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의 ‘열림’과 ‘외부’
"나는 영화와 비극이 서로 화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넓은 외부 현실을 향한 원심력이어야 한다."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1.
웹툰에 대한 언급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다. 이종범 작가의 웹툰 <닥터 프로스트> 4부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혐오범죄를 수사하는 심리학자 윤성아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범죄인의 심리에 동화되려 하자, 그의 스승인 프로스트 박사는 다음처럼 말한다. “나도 오래전에 그 터널 안에 있었어. 하지만 터널의 끝에는 빛이 있어. 우리는 터널에 갇힌 게 아니야.” 대사의 세부사항이 틀릴 수는 있지만 이 대사가 의미하는 것은 각별해서 유독 기억에 남는다. 혐오를 맞닥뜨린 이는 방 안에 틀어박히지만, 정작 도피해온 방 안에는 혐오가 따라오므로 혐오와 함께 갇히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자기혐오라 부른다. 하마구치의 <드라이브 마이 카>(2021)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영화의 초반에 가후쿠가 부인의 바람을 목격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출장을 떠나기 전에 잠시 집으로 돌아온 가후쿠는 문 안에서 들리는 낯선 소음을 목격한다. 카메라가 비스듬히 열린 문 안을 목격하는 가운데, 가후쿠는 문을 열기를 망설인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는 그대로 돌아 나오는데 이후 아내가 죽어버리기 때문에 이때의 만남이 영화상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하는 마지막이다. 어쩌면 가후쿠는 이때 문을 열고 나와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이 장면에서 가후쿠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진입하기를 포기한 것이기보다, 스스로를 자신의 어떤 내면으로 추방한 듯 보인다. 상대방에 혐오 감정을 투사하기보다 자신에게로 돌려버린 사내는 그런 혐오와 함께 무대에 갇히고야 만다.
자동차에 탑승해 예정된 호텔에 가고, 노트북 화면 너머의 부인과 통화하는 장면에서는 잠시나마 검은 화면 너머로 가후쿠의 얼굴이 비친다. 일종의 검은 화면이라는 점에서 스크린처럼 보이기도 한 이 모습은, 문을 열기를 망설이다 무대의 안쪽으로 감금된 가후쿠의 이후를 예견한다. 영화 내내 가후쿠는 터널 안에 있었다.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판데믹 시기처럼 가후쿠는 끝나지 않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보다 문밖에 서 있기를 택한 가후쿠의 모습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모든 게 끝나버린다는 점에서 어떠한 종말을 마주하는 것과도 같았다. 연극으로 치면 무대에서 내려오는 일이었고, 영화로 치면 상영이 끝나 검은 화면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아마 가후쿠는 어떠한 형태로든 ‘끝’을 마주하는 일이 두려웠을 것이다. 어떤 관객에게는 영화가 현실을 잊는 진통제로 작용하듯이, 가후쿠에게 무대는 현실로 풀려나지 않을 방법이자 수단이었을 테다. 그러나 언젠가는 나섰어야 할 이 문은 아내가 그대로 죽어버림으로써 ‘열림’의 기회를 잃고야 만다. 이제 가후쿠는 검은 방/무대/터널에 갇혀버렸고 추방을 함께했던 혐오와 함께 해야만 한다. 생각해보건대 <드라이브 마이 카>의 흥미로운 구석은 판데믹 상황의 여러 여건이 가후쿠의 상황과 맞물린다는 점이었다. 판데믹은 언젠가는 끝날 일이었지만 당시로써는 ‘언제’ 끝날지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시에 판데믹은 ‘감금’이 표면화되었던 시기로서 모두가 어딘가에 갇혀야만 했던 시기였다.
