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풀과 울버린>(2024)
"예술 자체의 종말이 아니라 아름다운 형식으로서 예술의 종말
(...)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농담을 건네자면 얼마 전 한국에서 흥행했던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이 대사의 연장선으로 <데드풀과 울버린>을 보면 이야기는 이렇게 보인다. 영화는 데드풀이 <로건>의 세계관으로 넘어가 영웅의 무덤을 파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영화로서 <로건>이 디즈니의 폭스 인수 이전에 거의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세계임을 감안하면, 이 영화는 두 가지 면에서 ‘최후’를 상징한다. 첫 번째는 디즈니에 넘어가기 전 마지막 세계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지난 수십 년을 이끌어온 엑스맨 세계의 종국이라는 점이 그렇다. <로건>은 더는 엑스맨의 유전자가 설 수 없다고 선언했던 영화라는 점에서, 그리고 <데이즈 오브 퓨쳐 패스트>에서 소생했던 세계가 다시 죽어감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히어로 영화의 다양성을 돌아보게 했다. <아이언맨> 이후 마블 영화가 성공적으로 재기했고 이후 2019년에 <엔드게임>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성공적인 ‘세계’를 이루었다면, 이들 성공의 바깥에는 ‘마블은 곧 히어로 영화’라는 공식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로건>에서 등장하는 유전자 변형 식품과 엑스맨의 상관관계란 “우리가 섭취하는 매스 미디어 상품이 유전적으로 편향되었고, 이는 심지어 기술적으로 진보하거나 약진했다고 여겨지는 작품군의 가치와 상충한다”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례에서 폭스사는 말 그대로의 ‘여우’였고, 이들은 한때 즐거웠던 세계가 끝났음을 스스로 선언해야만 했다. 그렇게 여우이자 범이었던 것은 유전적 쇠락을 통해 자신의 삶을 끝내야만 했다. 아마도 유전적인 근절 작업은 현생 인류에 작게나마 녹아든 네안네르탈인의 유전처럼 한 시대의 유산으로 남을 것만 같다.
하지만 한 작품을 유전적 계보로 파악하는 일은 작품의 근간이나 조상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일에 의미 있을지는 몰라도, 정작 그 세계가 정말로 효용이 있다거나 의미 있는 삶을 산다거나 하는 일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한 영화에 대한 인식이나 파악이 주어진 관찰 틀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영화의 세계는 범람하고야 만다. 넘쳐흐르는 정보의 홍수를 견디지 못하고, 내부에 있는 것조차 지켜내지 못한 채 양분을 유실하고야 만다. <데드풀과 울버린>에 관해서는 그렇게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주기적인 범람에서 양분의 삼투와 재귀를 이루어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긍정점이 있기도 하다. 한 영화가 개인의 삶에서 다른 추억에 주고받는 영향처럼, 한 영화는 다른 영화와의 관계에서 자기를 정립하기도 한다. 이 경우, ‘자기’는 어떠한 것을 내포하는 입체이기보다 사방에서 들어오는 빛들을 공공연하게 반사하는 아카이브 프리즘에 더 가깝다. 다소 직설적으로 말하면 <데드풀과 울버린>은 아무런 내용도 담고 있지 않다. 세계관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징검다리 교두보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반쪽짜리 진단이다. 통로의 정의를 플랫폼으로 본다면 이 장소는 양쪽 장소를 이어준다는 점에서 둘 중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못한 공간이다. <데드풀과 울버린>은 마치 백룸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공간이 쭉 나열돼있고, 이상현상을 발견하면 이를 ‘차이’로 내재화해 이야기를 ‘앞으로’ 진행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라고 알려진 진행방식보다 화면 밖에 상정된 시청자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인터넷 방송에 더 가까운 진행방식이다.
영화에서 이야기란 무엇일까? 매체론으로 방향을 틀 생각은 없지만 최근 영화의 몇몇 사례에는 그런 화두가 담겨있다. 가령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 자체만으로는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지 않으며, 영화의 결말은 이야기 내에서 공개되지 않은 외부를 의도적으로 삽입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영화와는 반대의 양상을 띤다. 한 영화가 내포해야 할 입체가 우리 세계가 담긴 ‘바깥’이 되어버릴 때 영화는 수천 세계를 담는 아카이브 프리즘이 되고 만다. 이른바 모두의 아우슈비츠는, 아우슈비츠의 모두를 가리킨다고 말이다. 이 관점의 연장선에서 <데드풀과 울버린>에 등장하는 데드풀 군단은 기호적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공유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영화에 등장하는 모두를 가리킨다. 그냥 같은 이미지를 쭉 나열해보았을 때, 독자의 즐거움은 이들 변종 간에 존재하는 세세한 차이를 지적하는 것이며 ‘이야기’는 그러한 차이를 하나의 거대 세계관에 빗대어 비교하는 과정에서 생성된다. 이때 이야기는 작품 밖에 상정되는 독자와 이들 사이의 대화에서 비롯되며 이는 곧 팬덤 문화의 의미와 맥을 같이 한다. 예를 들어 마크 더핏은 한 문화 안에서 사건에 대한 실제 기억을 안고 있는 사람은 소수지만, 팬덤 안에서는 그와 같은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문화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상상된 기억’을 허위이기보다 열정을 접합하는 요인으로 사유하자고 제안한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는 소수지만, 우리가 이와 같은 팬덤의 지지자로서 아우슈비츠를 허위로 의식하지 않는 것은 전쟁을 통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이 전쟁을 통해 표출되었을 뿐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데드풀과 울버린>은 한 편의 영화이기보다 팬덤 문화에 더 가깝다. 