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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19. 2024

아버지의 법, 한국사회의 법

<베테랑2>(2024)

"혼돈의 이야기의 화자는 분명히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다. 그러나 진정으로 혼돈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어로 말을 할 수 없다."

 -『아픈 몸을 이야기 하기』-


1편에서 조태오의 검거를 앞두고 미란다 원칙을 고지했던 서도철 형사는 박선우에게 “죽지 마라.”는 이야기만을 남긴다. 마치 어린아이가 친구를 붙잡듯, 서도철은 박선우와 할 말이 아직 남았다고 여긴다. <베테랑2>에서 인상 깊은 건 이 장면에서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란다 원칙은 해당 고지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루어진 행위의 증거성을 조각내기에 범인을 체포하는 즉시 고지되는 게 원칙이다. 이를 따른다면, 박선우가 심정지에 이른 응급상황이라 한들 그를 체포했을 때는 미란다 원칙이 고지되는 게 옳은 것이다. 범인을 체포하기 전에 의례적으로 행해져야 할 행위가 생략되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핵심이 잘 드러난다. 전작에서 원칙을 고지하면서 주었던 쾌감을 고려할 때, 이를 대신해 다른 대사가 들어간 건 영화적인 수사처럼 보인다. 서도철이 평소 범죄자에게 “죄짓고는 살지 마라.”고 말해왔었다는 점을 떠올리자. 죄를 짓고 살지 말라는 말과 죽지 말라는 말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죄를 짓지 않으면 멀쩡하게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 죄를 짓지 말라며 권하는 쪽일 테다. 그러니까 이 말은, “당신이 죄를 지으면, 나는 당신을 죽여야만 한다.”는 수사를 내포한다.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기를 택한 영화의 태도는 실질적으로 박선우가 저지른 행위에 대한 ‘판단’을 주저하고 있으며 여기서 이를 수행하는 건 관객이라 볼 수 있다. 영화가 던지고, 관객이 받는 이 질문은 확실히 상업영화로서는 의례적이며 탁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넘어야 할 선을 판단하는 일을 관객에 넘겨버리는 이 판단을 지지하기엔 의구심이 너무 크다. 미란다 원칙을 고지함으로써 영화는 여태까지 서도철이 해왔던 고민을 조각내버린다. 서도철은 박선우가 범죄자이기에 검거하고만 있을 뿐이고, 어쩌면 박선우의 행위를 “틀리지는 않았다. 그저 다를 뿐이다.” 정도로 여기는 것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이 처음 사건을 뛰고 나서 회식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박선우는 서도철이 조태오를 검거하는 장면을 보고서 경찰이 됐다고 말한다. 서도철도 박선우에게 “너와 나는 같은 과다.”라고 말한다. 두 사람의 관계성은 영화 스스로가 진술하듯 유비 혹은 근연종의 모습으로 드러나며 이 설정이 이야기를 끝으로 밀고 가는 힘이 된다. 서도철과 박선우가 서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박선우의 모습은 벽에 걸린 거울을 통해 드러나는데, 이 구도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세계에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일반적으로라면 있을 수 없는 대화씬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일련의 동시대성을 구성한다. 두 사람은 서로 닿을 수 없지만, 반대로 같은 자리에 있기도 하다는 것. 이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처음으로 떠올려야 할 것은 아마도 이중인격이다. 두 인격은 하나의 신체에 속해있지만, 거울을 통하지 않으면 서로를 마주할 수 없다. 즉 서도철이 박선우를 검거하는 일은 자신을 해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미란다 원칙을 고지할 수는 없었을 테다. 스쳐 지나가듯 언급되는 대사를 인용한다면, 박선우가 사람이 죽이고 싶을 뿐인 연쇄살인마이듯 서도철도 사람이 패고 싶어 경찰이 됐을 수 있다. 그럼 두 사람은 대체 뭐가 다른가?


말하자면 자기반영이다. <베테랑2>는 한 시대가 표면 위에 반사되는 것을 숨기지 않으며 이를 작품 내부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이 일에 결과를 내놓지 않음으로써 책임을 피할 뿐, 관객에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하고 있지는 않다. 혹자는 현실이 더 영화 같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영화의 부재료로 삼아지면 곤란하다. 관객이 이 일화를 두고서 무언가를 말할 때는 이미 영화의 바깥에서 이야기가 이루어질 뿐이라는 사실만이 있다. 이 진술에 신빙성이 실리는 건 미란다 원칙을 따라 자기진술의 권리를 미리 고지했을 때일 뿐, 자기분열의 형태로 서로를 구속하는 일에 적용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1편의 조태오는 실제로 참고할 만한 몇몇 일화가 있었지만, 2편에서는 사적 제제와 학교폭력이라는 두루뭉술하고 광범위한 주제로 넘어간다. 일화를 특정하기는 어려워졌고, 야화를 비화로 펼쳐내기에는 충분해졌다. 특정할 수 없기에 책임을 요구할 대상 같은 건 없고, 이를 따라 마땅히 해결책이란 게 존재할 수 없는 정동의 회로만을 남긴다. 물론 이 구성이 후속작을 위한 설계일 가능성은 있다. 박선우의 탈주는 다음 이야기를 예고하는 게 분명하다. 대개 영화는 현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서 카타르시스를 얻으며, 그 점에서 이 탈주는 우리가 쫓아야 할 문제의식을 이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탈주가 작품이 포섭하지 못한 이야기의 외적 도주로 이해될 공산도 충분하다. 이제 작품의 홍보요인이었던 자기반영은 자기구속이 되고야 만다. 


