실이 허구라면, 이곳에서 허구란 ‘비재현’으로서 우리가 원본에 부여하는 의미작용과 어느 정도 상관관계를 갖는다. 


재현되지 않은 것과 원본이 아닌 것을 같은 자리에 두는 일이 역겹다고 회스는 말한다. 이는 영화를 비판하는 쪽과 옹호하는 쪽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이다. 다만 이와 같은 회스의 태도는 이전까지 회스가 영화의 내부에 자리하던 일과 상반되기에 다소 인위적인 작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이야기에 속해 아우슈비츠의 내부를 넘나들던 그는 영화에서 관객이 보지 못한 것들을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자체적으로 막을 형성해 이를 갈라놓았고, 여기서 영화는 외부적인 개입이 이루어졌음을 간접적으로 알린다. 현실에서 아우슈비츠의 내부 상황에 대한 기록이 전무후무하다는 사실(네 장의 사진을 제외한다면)이 이 설정에 개입하면서 회스는 우리가 아는 역사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쉽게 말해 이 영화에서 회스는 논픽션의 인물이지만 그가 수행하는 것은 픽션의 역할이다. 아마도 영화는 논픽션의 인물이 픽션의 지위에 부임할 때 벌어지는 역전을 위치에너지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회스가 바라보는 전시관은 “허구의 반대말이 현실”이라는 입장을 따라간다. 그러나 영화는 안과 밖 사이에 중간점을 설정하지 않기에 오히려 치킨게임에 빠진다. 허구의 반대말이 현실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영화의 반대편에 자리한 이 전시관은 현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영화는 어떤 의미일까?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작성된 소설이 있고, 그 소설을 각색해 만들어진 영화가 있다. 허구에 대한 허구가 중첩되면 현실이라도 되는 걸까.


분명 영화는 수식이 아니다. 음수에 음수를 곱하면 양수가 된다는 말은 허구와 현실의 관계에서 적용되지 않는다. 어쩌면 <존오인>은 회스와 전시관 모두를 허구로 설정하면서, 이 둘을 한 자리에 두는 일을 ‘곱셈’으로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허구의 반대말은 현실이 아니지만 허구가 한 자리에 놓이면 그건 현실일 수 있다고 말이다. 혹은 우노 츠네히로의 표현을 빌린다면, “허구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현실을 그리는 것”을 두고서 ‘아우슈비츠의 명제’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우슈비츠는 재현불가능성이라는 난제를 품에 안고 있어서 이에 접근하는 일은 모두 허구를 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능하는 반현실은, 현실의 일부를 허구화하는 것으로 확장되는, 말하자면 ‘확장현실’적인 허구다.” 송상호가 “가상의 세계를 축조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고 지적하는 대목은 현실 안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허구인 아우슈비츠가 우리의 현실을 ‘확장’하는 일에 사용되는 일을 비판한다. 허구의 반대말이 현실이 아니라면, 현실의 반대말도 허구가 아니며 이는 즉 아우슈비츠를 허구로 지칭하는 일은 우리의 현실 인식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아우슈비츠가 허구인 것은 그게 ‘가짜’라거나 ‘거짓’이어서가 아니다. 우리 현실에는 ‘허구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현실이란 게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에게 아우슈비츠는 이해할 수 없이 남겨져 버린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허구로 지정되어야만 했다. 


물론, 이 허구는 현실의 바깥에 자리한다는 뜻에서의 허구이므로 아우슈비츠 자체에 어떠한 판단을 진행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는 우리가 객관적인 현실로 돌아오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이미 하나의 영화가 되었다. 우리가 무언가를 논하고 탐구하는 가능현실이 확장되려면 개중에 일부는 필수적으로 허구가 되어야만 한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의 기능이란 게 그렇다. 영화에서 외화면의 기능이 현실에 반하지 않는다면, 영화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현실이란 게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외화면은 우리가 서로를 구분 짓기 위해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가령 자크 랑시에르는 란츠만의 <쇼아>를 두고서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재현될 수 있다면, 그것은 행위를 통해서,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새로 지어낸 허구를 통해서다.”라고 말한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행위는 영화에서 프레임 역할과도 같다. 프레이밍은 카메라가 현실을 두고서 ‘허구’로 지칭하게 하는 것을 허용하므로 그 자체로 새로 지어낸 허구를 통해서 아무런 흔적 없는 ‘바깥’을 재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한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일에 물질대사가 차단되면 사실을 증명할 수단이 사라진다. 우리가 가져올 수 있는 건 시각정보 말고는 없어지며, 여기서 시각정보 이외의 사실은 모두 허구가 되고야 만다. 이를 따라 우리는 회스가 안에서 일어난 일들에 관해 진술할 때 그게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허구인지를 분간하지 못한다. 


폴 리쾨르는 “허구의 시간은 체험된 시간, 즉 기억과 행동의 시간과 결코 완전히 단절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존오인>에서 아우슈비츠는 영화의 질료로 생성된 허구이기에 그 자체로 ‘바깥’을 재현하며, 이는 영화의 프레임이라는 물질적 질료를 통한다. 마치 영화가 허구와 허구가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해당 장면에서 의구심을 보낼 수 있는 건 영화가 자체적으로 내부에 격벽을 세울 때 허구와 허구의 결합에 제로가 첨가됨으로써 영화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원점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는 영화가 결국 아우슈비츠에 관한 그 어떤 것도 보여줄 수 없다는 입장을 메타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재현의 불가능성이라는 사건의 성질을 충실히 표명한 것이다. 다만 영화가 자신의 내부에 격벽을 세울 때는 영화를 둘러싼 물질대사가 전체가 아니라 외화면 내부에만 한정되기에 되려 현실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서는 회스 또한 “원본은 재현될 수 없다”는 명제에 포섭돼있고 이를 따라 회스는 자신이 실제 역사라고 제안하는 마지막 시퀀스에 환멸을 보냈을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 회스는 다큐멘터리적인 성정을 연기하기를 포기하고 프레임 밖으로 나서고야 만다. 그 마당을 나옴으로써 자유를 얻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이야기를 더는 진행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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