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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03. 2024

공유된 환상, 낙관하지 않는 희망

<조커: 폴리 아 되>(2024)


“조커는 환상 속의 존재입니다.” 법정에 선 아서 플렉은 여러 번의 공방 끝에 ‘조커’임을 포기한다. 사람들이 바라는 존재가 아닌, 아서 플렉으로 남고자 한다. 스스로 조커의 정체성을 포기한 그에게는 지지세력의 온갖 야유가 쏟아지는데, 어떤 면에서는 ‘환상’을 스스로 깨트린 연예인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가령 아이돌이 연애를 하지 않거나 사실을 구태여 숨기는 건, 아이돌 산업이 팬덤을 상대로 한 다자연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명만이 환상을 독점할 수 없고, 이를 어길 때에는 도리어 환상의 주체였던 연예인을 공격하기도 한다. 아서의 상황도 유사하다. 아서에겐 무죄를 받기 위해 조커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변호인이 있다. 아서는 어느 때에 으스대기도 하나, 그를 향한 관심은 ‘아서’가 아닌 ‘조커’를 향한 것일 뿐이라고 변호인은 말한다. 아서는 처음에 이를 부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보아주길 원한다. 그래서 변호인의 주장이 틀렸다고 여겼고 심지어는 자신을 의도적으로 공격한 것으로도 여겼다. 그러나 변호인의 주장이 마음을 파고들며 내적인 환상을 현실이 파악하지 못한 불안으로 치환할 때 그는 점점 무너진다. 이 붕괴의 시작은 변호인을 해임하고 그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 법정은 모든 사람은 자기변호의 권리가 있다는 명목하에 그의 주장을 수용하지만, 이미 통제를 잃은 현실에 포함되지 못한 그는 여전히 한 세계가 무대에 속한다고 믿는 광대에 불과했다.


영화의 부제인 폴리 아 되(Folie à Deux)는 공유 정신병을 뜻한다. 이 제목은 아서의 ‘조커’가 사회 전체의 망상으로 번지는 모습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사실 하나를 지목한다. 공유 정신병은 두 사람이 서로 가까운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고 이를 따라 서로를 분리하는 게 일차적인 해결책이다. 그렇지만 고담시의 언론은 아서 플렉의 범죄를 두고서 “사회 복지 시스템의 오인이라던가 부적절하고 현실에 조응하지 못하는 정책”과 같이 표현한다. 이는 1편의 도입부가 보여주듯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고담시에서 아서 플렉의 유년기가 얼마나 불우했는지를 상기시킨다. 방임 가정으로 돌려보내진 ‘고아’ 아서 플렉과 고담시가 시스템으로 얽혔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둘 사이에 공유 정신병 관계를 성립시킨다. 보통은 아서 플렉의 정신병이 고담에 옮았다고 생각하지만, 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담을 너무나 사랑했던 아서가 고담과의 공유 정신병 관계에 들어섰다고 가정해보자. 군중이 ‘조커’에 열광한 건 이 환상이 고담시가 축구해온 결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한 사회가 쌓아올린 병폐가 빠른 속도로 무너지는 것은 ‘조커’ 아서 플렉이 계단을 내려오는 리듬만큼이나 경쾌하다. 1편에서 영화는 올라가는 것은 고되고, 내려오는 것은 흥겹다는 쉬운 비유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단순히 아서가 자기 삶을 놓아버린 일이 아니라 한 사회가 정신의 ‘상태’를 공유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부모를 잃은 것은 아서만이 아니다.


