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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16. 2024

과거를 다시 보기 위한 현실의 행위

<가여운 것들>(2024)


영화가 흔히들 꿈에 빗대어지는 이유는 뭘까?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항상 ‘끝을 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극장에 들어서면 불이 꺼지고, 결말에 이르기 전에는 영화가 내비치는 꿈세계에 침잠해있을 것을 요구받는다. 이 모습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테넷>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시작되는 오페라 하우스 돌입 시퀀스에서는 테러리스트의 수면가스 유포가 이루어진다. 한순간을 기점으로 관객 모두가 꿈세계로 들어가는 모습은 가히 장관을 이룬다. 그렇다면 이를 두고서 영화가 갖는 화합의 기능으로도 볼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서로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잘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모두가 ‘같은’ 꿈을 꾸고 있다. 그렇기에 영화는 이 꿈세계에 소속된 이들에게서 현실의 위화감을 지울 수 있고, 이는 곧 영화가 보여주는 것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와 접근법을 제공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즉, 꿈영화의 기능은 우리에게서 차이를 지우는 것이다. 현실이 어떻든 간에, 이곳에서는 그런 현실을 상대화할 수단과 방법이 없으므로 꿈세계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표면의 삭제는 그 자체로 추락을 암시하면서도 자기 외견을 특징지을 수 없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영화를 보며 자기와는 다른 존재에 이입할 수 있는 것도 그 덕택이다. 평소에 우리는 신체를 준거 삼아 세계를 상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를 인식하지만, 영화에서 관객은 꿈세계의 일원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를 ‘차이’로서 인식하지 못한다. 즉, 어떤 것이 자기인지를 알 수 없기에 영화가 제공하는 신체에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가여운 것들>은 신체의 해부와 재조립에서 출발한다. 도입부의 해부학 교실처럼 ‘과학적’으로 접근한다면, 뒤죽박죽된 신체를 두고서 면역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를테면, 돼지의 장기와 인간의 장기가 유사하다한들 이를 실제로 이식하면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두 세계는 기본적으로 달라서, 둘 사이에 위화감을 지우지 않으면 접합부위부터 서서히 썩어들어가고야 말 것이다. 영화가 모티브로 삼은 프랑켄슈타인 설화에서 가장 처음으로 주목해야 할 사실이 그렇다. 두 세계가 접합되었지만, 이곳에서 면역반응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 여기서 꿈영화의 기능을 상기해보자. <가여운>의 도입부는 벨라를 되살리는 과정과 이후 과정을 살짝 보여주는데, 어안으로 구성된 카메라나 중앙으로 강조된 키아로스쿠로 음영은 초기 호러 영화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개중에서도 특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로, 교과서에서는 표현주의의 시초로 여겨지지만 그 본질은 ‘도플갱어’에 있다. 키틀러는 영화사의 초창기에 도플갱어 영화가 유행했음을 지적하면서, 영화라는 매체는 이미지의 연상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 존재하는 하나를 ‘기록’하였음을 지적한다. 이를 따른다면 영화는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할 수 없는 도플갱어를 평탄화하고, 이를 하나의 표면에서 ‘목격’될 수 있게끔 공유하는 역할을 한다. 1초에 24번의 죽음을 겪는 영화는, 절단과 분절에서 자신의 과거를 분리해내고 이를 목격하여 가늠할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낸다. 바꿔말하자면 영화는 차이화하는 신체를 상대화하는 세계로 탈바꿈하는 일에 이점이 있었다. 


영화사의 초창기 이미지 중에는 말이 달려가는 모습을 찍은 작은 원판이 있다. 이 원판은 말이 달려가는 메커니즘을 한 표면에 나열하면서 이를 여러 개체로 분화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의 이미지로 합쳐질 때 한 세계를 자신에 종속시킨다. 분열상이 하나로 합쳐짐에 따라 도플갱어를 목격하는 일은 이제 더는 죽음을 암시하는 게 아니게 됐다. 벤야민의 말처럼 이제 도플갱어는 마술환등이 되어, 우리의 눈앞에 꿈세계를 재림하는 무인지대로 변모한다. 이른바 정우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음 이후 기계’로서의 영화는 “과거를 다시 보기 위한 현실의 행위”다. 이 도플갱어들은 각자의 과거이면서 동시에 부활한 현실로서, 철두철미하게 면역계를 교란한다. 그렇다면 영화가 현실을 구하는 방법은 그들이 일단은 한번 죽어야 한다고 보는 것은 아닐까. <가여운>의 서사가 출발하는 지점은 벨라의 신체가 추락을 겪는 것, 한 번의 죽음을 겪고서 도플갱어로 다시 태어나는 ‘영화’의 과정이다. 이 장면의 진위는 나중에 가서야 억압에 시달리던 중의 슬픈 선택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녀의 신체가 그때까지 세계에 의해 바깥에 차이화됐다면, 이어지는 추락에서 그녀는 표면을 잃고 붕괴한다. 한번 죽었던 몸에 면역반응이 사라지고 나면 이제 그녀는 반대로 세계를 상대화할 수 있게 됐다. 삼투되었던 신체는 이제 세상에 자신을 틈입하는 도구가 된다. 혹자는 벨라를 두고서 팜므파탈과 그에 따른 파멸의 구조를 지적하지만, 오히려 벨라는 여성이 남성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며 자신을 세상에 틈입한다. 이런 점에서 벨라의 모습은 영화가 죽음을 경험하는 방식과 그에 따른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 보인다. 