모두가 원치 않았던 이 피치 못할 사정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후쿠가 터트리는 눈물의 이유를 여실히 드러낸다. 영화가 끝나지 않는다는 건 극장을 나설 수 없다는 것, 가후쿠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대에서 내려올 수 없다는 뜻이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처럼 이 모든 일이 끝날 때만을 기다려야만 한다는 뜻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나의 영화론」[1]에서 “영화관이란 장소가 언제나 던지는 질문이란, ‘이 세계 안에서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라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기요시의 이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은유와는 달리 ‘스크린-객석’이 아니라 ‘영화관-세계’라는 관계를 가져감으로써 의미의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영화를 보러 가는 행위에서 자기를 발견한다는 이 제안에서는 영화관이라는 장소에서의 감금 행위가 자기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판데믹 시기에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방 안에서 창문을 내다보는 일을 ‘기차’에 탑승한 일에 빗대면서, 안팎의 속도 차가 마치 영화를 흘려보내는 자신의 영화관을 연상케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밖으로 나설 수 없다는 점에서 이를 ‘무대’에서 내려올 수 없는 가후쿠의 처지에 빗댄다면, 가후쿠에게 무대는 좋든 싫든 간에 자기를 돌아보는 계기였을 것이다. 결국 <드라이브 마이 카>에 관해서는 ‘이후’나 ‘바깥’처럼 외부성과 연계된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자기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항상 외부가 필요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비스듬히 열린 문 사이에 선 가후쿠는 안에 놓인 거울에서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다. 거울에 보이는 아내의 불륜은 가후쿠가 문밖에서도 내부를 엿보게 해주었는데, 기요시의 방식을 빌리자면 이 거울은 가후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해준 셈이다. 스크린/거울이라는 장소는 “이 무대 안에서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를 그에게 질문했다. 바꾸어 말해, 이와 같은 감금의 형식은 검은 방의 형태이기보다 문 앞에 서서 두드리기를 망설이는 상태에 더 가깝다. 어떠한 형태로든 외부가 기다리는 상황에서는 자기의 현황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는 게 이 이야기의 교훈이다. 예를 들어 유운성은 「문학과 위생: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글에서 히로시마의 원폭돔을 외부와 연결하면서, 이것이 영화의 내부와는 위생학적으로 분리되었다고 말한다. 인서트 쇼트라는 표현 그대로 삽입된 이 장면은, 그 표현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접촉도 없다는 점에서 특이한 인상을 준다. 왜 원폭돔은 외부를 가리키는 표지가 되었을까? 폭발의 여파로 외장이 날아가 버린 이 돔 형태의 구조물에 남겨진 건 오직 철골뿐이다. 사람으로 치면 갈비뼈의 흉추가 고스란히 드러난 이 표지에서는 모든 외부가 안으로 투과되고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 철골 구조는 외부를 가로질러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안으로 무언가를 담지 못한다면, 반대로 외부에 무언가를 등질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인서트 쇼트는 영화 안에 섞여들지 못하고 위생학적으로 분리되고야 만다. 또한 위생학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므로 영화에서 배제되고야 마는데, 이 점에서 ‘외부성’을 담지하는 표지가 된다. 이후 2년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괴물>(2023)을 만들었다. <드라이브>가 판데믹이 한창인 시기에 제작되었다면 <괴물>은 이보다는 끝을 향할 무렵이었다. 흥미롭게도 <괴물> 또한 히로시마의 원폭돔을 상기시키는 형태의 놀이구조물이 등장한다. 정글짐의 상층에 놓인 이 관측형 구조물에서 두 아이가 올라서는 장면은, 마치 새장 속에 갇힌 듯 보인다는 점에서 두 사람만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내내 겨눠지던 의미작용에서 서로를 배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순간은 <드라이브>에서의 원폭돔과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괴물>의 1-2-3부 전반에서 병균이나 세균처럼 다뤄지는 요리(히이라기 히나타)와 그에 어울리는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의 모습에 ‘위생학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일은, 이 쇼트를 두 사람만의 장소로 만든다. 물론 이 구조물은 거진 철창에 가깝다는 점에서 어떠한 장소로 바라보아지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안에서 외부와 곧장 연결되었다는 점에서는 어떠한 ‘열림’으로 이해되기에 충분하다.
2.
