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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23. 2024

배우의 입장에 ‘선다’라는 것

<닭강정>(2024)


현대 사회를 관통하는 단어를 하나 꼽는다면, 개인적으로는 ‘가성비’를 꼽고 싶다. ‘가격 대비 성능’이라는 말을 줄인 이 단어는 소위말하는 ‘요약’ 문화와도 연관된다. 가령 영화에서 한줄평은 영화를 선택함에 있어 후회가 없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2시간 남짓한 시간을 가만히 앉아있어야 한다는 이 사실 자체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는 원하지 않은 정보를 겪기도 하는 나머지 정말로 필요한 정보만을 얻고 싶어한다. 알고 싶지 않은 정보가 바이럴되는 세상에서는 TMI 같은 단어가 유행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바이러스의 범유행으로 인해 ‘바깥’으로 나설 수 없게 되기도 한다. 특히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의 범유행은 ‘넘쳐난다’라는 말과 ‘텅 빔’이라는 말이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바이러스가 넘쳐나기 때문에 거리는 텅 비어있었다는 점은, 마치 지구 최후의 날처럼 모든 시간을 멈춰놓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빠르게 접근할 수 있게끔 정보를 요약하는 행위는 오히려 점점 귀중해지는 순간들에 관한 한 가지 집착인 것처럼 보인다. 짧게는 영화를 추천해주는 서비스의 부흥에서부터 길게는 ChatGPT 등의 서비스에서 이루어지는 한줄요약까지, 이러한 추천 서비스는 정보를 효율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중점을 두는데 여기서 배제된 건 ‘운명 같은 만남’이다. 점점 더 체계화되는 계산식 안에서는 ‘운명’ 같은 만남이 ‘우연’을 내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예측가능한 것으로 탈바꿈하는 알고리즘 사회에서, ‘장르’는 ‘예측가능성’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되어버려서 오히려 우리 자신을 예측하게 하는 ‘거울상’이 된다. 


넷플릭스에서 런칭한 이병헌 감독의 <닭강정>은 ‘닭강정이 되어버린 딸’이라는 문장으로 간략하게 요약된다. 한줄로 요약되었을 때 특색이 잘 드러나는 이야기가 ‘좋은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애초에 말이 안 되어 보이는 이 문장은 어느 정도 감독의 전작에 기대는 듯 보인다. “잠복수사를 위해 개업한 치킨집이 생각보다 잘 된다.”라는 <극한직업>의 사례에서도 그러하듯, 두 작품 사이에는 ‘먹을 것’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며 무엇보다 음식으로 치면 ‘가성비’가 좋은 음식에 속한다. 왜냐하면 치킨이나 닭강정은 비교적 맛이 보장되는 식품이라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쉽게 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성비’라는 표현을 ‘맛’에 대한 예측 가능성으로 이해한다면, 드라마든 영화든 간에 ‘식사’를 했을 때 이것이 ‘맛있다’라고 느껴질 법한지는 온전히 ‘자기’와 관련되는 것 같다. 어떠한 ‘자기’에도 도달할 수 있는 이런 취향들은 명실상부 ‘자기’를 넘어선다. 그리고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자기를 초과해 존재하는 취향들에서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운명을 만나기란 힘들다. 모든 취향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예측이 뒷받침된 결과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취향은 ‘운명’을 내포하지 않는다. 오히려 취향과 운명은 서로 동등한 관계에 있으므로 취향을 가진 존재는 운명을 마주하는 게 아니라 그런 운명과 대결한다. 예컨대 취향이라는 말은 장르의 하위속성이 아니며, 개인은 어떠한 선택을 하도록 예비된 존재이기보다 이미 선택된 예비에 더 가깝다. <닭강정>은 그런 의미에서 운명과 대결하는 쪽에 속한다. 모든 사람에게 다가서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에 속해있다.


