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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16. 2024

인간의 조건은 뼈와 제로

<기생수: 더 그레이>(2024)


드라마의 서사가 마무리되는 시점, 최준경(이정현)이 남일군의 마지막 기생생물을 타격할 때 그녀는 겨누었던 총부리를 거둔다. 작중에서 ‘변종’으로 불리는 정수인(전소니)을 두고서 한 이 선택은 그녀가 ‘생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했음과 동시에 연상호의 메시지를 전한다. 주위 요원이 “정수인은 기생생물이 아닙니까?”라고 묻자 최준경은 “아니, 정수인은 보통사람이야.”이라고 말하는데, 생각해보면 굳이 ‘보통’이라는 수사를 붙일 이유가 없음에도 이런 말이 첨언된 것에는 연상호의 입김이 있어 보인다. 연상호는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에서 <부산행>과 <지옥>에 이르기까지 어딘가에 소속되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 연상호의 영화에서 인물은 어딘가에 소속되지만 정작 그 집단의 형태에 자신이 어긋나는 일을 경험하곤 한다. 가령 <돼지의 왕>이 학교가 무대라면 <사이비>는 교회가 주된 권력이고, <부산행>과 <반도>, <지옥>은 큰 틀에서 생존집단과 관련 있다. 이들 영화에서 ‘생존’은 본격적인 삶의 추구대상이나 지향점이기보다는 가만히 있었는데 남들이 다 죽고 나서 남겨진 일에 가까워서,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보다는 생존자의 콤플렉스에 더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사회학적 플롯이 경쟁 사회를 다룬다면 연상호의 플롯은 대개 ‘적자생존’에 치중하는 듯 보인다. 살아남은 이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서 생존의 이유를 찾아야 하며 이와 같은 탐색의 과정은 큰 틀에서 자기의 존재 이유를 고찰하는 일로 나아간다. 


설경희(윤현길)가 정수인을 돕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녀가 남겼던 존재의 이유에 대한 고찰이 도드라진다. 설경희가 “인간은 이런 걸 배신감이라고 하나.”라고 말하고 나면, 이어지는 플롯에서 권혁주(이현균)는 “우리에게 내려진 명령[인간의 머리를 차지하라]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라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동족을 배신한 권혁주의 입장에서 설경희는 동족이기보다 부품에 가깝다. 바꾸어 말하자면, 기생생물로서의 의식에서 주류가 되는 부분은 생물이 아니라 기생이 되었으며 단지 어느 곳에 기생하는지만 다를 뿐이다. 그래서 이 서사는 사건이 일단락되고 난 후 하이디의 전언으로 이어지는데, 그녀는 “네 일부가 되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이상한 반복, 작중에서 인간 설경희는 뇌종양 환자였던 상태로, 빗대자면 원치 않은 게 머릿속에 기생하던 상태다. 그렇다면 설강우(구교환)가 설경희를 바라보았을 때 ‘기생’은 얼추 두 가지 맥락을 지닌다. 뇌종양이나 기생생물, 물론 후자는 전자를 포함한 인간 설경희의 머리를 잠식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기억은 이어나간다는 점에서 생존으로는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작의 의견을 따르자면 기생생물이 잠식한 몸에서는 인간의 아이가 태어나기에 ‘종’으로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게 이런 기생 구도의 핵심이다. 단순히 유전자를 보전하는 것만으로는 인간의 관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원작의 캐릭터인 타미야 료코는 기생생물의 입지에 관해 “번식도 할 수 없고, 인간의 머리를 차지하라는 명령을 따르지만 정작 인간이 없을 때는 인간이 될 수 없는 이상한 생물”이라고 평가한다. 그 말인즉 기생생물이 인간을 지배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기생한 인간들로만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머리’의 효용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녀는 고토를 통해 머리만으로 이루어진 군체를 실험하지만 이는 실패로 끝나고, 작품은 ‘오른손이’와 ‘죠’와 같은 공생체를 조망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를 이어받은 <더그레이>의 정수인을 살펴보면, 두 작품 모두에서는 ‘머리’가 ‘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전개가 나오는데 이로 인해 이들은 머리를 갈아타는 능력을 상실하고 생존을 위해 몸체를 지켜야만 하는 입장에 선다. 군체였던 고토가 허망하게 무너진 게 개체의 생존의식이 머리의 통제를 초과해서였다면 반쪽이들에게서는 그런 일이 불가하다. 작중 설경희가 지적하듯, 반쪽이는 몸을 옮겨 다닐 수가 없으므로 본체를 지켜내야 하기에 물러설 곳이 없다. 즉, 반쪽이에게 신체는 대체불가한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 존재의 근간이 된다. <더그레이>가 제안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체 불가능성인데 가령 고아인 정수인이 가진 트라우마는 자신이 ‘있을 곳이 없다는 것’으로, 작중 내내 혼자가 되는 일을 경계하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을 구해준 경찰인 김철민(권해효)에 대한 애착으로 이어진다. 