영화를 두고서 작품이 제작되던 시기나 환경 등을 언급하는 일은, 엄밀히 말해 내용과는 무관한 처사이므로 비평에서는 지양되어야 한다. 하지만 판데믹 시기에 제작된 이 영화가 위생학에서 ‘열림’의 특수를 획득한다면 아무쪼록 흥미로운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괴물>은 1부와 2부의 이야기를 합해 3부에서 뒤집는 방식을 택하는데, 이런 전개 방식에서는 전반에서 뒤집어쓴 오명을 후반에서 벗게 되므로, 관객으로써는 “누가 괴물인지를 찾는 우리가 바로 괴물이었다”는 식의 자기혐오를 하게 된다. 매 부를 같은 장면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에서 시공간이 세 차례에 걸쳐 중첩된다면, 이 과정에서 작품은 마치 오손 웰즈의 <상하이에서 온 여인>처럼 온갖 거울에 둘러싸인 상태가 되고야 만다. 작중에서 괴물을 찾아 헤매던 관객이 놀이공원의 술래잡기 미궁으로 들어왔을 때, 관객은 사방에 몰린 자신을 마주하면서 끝내 외부가 상실되었음을 눈치채고야 마는 것이다. 영화가 내비치던 혐오의 표현은, 점점 더 무대의 안쪽으로 들어가 관객을 감금한다. 그러나 <괴물>의 핵심은 1-2-3부의 형식에서 위의 인서트 쇼트가 3부에서 제시된다는 점에 있다. 전반부에서 이야기의 중심을 향해가는 여정은 3부에 이르러 결말을 마주하는데, 끝자락에 가서 외부를 마주해야 하는 이 상황은 “자기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외부가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영화는 작품 안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밀이 위생적으로 내부와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점은 뒤늦게야 밝혀진다. 두 사람만의 해방구가 되어주는 철창은 이것이 새장으로 기능할 때야 비로소 울타리가 되어준다. 앙상한 철골 형태의 구조물 뒤로 보이는 하늘은, 두 사람의 관계가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무엇이기보다 우리 인식의 ‘바깥’임을 보여준다. 즉 영화는 그러한 내부가 사실은 사유의 ‘바깥’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보여주며, 이와 같은 전시는 ‘괴물’의 인장을 갖고서 작업하던 관객의 사유작업을 외부로 돌린다. 영화의 안에 소속되었다고 여겼던 관객은 이제 자신이 완전한 외부자임을 자각하면서 이들 사이에 개입하기를 포기해버린다. 그리고 혐오의 앞에 서서 자신을 외부자로 남기는 일은, 어떤 면에서 문을 두드리기를 망설이던 가후쿠를 떠올리게 한다. 문을 열고 들어온 가후쿠가 비스듬히 열린 사이로 외부를 발견했을 때, 그는 여태까지 유지해왔던 관계가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잃은 후로 끝나버린 삶이라면, 있는 그대로 미래를 놓아버리는 게 두 사람 모두에게 나은 결론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문을 열지 않은 대가로 그는 무대에 갇히고야 말며, 이러한 상황은 영화가 삶을 끝낼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동안 가후쿠는 혐오의 외부자로서 자신의 감정에 주인공이 되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그런 점에서는 판데믹과 이들 영화 간에 존재하는 연결고리가 ‘감금’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관 안에서 관객은 어떤 존재인지”를 자문하는 일은 감금의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가 어떤 형태의 외부를 기대하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언젠가는 도래할 것이지만 당장은 아닌 이 형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것들, 나이를 먹으면서 수행해야 하는 사회적 단계와 삶의 책임들에 관한 하나의 문제의식과도 같다. 가령 오즈의 영화 중에는 이런 장면이 존재한다. “이제 네 삶이야. 새 시작인 거야.” 오즈의 다다미 쇼트가 구도의 반복에서 공간의 내부를 설계한다면, 영화의 마지막에 시부모나 부모가 전하는 대사는 그와 같은 감금에서 인물을 해방하는 효과가 있다. 