<닭강정>에서 인상 깊은 대사 중 하나는 작품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나레이션이다. 닭강정 상태에서 홀로그램으로 현실에 등장한 최민아는 선택을 앞둔 고백중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한다. “닭강정으로 보내는 5일과 인간 세계에서 보내는 50일”의 가치를 줄저울하는 이 장면은 어떤 면에서 20분으로 분절된 드라마의 10개화와 2시간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영화를 연상케도 한다. 치료를 위해 외계인 별로 가는 것을 택하는 민아에게 닭강정으로 살았던 4일은 외계인 행성에서의 하루에 해당한다. 반면 민아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외계 행성의 하루는 지구에서의 50년에 해당한다. 드라마는 외계 행성과 지구 간에 시간이 세부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말해주지 않지만, 이때 우리가 떠올려보아야 할 건 영화 내내 민아가 조연으로만 등장하면서 관객의 시점을 대변한다는 점이다. 닭강정 내부에 갇혀버린 것으로 묘사되는 민아는 사실상 드라마의 설정 안에 가두어졌다는 점에서 이러한 설정을 이미 전제하고서 관람해야만 하는 관찰자의 지위에 선다. 드라마의 초반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인터스텔라>의 패러디 장면은 우스꽝스럽게도 드라마의 결말에 가면 이것이 일종의 복선이었다는 점을 예견한다. 한편으로는 이야기의 전개에 관한 관객의 불만족의 표시이기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이 경우 드라마는 운명과의 대결을 선보이는 게 된다. 즉, 이미 선택된 예비로서의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몫을 따른다. 마찬가지로 장르가 우리 자신에게서 이미 실현된 어떠한 면모를 담고 있다고 가정할 때, 이것은 운명이기보다 취향에 가까워진다. 


이야기에 우여곡절은 있지만, <닭강정>은 웹툰을 드라마로 정직하게 옮긴 실사화의 산물이기보다 ‘닭강정’으로 보내는 시간들에 관한 하나의 사고 실험에 가까워 보인다. 코미디 장르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대개 행복한 결말에 속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작품의 결말은 명실상부 ‘원래대로’일 것이다. 그리고 이 ‘원래대로’는 영화를 보기 시작한 이래로, 영화가 끝났을 때는 다시금 영화가 시작했던 때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나쁘게 말하면 영화를 보는 동안은 죽은 시간이나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일종의 가사 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경험은 엄밀히 말해 현실을 살아가는 것으로는 볼 수 없으며, 이러한 점에서 <닭강정>의 기계는 영화관람의 한 형태처럼 보인다. 닭강정으로 사람이 변해버렸다는 사실 자체보다 중요한 건, 이러한 사실에 이야기가 달라붙음으로써 정작 사실 자체는 아무런 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은, 아무런 것도 아닌 관객이야말로 영화에서 이야기를 수집하는 장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작품에서 기계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 자체가 다른 인물이 된다(being)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점인데, 영화는 관객의 현존 양식을 바꾸지 않고서도 일시적으로 타인이 되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회귀나 빙의, 환생 같은 웹 콘텐츠의 양상에 효과적으로 부합한다. 이른바 영화에서 배우의 문제는, 그러한 배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보다 그러한 배우의 입장에 ‘선다’라는 것에 가깝다. 


‘축약’은 시간에 대한 효율성에 중점을 두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는 극단적으로 제거된 기회 안에서 발흥한 것이기도 하다. 시작에서 끝으로 이동하는 콘텐츠의 한 형태에서 우리는 극단적으로 제거된 선택을 발견하고, 이는 조금이나마 닭강정으로 변하는 일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에 대한 이해의 단초가 된다. 예측가능성을 넘어서는 것은 이야기와 사건에 대한 축약에서 개인의 선택을 따른다는 것, 선택을 잘못하면 곧바로 나락으로 가고야 마는 세상에서는 ‘단 한 번’의 선택이야말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순간의 선택이 나머지 전부를 책임지는 상황에서 ‘한줄’은 단순한 시간의 통용인 것만이 아니라 안과 밖을 뒤집는 ‘순간’에 더 가깝다. 그러한 점에서 <나락쇼>와 같은 예능 포맷이나 <오징어 게임> 같은 드라마투르기의 범유행은 이 시대를 에워싼 전조들에서 ‘판데믹’의 기후를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를 보며 타인의 입장에 서는 일은 오히려 다시금 자기에로 귀결되기에 윤리의 실천적 형태가 된다. 타인의 입장에 ‘선다’는 게 점점 더 관음적으로 변해가는, 점점 더 빠르게 가속하는 현대 사회에서 ‘끝’은 ‘시작’을 내포하며 여기서 판단은 중지를 넘어선다. 왜냐하면 자기는 항상 중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바깥을 향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예고되어, ‘요약’은 모든 이야기를 끝내는 ‘순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고된 재앙 앞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메시아가 도래하기 마련이며 이는 곧 우리가 ‘시대의식’이라 부르는 것의 정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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