이제 이야기를 다음으로 넘겨보자. 서도철은 동료의 말마따나 범죄자를 은근슬쩍 패고 싶어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선을 넘지는 않는다. 1편의 조태오를 통해 언급되듯, 영화는 배트맨과 조커 등의 관계를 암시하면서 배트맨식의 불살주의를 서도철 형사에 기입한다. 터널에서 두 사람이 대립할 때 박선우는 서도철에게 도덕적인 면에서의 딜레마를 강요하는데, 1편에서 보여준 배트맨과 조커의 관계를 생각하면 아마 대부분은 <다크나이트>를 떠올릴 것이다. 두 영화 간에 무언가 연결고리가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범죄자를 죽이지 않는 형사와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는 형사 간에는 무언가 수상한 관계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사람을 죽이면서,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는 범죄자가 바로 박선우가 아니던가? 박선우는 살해를 정당화하고 싶어서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핑계를 댄다. 나쁜 놈이니까 팬다는 점에서는 사실 박선우와 서도철은 서로 분간하기 어려워 보인다. 판단은 모두 자의적이고, 서도철이 법을 어긴 사람만 상대한다고 한들 서도철은 어느 정도는 폭력을 즐기는 것 같다. 그럼에도 서도철이 박선우와는 다른 사람인 건 서도철이 항상 명령과 규칙의 체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서도철이 형사 신분으로 갖는 공권력이 특정한 한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형사는 정의를 집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범죄자를 재판장에 데려다 주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 여기서 정의로움은 한 사람의 죄질을 정의하지 않으며, 이는 작품 후반에 사실관계와는 무관한 피해자를 조망함으로써 부연된다. 


서도철과 박선우의 결정적인 차이는 나쁜 사람인지 착한 사람인지를 자의적으로 구분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점에만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바꾸어 말하자면, 서도철은 규칙을 따르기에 게임의 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 1편에서 서도철은 허리가 걱정될 정도로 두들겨 맞지만 마치 만화처럼 일어선다. 게임이나 만화처럼, 서도철은 죽지 않을 것만 같은 인물이며 그래서 칼에 찔려도 그다지 걱정은 되지 않는 부류다. 하지만 박선우는 사람을 죽인다는 점에서 만화나 게임이 해낼 수 없는 죽음의 목표에 도달한다. 박선우라는 캐릭터는 사적 제제라는 소재보다, 죽지 않는 형사와 사람을 죽이는 형사라는 의미의 대비에서 더 빛을 발한다. 이 이분법적 대립은 불멸의 신체에 상흔을 내기 때문에 반대로 바뀔 수 없을 것만 같은 현실에 균열을 가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제 사람들은 입체적인 캐릭터보다 다시금 나쁜 놈과 착한 놈으로 편을 가르는 일로 돌아간다. 이야기의 앞뒤를 재는 조합 게임보다 현실의 그림자를 목격하는 추상 게임에 천착한다. 헌데 무엇이든 뚫는 창과 무엇이든 막는 방패가 한 자리에 공존하는 것은 가능한가. 터널에서 두 사람이 대립할 때 박선우는 서도철에 초대장을 보낸다. 아들을 인질 삼자 서도철은 선택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다. 다행히도 영화는 서도철의 빠른 판단으로 아들이 인질로 잡힌 현장에 동료를 파견해서 인질을 구출하는데, 이쯤 되면 아들과 얽힌 서사는 서도철이 자신의 가족을 대할 때도 선을 지킬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 같다. 


아들의 학교 폭력을 두고서 학교에 불려 갔을 때 서도철이 한 말은 “가해자가 우리 아들이 아닌데 왜 우리 아들이 전학을 가야 해요”였다. 이 말은 아들이 피해자라는 점을 강조하기 전에 아들의 위치계를 바꾸거나 변형하지 않으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하지만 항상 선을 넘지 말아야 하는 이 직업에서는 오히려 처음부터 좌표 설정이 잘못되었음을 가정하는 게 불가했다. 그래서 서도철은 박선우가 던진 질문을 두고서, 동의하지 않는다는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기보다는 “죽지 마라. 너는 내가 잡아 쳐넣을 거니까.”라는 대사를 택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서도철은 어느 순간부터 “너 정말 나쁜 놈이구나.”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됐다. 마치 원래부터 나쁜 놈인데 굳이 입 아프게 꺼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영화의 플롯이 현실을 통해 완성된다거나 하는 식의 구성은 처음부터 편지가 열릴 가능성이 없었다고 보는 쪽에 가깝다.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영화를 통해서만 말할 뿐, 한 현실이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베테랑2>는 두 가지 법이 흔들리는 자리에 중첩된 색다른 이야기를 보여준다. 아버지의 법이 있고, 한국사회의 법이 있다. 영화를 마치는 자리, 서도철의 “내가 섬세하지 못했다.”는 자기고백은 사실상 울타리 너머로만 사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한 형사의 자기고백이면서, 나이가 들어 노쇠해진 시력의 한계를 묘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프렌차이즈로서 앞날을 내다보지만, 시야가 선명하지는 않다. 여기서 길을 헤쳐나가는 건 노익장의 경험이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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