김철민의 사망과 얽힌 마지막 사건이 끝나고 나면, 하이디는 정수인에게 “슬픈 기억이든 기쁜 기억이든 물러설 곳이 없다면 싸워야 하며 그렇기에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에게 기생하게 된 걸 정말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는 취지의 말을 전한다. 앞서 김철민이 설강우를 설득할 때 했던 말이기도 한 이 대사는 “막다른 곳에 몰린다면 싸워야만 한다”라는 취지를 정 반대로 바라본 것이기도 하다. <오징어 게임>의 시작이 “여러분은 막다른 곳에 몰려 이곳에 오게 됐다”라는 걸 떠올려보면 <기생수> 시리즈의 반쪽이들에게도 ‘신체’는 기생체가 더는 도망갈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걸 명심하자. 일반적인 기생체들에게서 생존의식이 집단의 머리를 차지하라는 쪽으로 발현된다면, 이는 직장인이 승진하거나 하는 식의 자아를 실현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인다. 그러나 반쪽이들에게는 신체가 바로 전장이며 어떤 면에서 이는 존재의 인정 투쟁을 가리킨다. 가령 작품에서 설강우는 정수인의 비효율적인 선택에 의문을 표하는 설경희에게 “산다는 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설경희와 하이디는 그레이팀에게 협조하려는 정수인에게 비이성적인 선택을 하지 말라고 권유하지만, 설강우와 정수인은 ‘인간’으로서 남아있기 위해 이런 선택을 한다고 말하면서 부품으로 남기를 거부한다. 부품은 집단의 필요에 의해 제조되므로 틀 밖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지만 인간은 형태를 초과하는 존재이기에 정해진 것 이상으로 변형될 수 있다. 


변형에 대해 생각하면 기생생물의 원형은 감염시킨 개체의 얼굴을 따라간다는 걸 떠올리게 된다. 만약 권혁주가 자신의 얼굴을 타인의 것으로 변형할 수 있었다면 구태여 시장을 노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즉, 어떤 점에서 기생생물은 외피에 가두어진 존재이며 이는 종족으로서의 한계를 대변하기도 한다. 기생생물이 지닌 뚜렷한 한계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상으로 나설 수 없다는 점이다. 반면 인간은 개체로서는 한계가 있지만 그런 개체의 외부에 나섬으로써 주어진 것 이상을 해낸다. 중간에 삽입된 개미군락의 인서트 쇼트는 작게는 군체의식에서부터 크게는 개체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를테면, 타격팀장과 그레이 팀 전체의 입장은 서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들은 서로 같은 목표를 추구하며 이러한 동상이몽은 작품을 끌어가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집단의 의지는 개인을 넘어 존재할 수 있을까? 답하기 쉬워 보이지만 이따금 시대의 한계를 초월하는 인물이 나온다는 점에서 답변은 재고되어야 할 것 같다. 기생생물들이 정수인을 변종으로 지적하는 가운데, 집단의 의지를 거스르는 일은 이례적인 일로 취급되며 이를 원작의 의견을 따라 ‘지구의 암’을 솎아내는 일로 본다면. 끝내 공생에 이르는 이 결말은 면역계의 반응과 그에 따른 항상 작용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항상은 체내 평형을 유지하려는 유기체의 성질인데,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신체로 본다면 항상이란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는 일을 가리킨다.


