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일리언: 로물루스>(2024)
<에일리언: 로물루스>는 기존 시리즈를 오마주했다는 점에서도 특징적이지만, 2000년대 초반에 새로 등장한 스페이스 호러 장르 게임을 연상케도 한다. 장르라고 표현하기도 민망하지만, 2008년에 처음 선보인 <데드스페이스> 시리즈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이 시리즈는 작품마다 크게 다르지만,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에는 1) 버려진 우주선 2) 유기체와 결합해 만들어진 비정상적인 형태의 외계생명 3) 군인, 승무원, 엔지니어 등의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이 있다. 이는 우주가 갖는 깊고 어두운 이미지를 신비에서 심연으로 치환하고, 이에 파생되는 공포를 토대로 작업한다는 점에서 개척의 역사를 답습한다. 예를 들어 신대륙은 처음에 신비스러운 이미지로 묘사되었지만, 이후 본격적으로 개척이 진행됨에 따라 지배와 정복의 땅이 되었다. 한 신비를 마주하는 일은 그에 대한 정복과 통제를 통해 논리 회로 안에 이를 기입하는 과정을 거쳤고, 결과적으로 ‘개척’이 말하는 진보란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의미하지만은 않게 됐다. 스페이스 호러가 다루는 게 그렇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꼭 ‘발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그저 그런대로 살아갔을 뿐일 수도 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유년기와 같은 ‘원형’은 여전할 수도 있다. 유년기의 상처가 치료되는 게 아니라 그저 묻어둘 뿐이라는 모 학자의 말처럼, 개척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여러 문제의식의 반복을 암시할 뿐이다.
스페이스 호러는 기본적으로 우주를 개척한다는 점에서 진보 성향을 띤다. 그러나 우주시대를 맞이할 정도로 기술을 발전시켰음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많다. 사회적이거나 환경적인 갈등, 이런 문제의식을 두고서 다양한 서브 장르로 파생할 수도 있겠지만 개중에서 ‘호러’는 그와 같은 문제를 미지의 존재로 치환하는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어 르네 지라르는 인류학을 연구하면서, 희생제의는 사회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면서 내부 결속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때 내부에 스며들지 않는 존재를 외부로 추방하는 것은 생명체의 항상성 유지에 빗대어졌고, 희생제의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지만 해결되어야 할 것들에 대한 목적성을 남겼다. 마찬가지로 스페이스 호러는 인류 간의 계급 갈등, 혹은 빈부격차 등의 문제를 ‘이방인(Alien)’의 형태로 치환한다. 이는 구로사와의 스페이스 서부극이라 불리는, <7인의 사무라이>라는 원본이 있는 <스타워즈> 시리즈가 실제 사회의 여러 요인을 집단 갈등으로 보여주는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우주 시대가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직면하는 방식은, 말이 통하지 않으면서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는 괴생명체를 출현시키는 일이었다. <7인의 사무라이>의 마지막 장면이 농부들이 씨를 뿌리는 장면, 더 나은 미래로 가는 순환을 보여줬다면 이와 같은 항상성은 <에일리언> 시리즈에서 더 고등한 존재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무너진다.
시리즈에 등장하는 검은 액체는 생명체의 DNA를 제노모프(물론 커버넌트 시간대에선 프로토타입인)의 방식으로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항상성과는 거리가 멀다. <로물루스>를 보면 작품 중간에 주인공 일행이 검은 액체를 처음으로 마주하는 장면, 과학 장교 룩에게 생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을 설명받는 장면이 있다. 이때 룩은 인간의 육체는 우주의 심계를 헤쳐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이를 위해 급속한 ‘진화’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이후 모니터 화면은 검은 액체를 투여받은 생쥐가 ‘부서진’ 상태에서 다시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애석하게도 일행이 떠난 후에야 화면 상에 생쥐의 유전자가 기괴하게 뒤틀려 신체를 초과하게 된 사실이 보여진다. 이 모습은 과학 장교 룩이 말하는 ‘더 나은’ 신체로의 진화가 상위단계로의 발전이 아닌, 항상성의 붕괴에 그칠 뿐이라는 점을 보여주면서 이들 세계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시한다. 전작에서 피터 웨이랜드의 목표가 인류의 발전이 아닌, 개인의 영생임이 드러나면서 룩이 제시하는 ‘진보’는 세계의 것이 아니라 한 세계에 자신의 죄를 밀어 넣는 작업에 불과함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니까, <에일리언> 시리즈가 말하는 진화의 한 과정은 더 나은 삶을 위한다기보다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온갖 더러운 것을 해치워버리는 대속의 과정에 더 가깝다. 인간은 본래부터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은, 생명체가 생명활동을 지속하는 과정과도 같으니 여기에는 어떠한 가치 판단이 들어갈 구석은 없다.