영화는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액션이나 폭력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액션이나 폭력이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다. 분명 이 점은 작품에 대한 이해와 평가를 가르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영화는 TVA에 섭외된 데드풀이 이를 거부하고 분쟁을 겪다가, <로건>의 울버린을 파묘하던 중에 게임에서 제외된 공간인 보이드로 쫓겨나는 줄거리로 진행된다. 여기서는 숱한 *오와콘(주: 이미 끝장난 콘텐츠)이 등장하고 이를 마주하는 방식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에 대한 예우나 참회가 아닌 농락과 조소, 혹은 희열에 가깝다. 데드풀 군단과의 싸움이 피터의 등장으로 흐지부지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혹은 데드풀 프라임 스스로가 “너희들, 이런 거 보러온 거 아냐?”라고 말을 건네는 일처럼 영화의 진행은 시시콜콜한 수다와 애드리브의 표면을 따라간다. 이 점에서 영화는 지켜볼 만한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가령 보이드는 오와콘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비된 곳이기도 하다. 엑스맨 유니버스의 갬빗(레미 르보)은 단독영화가 기획단에서 엎어진 바 있으며 이와 같은 점은 작품 안에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곳에 있었어”라는 대사로 언급된다. 현실에서는 다시 만들어질 가능성 같은 건 아마 없겠지만, 적어도 작품 안에서만큼은 ‘시작될 가능성’이란 게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과거와 미래를 막론하고 대상을 ‘시작’하게 하는 것은 매체가 갖는 연결의 긍정적 기능이다. 김경수의 표현을 빌린다면, 드립은 서스펜스를 비논리적으로 해소하는 것과는 반대로 침묵의 틈새를 노리며 이는 침묵에 찌든 오와콘이 어떻게 자신을 드리핑(dripping)하는지를 보여준다.
드립은 원두에서 무언가를 짜내는 행위다. 마찬가지로 <데드풀과 울버린>은 여러 소재들로 드립을 치고, 숱한 오와콘을 짜내서 이를 콘텐츠화한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은 티키타카라는 드리볼의 한 전략처럼 보이며, 포함된 것과 관계없이 이야기는 항상 진행된다. 그도 그럴 게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다시 시작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팬덤에 헌사하는 작품들에서 이야기나 전개 등이 그리 신경 쓰지 않을 만한 요인임을 뜻하지 않는다.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으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고, 대화가 없다면 이야기를 담을 공간도 없다. 한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이 공간이라면 최대한 대화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이를 의미로 엮는 게 더 중요하다. 흥미로운 점은 <데드풀과 울버린>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는 서로 교집합 없이 소속된 공간만으로 이야기를 꾸려간다는 점이다. 이야기에서 공간이 출발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공간에서 이야기가 출발한다는 건데 이와 같은 플롯은 대개 배틀로얄처럼 이야기의 정합성보다 대화의 표면을 따라가는 경향이 더 짙다. 그리고 <데드풀과 울버린>이 보여주고 싶었던 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구한다거나 트라우마 치유 모임을 만든다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 그냥 여태까지 있었던 폭스사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뿐이다. “우리들,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라고 감정을 호소하기보다 말없이 안아주는 것을 택하는 것. 영화의 마지막에 데드풀은 친구들과 파티를 한다. 여기에는 캐릭터의 조합이나 사건의 당위성 그 이상도 이하도 필요하지 않다. 모두가 함께하는 것은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고 사연은 적어도 여러 사건으로 수천 세계에 반사될 테니 말이다.
어떤 작품을 볼 때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전제하는 것과 이야기의 전개를 먼저 꾸리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외피와 내피를 뒤집는 것만으로도 ‘바깥’을 바라보는 입장은 달라진다. <최애의 아이> 시즌 2의 도입부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참고가 될 수 있을까 싶다. 한 만화가는 자신이 창작한 캐릭터라면 연극에서도 이렇게는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연극무대가 활용하는 무대장치를 보고 난 뒤 그녀는 입장을 바꾼다. 과장되어 보이는 대사나 부담스러운 길이의 대화는 무대장치를 따라 후광효과를 받으며, 이를 따라 ‘무대’는 원작을 그대로 옮겨둔 곳이 아니라 한 캐릭터의 소속일 뿐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이 점에서 떠올릴 수 있는 영화의 특징은 스타 시스템이다. 과거에 스타는 스튜디오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다른 영화를 마치 하나의 평행우주처럼 활용했다. 어떤 영화에서 등장하는 자신과 다른 영화에서 등장하는 자신은 본질에서 하나라고 말이다. 배우가 캐릭터에 앞선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사례에서 배우는 곧 ‘스타’라는 캐릭터의 상위존재였다. 여기서 영화의 기능은 인물이 아니라 영화 자체에서 이야기가 파생되도록 자신을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과거에는 배우가 이야기를 담는 공간이었다면, 이 기능이 영화에 이양됨으로써 이제 배우는 자기 자신을 이야기의 시작점으로 삼을 수 있게 됐다. <데드풀과 울버린>은 한 편의 영화이기보다 팬덤의 공간화에 더 가깝지만, 무량히 펼쳐진 공간들에서는 그 어떤 존재도 쉬이 틈입되기 마련이다. 그게 바로 자신을 속이는 거짓이라 할지라도, 허구에 삼켜진 시뮬라크라라 할지라도, 가공의 위력을 가진 매체폭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