작품이 보여주지 않지만, 생각나는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출발해보자. 아서 플렉이 있고 할리 퀸젤이 있고 하비 덴트가 있다면, 이곳에 배트맨이 없을리는 없다. 그리고 배트맨은 부모의 죽음으로 고아가 된 게 자경단으로 활동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영웅이다. 원작에서 배트맨은 숱한 추락에서도 살아 돌아오거나 또는 추락 자체가 부활의 계기가 되곤 한다. 또한 배트맨은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다른 누군가 곤경을 겪지 않도록 사회 안전망 복구에 힘쓴다. 요약하면, 그는 스스로의 일어섬에서 한 사회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는 인물이다. 물론 아서 플렉의 <조커> 시리즈에 배트맨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배트맨과 조커를 다루는 미디어 프렌차이즈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사회 전체를 대비하는 요소였다는 점을 고려해볼 만하다. <배트맨>의 불살이 자기 죽음도 각오한다는 점에서 ‘모두를’ 죽이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조커>의 타살이 자기 죽음을 각오하지만 정작 이를 성취하지 못한다는 점과 대비된다. 즉, 양쪽 모두 바라는 것에 ‘자기’의 위치가 빠져있고 이는 ‘자기’가 지정학적으로 분리된 장소임을 보여준다. 이를 따라 생각하면 <조커>는 고아가 된 소년과 이를 보필할 사회 시스템의 부재를 지적하는 다큐가 아니다. 영화는 오히려 아서와 고담시를 분리된 존재로 바라보며, 이들 간에 공유 정신병이 발발하는 일에 당위를 부여한다. 오직 타자 간에서만 질병이 전파될 수 있고 또 오염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해볼 법한 말은 영화란 결국 타자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영화가 그럴듯한 환상을 보여주더라도 영화에 살 수는 없고, 또 그게 우리 현실이 될 수도 없다. 도리어 영화는 우리가 품은 희망이나 절망, 그 환상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부수면서 현실을 더 충실하게 살아가게끔 한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할리 퀸젤이 부른 “Get Happy”는 주디 갈랜드가 부른 곡으로, 그녀는 유년기에 <오즈의 마법사>에 출현한 후 삶이 달라졌다고 고백한 바 있다. 영화 <주디>에서도 잘 묘사하지만 <오즈> 촬영 당시 현장 여건이 그리 좋지 않았다. 영화가 환상의 나라를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연기자는 위험물을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다루고, 아역배우인 그녀를 학대에 가깝게 방치했다. 그녀에게 ‘오즈’는 영화 안에서만 존재하는 환상이었고,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관객에게 잘 먹혀들어갔을지는 몰라도 정작 그녀는 유년기의 연기만을 기억하는 언론에 시달리며 평생을 ‘도로시’로 살아갔다. 아마 주디는 대중이 아는 ‘도로시’와 학대의 현장 기억이 남은 ‘주디’로 자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도로시가 그 자체로 사람들의 오즈랜드 판타지를 반영했기에 주디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도로시라는 이름에 삼켜져야만 했다. 다시 말해 주디가 평생을 짓눌려 살았던 건, 자신이 찍었던 영화가 현실보다 더 비대해진 채로 자기 삶을 삼켰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즈랜드에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정작 집이 어딘지를 잊어버리게 됐다.


<폴리 아 되>의 아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아서는 어느 순간 사람들의 옹호가 아서를 향한 게 아닌, 조커를 향한 것임을 깨닫는다. 전작에서 아서가 잠시 오즈랜드로 여정을 떠난다면, <폴리 아 되>에서 아서는 교정시설에 갇혀 오즈랜드를 바라보는 처지에 놓인다. 오즈랜드는 관객에게 판타지를 제공하지만 정작 이에 소속될 수는 없으며, 그럼에도 상호 간에 환상을 전파한다. 하지만 환상은 그 자신이 바라보아지는 위치에서만 비로소 한 사회에 종속변수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홀로 된 인간은 고립계에 있는 사회와도 같아서, 서서히 말라갈 뿐 자결할 수는 없다. 환상이 깨어지려면 결국 자신의 삶이 나락에 떨어지는 일을 감수해야 하므로 당장에 날개를 달지 못한 것은 삶을 위해서라도 환상을 유지하게 된다. “도대체 왜 죽지 않는거냐!”라고 하고 싶을 정도의 이 의지는, <폴리 아 되>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서는 전편에서도 그렇지만 거의 매 순간을 죽고 싶어하지만 끝내 성공하지는 못한다. 그는 대부분의 환상 속에 노래를 부르고 또 환상을 속여 자기를 삼킨다. 그렇지 않으면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밀거나 혹은 타인에 의해서라도 그리되기를 바란다. 이 장면들은 환상 속에서라도 죽음을 꿈꿨다기보다는 도리어 자기를 죽임으로써 한 세계를 죽이고자 했던 것처럼 보인다. 모두가 환상을 경험한다면, 도리어 서로가 떨어져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연대를 증명하는 방법이 될 테니 말이다.


아서가 살아가는 고담시도 그렇다. 고담시를 다시 살려놓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고담시는 점점 부패하지만 썩어 문드러진 신체를 부여잡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셈인데 여기서 아서와 고담시는 한 환상에 의해 서로를 부여잡거나, 혹은 부여잡혀 있다. 아서를 정신병자와 일반인으로 바라보는 건 정말로 한 끗 차이에 불과하고 반대로 말해 이곳의 사람들은 누구나 조커가 될 가능성을 안고 살아간다. 공유 정신병의 관점에서 아서와 사회가 어떠한 환상을 공유한다면, 필요한 것은 그저 전염이 촉발될 계기일 뿐이다. 여기서 우린 선택의 기로에 선다. 고독한 서로에 공감이나 연민을 표하는 법이 집단 광증에 물드는 일이라면, 이런 정신병증은 그나마 긍정할 만한 게 될 수 있을까. 한 개인의 망상이 치유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이 사회도 치유될 수 없다. 물론 죽는 것보다는 간신히 살아있는 게 더 낫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한 세계가 탄생하려면 필시 다른 세계를 죽여야만 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아서 플렉의 사망과 어느 한 수감자가 조커로 변해가는 모습을 겹친다. 조커는 고담시가 보유한 환상이었고, 영화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망고한다. 점점 더 자기를 풀어가는 이 모습에서 우리는 아무런 것도 아닌 존재와 진정한 환상은 없다는 한 격언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죽지 못해 산다면 이들을 부여잡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망상이다. 공유된 환상, 상황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낙관하지 않는 희망은 광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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