오즈의 영화는 반복에서 공간을 설계하고, 이와 같은 감금이 다시금 해방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가후쿠의 처지를 연상케 한다. 가후쿠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기를 망설이는 일은,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새 삶이 펼쳐지게 될 것을 직감하는 일과도 같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라면 오즈의 영화에서는 그런 예외가 마지막에 펼쳐지지만 하마구치의 영화에서는 이야기의 시작에 선다는 점이다. 즉 오즈의 영화가 어떠한 바깥으로 풀려난다면 하마구치의 영화는 어딘가에 감금되고 있어서, 아무쪼록 관객으로서는 바깥을 의식하게 된다. 영화가 가두어놓은 것은 단순한 감금이기 전에 유예에 불과하므로, 이런 시기조차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걸 그들은 잘 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즈의 영화에서 흐린 날이 드물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배경에서의 이러한 묘사는 화면 내부의 이야기를 외부로 열어두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오즈의 세계가 변함이 없고 의미가 계류한다는 점에서 공간의 정경이라 할 만한 것을 만들어둔다면, 배경으로 침투하는 ‘외부’는 이들의 모습이 일종의 디제시스라는 점을 암시한다고 말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드라이브>의 무대는 감금된 상황이기보다 어떠한 변화에 대한 유예지대처럼 보이는 면이 있어서, 후설이 현상학에서 말하는 판단 중지(epoche)의 역할을 수행한다. 후설은 어떤 사물이나 대상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을 배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선입견이라 보아도 좋겠지만, 무엇보다 삶이 흘러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듯이 에포케는 그저 유예에 그칠 뿐이다. 즉 가후쿠가 문 앞에 서 있는 일은 비스듬히 열린 풍경 너머로 존재하지 못하며. 이 모습은 판단 중지의 일종이다. <괴물>에서도 마찬가지로, 진실에 비스듬히 열린 풍경은 영화가 진행되며 서서히 열리고 이를 따라 관객은 판단 중지의 순간을 마주한다. 비스듬히 열린 문 사이로 침투하는 것은, 단지 관객의 시선만이 아니라 열림을 향해 진출하는 ‘외부’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드라이브>와 <괴물>의 흉추를 떠올리자. 미나토와 요리는 한 세계가 된다. 가후쿠는 한 세계가 끝났음을 직감한다. 이들 세계는 무언가를 앞두고서 그로 나아가기를 망설이는 상태, 즉 ‘문 뒤에 숨은’ 모습을 가정한다.
<드라이브>의 마지막 장면이 판데믹이 끝난 어느 날의 한때를 묘사한다는 점은, 이 영화가 다분히 동시대적임을 가리킴과 동시에 “판데믹 이후에 만들어진 영화는 판데믹을 어떻게 바라볼지”를 고민하게 했다. 판데믹은 세계의 위생이 위협받던 시기로서, 이들 간에 거리를 두면서 서로를 바깥으로 추방하지만 관계의 ‘열림’만큼은 유지하고자 했던 이상한 시기였다. 그러니까 어쩌면 판데믹은 우리가 영화관이나 무대에 서지 않더라도 ‘자기’를 상상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 같다. 변해빈은 「영화가 제동을 걸 때」라는 글에서 ‘자연스러움’에 관해 질문하면서 마주침과 중단에 관해 말한다. 그의 설명을 따르자면 연결점이 서로를 ‘빗나가는’ 지점은 편리함을 자연스러움으로 재인하지 않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판데믹이 세계를 하나의 외부로 만들어주었을 때, 신체는 세계를 끌어들이는 틈새가 된다. <드라이브>의 히로시마 첨탑이 역사를 투과하는 창구가 되어주듯, 신체가 세계의 틈새가 될 때 여기에는 관객의 역사가 투과한다. <드라이브>에서 가후쿠의 신체가 무대의 일종이라면, 이와 같은 무대에 상연되는 것은 관객이 현실에서 상상할 수 없던 자신의 모습이다. 이들에게서 ‘미래’란 서로 같은 시간선에 있는 게 아니라 완전히 동떨어진 ‘바깥’이어서, 스스로를 무대의 아래에 자리한 관객처럼 여기게끔 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감금이 끝날 때 오히려 우리는 오즈의 인물처럼 ‘끝’을 직감하게 된다.