자기로 돌아가려는 힘을 두고서 우리는 항상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경우 무엇을 자기로 볼지와 같은 문제가 남는다. 가령 설강우는 정수인과 하이디를 구분하는데 이는 둘이 서로 다른 인격이어서다. 어떤 작품에서는 기억을 잃어도 외관이 같으면 같은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에 반해, <기생수>에서는 외관이 같더라도 같은 사람으로 대하지 않으며 되려 ‘신체강탈자’라는 다소 원색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기억이 어떤 일을 기회 삼아 증발하거나 상실되거나 한 게 아니라, 멀쩡히 잘 살아가던 인격을 새로 대체해 들어왔다는 점에서 ‘강탈’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대체’라는 표현은 <더그레이>를 이해하는 일에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데 무언가를 대체하기를 명령하는 것은 회사와 같은 집단에서 관리자의 역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관리자는 회사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며 이 과정에서 ‘자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배제된다. 다시 말해서 신체를 운영하는 것이 머리라고 볼 때, 우리는 자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몇몇 것을 저버린다. 이 과정에서는 예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더라도 실질상으로는 더는 자기가 아닌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더그레이>는 이와 같은 면을 두고서 인간의 가치로 부른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인간의 조건’이 뼈라면, 기생생물의 엑스레이 사진에 묘사된 ‘제로’는 인간의 가치가 뼈 위에 덧대어지는 일이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머리에 기생한 뇌종양을 제거해야만 보통 생활을 영위할 수 있듯이 관리자는 생존을 위해 자신에 기생한 것을 잘라내야 한다. 생물로서 살아가는 일은 머리(H.Q)를 차지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이 입장에서 ‘머리’는 제거를 위한 자리다. 이를 보여주듯 작중에서 ‘머리’는 몸이 잘려도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고 이런 기생행위 자체가 일종의 마왕 같은 인상을 준다. “크아악.”하면서 다시 돌아온다고나 할까. 원작과 마찬가지로 신체의 일부와 집단의 내부는 작품을 관통하는 주된 설정인데 그런 점에서도 기생생물을 솎아내는 작업은 어떤 점에서 인체가 건강해지기 위해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작업에 빗대어진다.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처럼 인간을 지구의 암 덩어리로 보기보다는 기업인의 입장에서 진행하는 구조조정에 더 가까운 인상이다. 가령 전혀 다른 성질의 두 개가 하나의 몸체에 공존해야 하는 상황은, 연상호가 즐기던 ‘사회나 집단 안에서 개인의 괴리, 혹은 그 부정교합의 고통’에 부합한다. <기생수>는 주인공 시점에서는 ‘반쪽이’나 ‘변종’이 된 자신에 대한 고민을 다루지만 반대편에서는 ‘집단에 숨어든 위기’를 색출 및 통제해야 하는 관리자의 고충이 있다. 쉽게 말해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다. 경찰조직이 건실하려면 내부의 부패자를 해고해야 하고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기생생물을 색출해야 한다. 권혁주의 말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생생물조차 모두가 죽기 때문에 기생생물로서도 이는 필요한 구조조정이다. 


 어쨌거나 이 대목에서 머리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개체를 눈여겨보는 일은 중요한데, “인간이 ‘자기’의 일부이기에 지킨다”라는 대목은 단순한 기생 관계에서 공생 관계로의 전회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최준경이 정수인을 지칭하며 사용한 ‘보통사람’이라는 용어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출마 슬로건이었다는 걸 떠올리면 ‘머리’를 차지하는 사투를 다루었던 <서울의 봄> 같은 근작이 떠오르기도 한다. 전두환의 쿠데타를 다루는 이 영화에서 전두환은 하나회의 머리에서 대한민국의 벙커로 자리를 옮기는 기생생물이며 그는 군부가 없으면 더는 생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억과 뼈를 맞바꾼 듯 보인다. 혹자는 한국의 군부정권 시절은 어떠한 사회적 개혁이나 발전을 위해 필요했다고도 보지만, 마찬가지로 정수인은 자신이 원치 않은 기생을 당한다. 인간으로서 이는 일종의 질병처럼 여겨지며, 신체를 마치 자동차처럼 여길 뿐이라는 기생생물에게 신체는 운송수단일 뿐 존재의 이유는 아니다. 그래서 이 보통사람이라는 표현은 비록 텍스트를 초과해 외부를 끌어 들인다하더라도 마치 기생생물처럼 <더그레이> 안에 비집어 들어오는 것만 같다. ‘반쪽이’라는 표현에 파고드는 이 의문은 사회의 외부를 환원한다는 점에서 외부성을 지시하는 듯한 면이 있다. 태어나서부터 존재에 질문을 던지는 기생생물의 모습은 결국 신체가 자아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외부성의 문제로 자기 환원된다.


<기생수: 더 그레이>는 적자생존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원작의 이야기를 정확히 이런 방향으로 틀어놓았다는 점에서 연상호의 작품이다. 연상호가 제안하는 생존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경쟁’이나 ‘생존’은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사회에서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고 이를 따라 관리자로서는 ‘누가 기생생물인가’를 묻는 일이 중요해진다. 집단이 생존하려면 효율이 떨어지는 구성원을 적절히 ‘처리’해야만 장기적인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원작에서 칼날의 형태로 묘사되었던 기생 생물의 무기가 촉수에 가깝게 변형된 걸 두고서 불호의 입장을 내치지만, 관리자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잘라낸다’라는 행위를 보고 있는 게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기생생물과 인간의 차이 중 하나가 바로 감정이라는 걸 떠올려보자. 관리자도 누군가를 해고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최대한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아 하며 이와 같은 원만한 해결 방법이 바로 던지거나 하는 식의 간접 요법이다. 가혹한 환경에 대상자를 부서 이동시키거나 하는 식으로 퇴직을 종용할 수 있으며 관리자로서도 이런 편이 최대한 피를 묻히지 않아서 좋다. 무엇보다 총을 쏜다는 의미에서 샷(Shot)이 영화에서의 쇼트로 이어지는 과정은 발포(Fire)라는 말이 해고하다와 같은 발음을 공유한다는 점을 ‘연상’케 한다. 어떤 인연은 잘라내도 줄곧 달라붙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걸 두고서 운명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숏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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