알랭 바디우는 『존재와 사건』에서 “동일성을 정초하려면 타자 내부에 어떤 타자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며, 이를 무한성의 유래로 삼는다. 이 관점은 인류의 기원 안에 어떤 타자가 존재함을 말하는 <에일리언> 시리즈에서 웨이랜드사의 목적을 잘 보여준다. 가령 <프로메테우스>의 도입부에는 검은 액체를 마시고 물에 녹아들어 한 생명체의 기원이 되는 엔지니어의 모습이 묘사된다. 이는 엔지니어와 인간이 서로 동일한 유전자 구조를 지녔다는 점을 통해, 인간의 창조주로서 엔지니어의 모습을 부각한다. 특히 엔지니어와 인류의 관계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에서, 인류의 외계 기원설을 지지함에 따라 엔지니어는 인류의 바깥으로서의 이미지가 부각된다. 엔지니어는 인류의 기원이기 전에, 인류가 생명공학을 발전시켜가는 과정에서 얻은 도덕의 산물에 대한 희생양이 될 수 있는 듯 보인다. 인류가 영생을 꿈꾸려면, 그 자신이 자연 밖에서 온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 존재하는 엔지니어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이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외계에 대한 탐사가 외우주를 향하면서도, 동시에 내적인 기원을 향한다는 점에서 이 관계는 항상성이 있다. 인류와 유기합성로봇의 관계를 두고서 신의 자리에 올랐다고 표현한 피터의 말은 무한성의 관계는 잔여분을 남김을 지적한다. 그리고 엔지니어를 습격한 미지의 생명체가 인간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 또한 명쾌히 설명한다. 룩의 말처럼, 거대한 순환에는 항상 이물이 필요했다.
자기를 유지하려는 성질이라는 관점에서 ‘자기’란 항구적인 불변을 가정하지 않는다. 버릴 건 버리면서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유지하는 게 무한성의 관점이다. 이를테면 「고도」의 관점은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런 믿음을 밀고 나가는 지속에 중점이 있다. 믿음의 모습이나 형체가 바뀌더라도 결국에는 기다림을 이어갈 것이라는 믿음. 이와 동일하게 <에일리언> 시리즈에서 인류의 진화는 우주 적응에만 적합하면 그만일 뿐, 인간의 형체 따위는 유지되지 않아도 그만일지도 모른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의 마지막 장면처럼, 개인이 아니라 인류라는 거대한 종의 입장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외계로 사출해버리는 일을 택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영원회귀는 동일한 순간의 무수한 반복이 아니라 어떤 차이를 발견해서 이를 토대로 한 순간을 교정하는 일에 중점이 있는 사상이다. 이때 차이는 내부로 흡수되는 게 아니라 ‘내부’를 상대화하는 일에 소모되어 바깥에 추방되는 ‘교정’의 촉발제에 가깝다. <에일리언> 시리즈에 등장하는 여러 에일리언 개체와 제노모프의 변종은 아마 그와 같은 차이의 촉발제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영화는 인간을 변형하는 대신에 쉴새 없이 몸을 탈바꿈하는 생명체를 등장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인류의 유전자를 ‘지속’하려 든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는 삶을 지속하는 일은 ‘자기’를 보존하는 게 아니라 보전하는 것에 가깝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흔히 “각오한 자는 행복하다”고 여기며 불확실성을 줄이면 자연스레 한 세계가 인식론적으로 잘 순화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진화를 급격하게 촉진하는 과정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과 선택할 수 있는 것 모두를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예상치 못한 미래로 우리를 데려간다. 가시권을 넘어가는 상상은 외계에 대한 불안으로 바뀌고, 우주 시대를 살아가는 일은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좋을 만한 수준을 유지함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핵연료를 사용하고 남은 찌꺼기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해서, 이를 땅이나 바다에 묻어두는 것 말고는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 마치 밀린 방학숙제를 하기보다 그냥 방학 마지막 날까지 미루듯 이 우주에서 인류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타자의 형상으로 등장시켜왔다. 그들을 외계에서 왔다고 말하면 책임감도 덜고 나아가서는 그냥 해치워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제노모프가 사각지대 등을 응용하거나, 핵융합로처럼 민감 시설 근처에 자리 잡는 일은 무언가를 놓치지 않았는가 하는 인간 본성의 사각지대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이 마음, 이 불안이야말로 우리의 세계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며 이는 우주탐사가 그와 같은 ‘불안’을 시야에 넣고자 하는 일임을 드러낸다. 문제를 외부로 돌리고자 대속을 택하는 건, 설사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불가하더라도 그 자체로 인류의 한 체제가 생명활동을 이어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순환에 대한 간접적인 징표가 된다.
종교의 기능은 정복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처리’를 담당하는 것이다. <로물루스>의 도입부에서 지적되듯, 인간의 삶이 낙후되는 것은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이며 이는 인류의 생명활동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잔여’에 가깝다. 먹은 걸 전부 양분으로 소화할 수 없듯, 자본주의 체제에선 별수 없이 찌꺼기로 남게 되는 집단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프로메테우스>와 <커버넌트>가 보여준 인간 기원에 대한 탐구는, 웨이랜드의 사적인 목표보다 죽음에 포섭되지 않는 다른 공포의 근원을 찾아가는 일에 더 가깝다.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인간 종족의 변화를 비교적 온건하게 표현했다면, <에일리언> 시리즈는 인류의 발전은 항상 기괴하게 출몰하는 돌연변이의 징후를 내포한다고 말한다. 과학은 인류의 삶과 사상을 내적으로 통제한다고 여겼지만, DNA 기술로 예측하는 수명이나 질병에 대한 징후에 포섭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암은 세포분열의 돌연변이에 의해 촉발되는 ‘오류’이자, 분배의 실패가 좌절됨에 따라 신체를 좀먹는 과정임을 떠올려보자. 각종 매체에서 묘사하는 우주 시대란 인류의 기술발전으로 인해 갈등이나 자원고갈, 기후변화 등의 문제가 해결되는 일만을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것들을 그리는 과정은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인간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보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묘사하는 것에 가까워 보이기까지 한다. 유전자 단에서 의도적으로 변화를 촉진한다는 건 그런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