3.
<보이후드>(2014)에서 등장하는 한 장면은 영화가 마주하는 끝의 감정을 설명한다. 자녀가 장성하여 대학교의 기숙사로 진출하자, 허전해진 집을 보며 부모는 말한다. “난 그냥 뭐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이처럼 영화를 보는 동안에 우리는, 영화가 언제 끝날지를 대강이나마 알 수 있다. 영화란 ‘이야기’를 담고 있으므로, 바깥에서 이를 보고 있을 때는 다음 단계를 예측하기가 쉽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와 같은 예측이 힘들게 되는 것은 관객이 진정으로 작품에 이입할 때다. 관객은 영화에 이입하는 순간 자신이 떠나온 세계를 잊는다. 마치 외부가 없는 듯 행동해야 한다는 점에서, 무대에 오르는 것과도 같다. 그런 점에서 판데믹은 영화와의 유사점이 있는데 우선 판데믹은 전 지구적인 현상이므로 ‘바깥’이란 게 없었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본다는 건 스스로를 내부로 추방한다는 점에서 ‘바깥’에 대한 갈망으로 자신을 던져넣는다. 물론, 이와 같은 일은 그런 미래를 마주하기 위함이지 영영 이곳에 머무르고자 함은 아니다. 미래에 대한 열림은 현실적인 가정으로 작동하기보다 자신의 입장에 비켜서는 일을 가리킬 뿐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향유자가 없을 때도 여전히 영화일 수 있을까?” 우리는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게 항상 ‘바깥’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의미의 연결이 공백을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의 내부를 직조한다면, 반대로 영화의 바깥은 그런 의미의 형성이 실패한 곳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마구치의 근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4)는 판데믹의 끝자락에 선 작품이다. 영화는 판데믹 관련 보조금을 노리는 엔터 업체 ‘플레이모드’ 사의 이야기를 다루며, 여기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주로 묘사된다. 영화의 시작과 마무리를 장식하는 업사이드 트래킹 쇼트는 마치 일본의 초기 영화처럼 펼쳐지고 있어서, 이를 극에 들어가고 나오는 크레딧처럼 보이게 한다. 관객은 어떠한 이야기 속에 ‘진입’한다는 인상을 받으며, 이어서 나오는 장면들에서는 카메라가 마을을 마치 CCTV처럼 바라만 본다. 말하자면 영화는 극무대처럼, 무언가에 의해 관찰되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이는 특히 제목과 맞물려 탐색의 성과를 낸다. 관객은 영화가 제시하는 ‘악’을 따라 작중의 인물이나 사건을 탐색하는데, 이와 같은 행위는 관객을 정작 내부에 포섭되지 않게끔 함으로써 영화 전체에 거대한 터널을 낸다. 즉, 관객은 영화를 일종의 세계의 ‘틈새’로 여기면서 이를 따라 외부를 내부에 틈입한다. 이때 가장자리로 나가버린 이들 구도는, 정중앙의 공백을 강조하면서 ‘무대’는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파악된다는 점을 전한다. 무대에서 의미는 중앙값이 아니라 아치의 바깥에서부터 탐색되는데, 이와 같은 투사의 과정은 오히려 ‘바깥’의 가능성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뜻깊다. 영화의 바깥에서는 이미 판데믹이 끝났지만, 이와 같은 투사의 과정은 영화가 여전히 감금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에 아직 ‘미래’가 도래하지 않았음을 추론케 한다. 즉, 영화는 항상 바깥에서부터 의미를 끌어온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드라이브>의 가후쿠가 스스로를 자동차 안으로 밀어 넣었듯이, 어쩌면 이들은 자신에게 ‘미래’가 있다고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대목에 ‘악’의 정체가 있으리라고 추론하는 일은, 바꾸어 말해 영화의 ‘바깥’으로 향해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그 점에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상 “악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따라가려는 마음, 혹은 그런 트래킹의 과정에 대한 편의성처럼 보인다. 이 제목은 무언가를 찾는 것이기보다 그러한 결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가리키는 것에 가깝다. 영화가 다루는 게 글램핑(Glamping)이듯, 영화에 퍼진 의미의 요소는 의미 찾기와 해석에 대한 용이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다소 ‘호화로운’ 관람 경험이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호화로움은, 되려 바깥 세계가 삶의 의미를 잃고 있기 때문에 내부에서 더욱 희망이 되는 것이다. 문을 열기만 하면 바깥 세계가 펼쳐지리라고 믿는다는 것. 이른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데믹 시기를 지나 사라져버린 무대를 기리는 영화다. 가후쿠에게 자동차가 단순한 탈 것이기 전에 문을 열기까지의 과정을 가리키듯, 영화는 미래를 향해 열린 무대이면서 동시에 현실에 주저앉은 이들의 대피소가 되어준다. 영화는 최후의 순간에서도 여전히 자신으로 남고자 하는 이들이 향하는 ‘무대’이다.