영화에서 ‘바깥’은 대개 영화를 내부로 가둬놓기 위해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존 포드의 1956년작 <수색자>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했던 영화는 주인공 이산이 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이 장면에서 이산은 다시금 영화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영화 속 세계의 암전과 함께 죽음을 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꾸어 말해 이 영화에서 이야기가 펼쳐지고 전개되는 곳이 바깥의 황무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집 안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은 가족이면서 동시에 관객이기도 하다.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도플갱어의 특권이고, 이 특권은 꿈세계의 표면으로 인해 안전함에 머무른다. 이제 창문 밖에 펼쳐지는 격렬한 전투를 안전하게 관람하던 관객은, 자신에게 주어졌던 어트랙션을 마치고 현실로 귀환한다. 여기서 ‘영화’는 현실에 상대화하는 구획이며, 동시에 관객의 신체를 차이화하는 구역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우마무스메: 새로운 시대의 문>에서도 창문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아그네스 타키온이 무대를 내려와 객석에 머무르는 순간 그녀는 관객의 위치에 선다. 이 위치에서 그녀는 안전함에 머무르면서 영화 속에 있는 도플갱어를 마주하기를 주저한다. 왜냐하면 이 도플갱어를 마주하는 일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무화한다는 점에서 구원의 불가능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부’는 안전함에 머무르는 장소지만, 반대로 꿈세계와는 완전히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삼투를 거절당하는 곳이기도 하다. 즉 내부는 신체의 항상성에 투신하지만, 반대로 꿈세계를 밀어낸다는 점에서 회복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도플갱어란, 본질적으로 재배치의 기능을 담당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벨라가 프랑켄슈타인의 다른 판본임을 쉽게 눈치챈다. 영화는 어머니의 육신으로 태어난 벨라가 혼란을 겪는 모습보다 그냥 처음부터 언어를 익히고,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을 그릴 뿐이다. 프랑켄슈타인이나 벨라나 서로 죽은 사람이 타인의 신체에서 거둬진다는 점은 같지만, 이 둘 사이에는 신체와 면역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주된 차이가 있다. 프랑켄슈타인이 분열된 이미지를 갖고서 거울 속의 자신을 대한다면, 벨라는 말을 배우고 성기를 자극하는 식으로 서서히 아동발달의 과정을 따라간다. 영화는 어머니의 육신으로 태어난 벨라에게 신체에 적응할 시간을 주고, 반대로 신체의 기억을 응용하게 한다. 갓윈 박사의 존중으로 벨라의 어머니가 죽고 나면, 실제로 그녀를 잉태했던 자궁의 역할이 신체 전체로 확대되는 게 영화의 시작점이다. 여기서 벨라의 육체는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한 이후, 벨라의 정신을 포섭하는 ‘기계’로서 작동하며 이는 영화가 “과거를 다시 보기 위한 현실의 행위”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영화가 줄곧 강조하는 벨라의 자립과 성장이 일종의 칼라로 묘사되는 것도 거진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감이 있다. 만약 신체가 하나의 영화라면 이때 영화는 본래 있던 현실을 모사한 것인가, 아니면 본래의 현실이 영화를 통해서만 드러내어질 수 있는 것인가. 이 둘이 한 자리에 놓일 수 없다는 사실이 도플갱어 관계를 보여준다면, 도리어 현실을 포섭하는 쪽을 영화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상대화하는 세계는 차이를 인식하는 기능을 죽임으로써 꿈세계를 현실에 침잠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끄집어내어 이를 현실에 구현하는 것은, 영화가 갖는 환상살의 기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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