비대면 사회는 어딘가로 이동하는 시간 없이 곧바로 연결되었고,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시작과 끝이 이상하리만치 기억나지 않는 이 이상한 시기는, 우리가 언제 진입했는지도 모를 터널과도 같았다. 가후쿠는 이 터널에 몸을 비집어 넣음으로써, 과거를 등짐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길고 긴 터널 속을 살아가는 가후쿠에게 자동차는 자신의 삶에서 비켜서게 해주었다. 영혼이 공허하고 인간이 찢어질 때 자동차는 가후쿠가 몸의 형체를 유지하게끔 해주었다. 마찬가지로, <드라이브>의 마지막 장면이 판데믹이 끝난 어느 날 낯선 때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폐허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빨간 자동차는 작중의 용례대로 하나의 무대이기도 했다. 바로 이렇게 ‘자리’로만 남는다는 것, 영화는 ‘무엇’이 되는지를 고민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기’의 바깥에 나설 수 없는 ‘감금’이기도 하다. 가후쿠가 수행하는 연극 ‘고도’는, 의미의 부재를 원료 삼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그저 외부에 대한 인상만을 갖고서 의미를 수행하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오히려 ‘바깥’을 상대하기보다 자신을 내부로 밀어 넣는 듯한 인상이 있다. 하지만 ‘외부’를 의식하는 일이야말로 사람들을 영화의 한복판에서 ‘존재’하게끔 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바깥’은 오히려 내부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영화란 어떠한 감금의 양식이기 전에 배우를 무대에 올리는 것이기도 할 테다.
<드라이브>가 문을 열기를 두려워하는 모습에서 영화를 시작한다면, <우연과 상상>(2021)에서는 “문은 열어두세요”라고 지시하는 교수가 있다. 이들이 자신이기를 포기하는 순간은 정확하게 외부를 향해 문이나 마음을 열어둔다는 ‘바깥’에의 지향이 내비치는 순간이다. 이른바 열림에 대비하는 일은, 의미의 결핍이나 폐소 상태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마음을 열어둔다는 환대에 더 가깝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슴이 오직 도망칠 곳이 없을 때만 인간에게 덤빈다고 말하면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강조되는 건 내부가 아니라 ‘바깥’임을 명시하는데, 이는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되려 대피가 힘든 곳이기보다 하나의 대피소로서 기능할 수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즉, 바깥의 상실은 오히려 주체의 추방을 전면화한다는 점에서 바깥의 의미를 ‘환대’로 탈바꿈시킨다. 바깥이 사라지고 죽음과 직결될 때, 자신이 이곳에 존재해온 과정을 떠올리는 것은 무대가 제공하는 자기 발견의 계기와도 같다. 오히려 무대에 선 인간이 바깥을 내다보는 일은 오직 죽음의 한가운데 속할 때만 비로소 가능하기도 하다. 마치 판데믹 사회의 인연처럼, 연결되지 않음에서 연결을 발견하는 일은 열림이자 닫힘으로 기능하는 판데믹 시기라는 작은 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문을 열어둔다는 건, 그와 같은 감금에서 풀려나 어찌 되었든 간에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1]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