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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10. 2024

존재의 과잉에 대한 예비적 감정들


‘과하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과하다’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낼 수 있는 출력의 상한선 이상을 사용하는 일을 가리킨다. 과로라거나 과냉각이라거나, 또는 과잉행동장애나 광과민처럼 외부를 받아들이는 일을 고려해볼 수 있겠고 한편으로는 오버클럭이나 오버도즈처럼 여러 매체에서 사용되는 클리셰가 떠오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95년도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에바에 ‘폭주’라는 설정이 덧붙여져, 평소에는 이를 제어하고자 구속복을 입혀놓은 것일 뿐인 게 바로 에반게리온이라는 점이 밝혀진다. 설정상에서도 그렇지만 장르상에서도 메카물의 ‘오버’와는 거리가 있는데, 여기서는 임계점을 넘지 않도록 제어한다는 점에서 ‘과’하지 않게끔 평균을 유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치 원자력 발전 시대의 분위기를 가져온 듯한 이 설정에서 우리는 “언젠가 원자력은 인류를 멸망으로 몰고 갈 것이다”라는 불안을 엿볼 수 있다. 이를 따르자면 ‘오버’는 단순히 과잉의 맥락이기보다 “언젠가는 다다르게 될 결과나 시기”를 가리키는 것에 가깝다. 우주의 종말도, 인간의 파국도 모두 한 시기를 끝낸다는 점에서 ‘오버’라고 보는 셈인데 그런 점에서는 ‘오버클럭’이라던가 ‘과냉각’이라던가 하는 말은 마치 회복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과하다’라는 건, 소위 ‘선을 넘었다’라는 뜻에서 점점 더 개인화되는 사회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알고리즘이나 빅데이터와 같은 사회과학의 분과는 점점 더 개인을 추적하는 것에 특화되어, 이전이라면 블록 단위로 진행되었을 판매 전략 등에 영향을 미쳤다. 개인이 먼저 나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이 결코 자발적이지 않다고 보는 입장에서 ‘추적과 제시’는 일종의 선제타격처럼 여겨진다. 어딘가에 무언가가 있으리라고 보는 이 관점은 잠재적인 수요를 끌어내는 경제학적 관점과 유사해 보이지만, 오해로 점철되어 무고한 희생자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전쟁 비즈니스와 유사하다. 즉, 의도치 않았더라도 개인의 취향은 넓은 범주로 폭격당할 수 있다. 점점 더 자기를 표현하는 방식이나 수단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이들 사이를 이어주는 일은 그만큼 다양하게 연결될 수 있다는 점으로 인해 점점 더 사이 공간의 확대를 부른다. 과거에는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이 하나였기에 여기에 모든 목표를 고정하면 됐지만, 오늘날의 다각화된 분포는 우리가 하나의 생태계 일원임을 말해줄지언정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와 같은 출구전략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말하자면 ‘세계의 과포화’란 목표의 과잉 수행이 되려 성공의 조건을 제거해버리고야 마는 일을 가리킨다. 마치 동시다발적으로 연결된 인적 네트워크가 인재풀의 증대보다 혼잡도의 확산을 불러일으키듯 ‘가능성’은 단순히 긍정사로만 풀이되는 것만이 아니라 부정사로도 활용된다.


세계의 과포화. <듄>에서 퀴사츠 해더락인 폴은 모든 미래를 볼 수 있게 되어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빼앗기고야 만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가 명확한 상황에서 불확실하거나 비합리적인 선택지는 자연스레 배제되며 이를 따라 선택이라는 말은 이성과 합리성의 수순 아래 운명을 강제하는 요인이 된다. <듄>을 관통하는 이 주제는 마치 말뚝과도 같은 고정점에 관해, 이것이 미래를 향한 달성 수단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운명에의 속박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그저 수행하기만 하면 그만일 뿐이지만 반대로 여기서 신체란 영혼을 구속하는 과잉 실천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듄>의 모래 사구와 그 위에 올라선 폴은 마치 안팎이 서로 뒤집힌 존재인 것처럼 느껴진다. 사구에 오른 폴의 모습은 사막을 두고서 메마르고 건조한 폐허를 배경 삼은 게 아니라 반대로 그 자신이야말로 폐허라는 장소처럼 느껴진다. 폴의 목표는 자신을 희생해 세계의 멸망을 막는 것, 즉 안과 밖의 폐허를 교환함으로써 세계를 대신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다. <듄>의 원작 소설에서 폴은 자신의 아들을 통해 인류에게 예지력을 전파하며, 이를 통해 모든 인류의 운명이 파국으로 고정되는 일을 막는다. 마치 그 자신의 육신에 모든 이들의 기대가 걸려있었던 것처럼, 세계의 과포화에 가려진 바깥이 폐허로 변해가는 일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듄의 사막은 빈곤하다. 바꾸어 말하면 이미지의 빈곤을 겪는 이들에게서 폴의 등장은 단순한 메시아이기보다 의미의 고정점에 가깝다. 예언이라는 말을 의미의 표현 방법 중 하나에 빗댈 수만 있다면, 폴이 만들어진 메시아라 하더라도 이때의 거짓은 자기를 속이는 게 아니라 세계를 상대로 한다는 점에서 바깥의 벌려진 사이를 메운다. 스파이스를 통한 인지능력의 향상은 어떤 면에서 세계를 향해 열린 감각의 과잉 섭취이기도 하며, 이러한 충만함의 감정은 사이 공간을 죽은 공간으로 바라보지 않게 해준다. 무한히 열린 우주를 항해하면서 견뎌내는 방법이 본질상에서 인간의 운명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같다면, <듄>의 과포화된 세계는 더는 가능하지 않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회를 겪는 중이라고도 볼 수 있을 테다. 그러니까 ‘간극’은 폐허의 의미를 공백으로 사유하지 않도록 해주며 이는 바깥의 의미를 ‘비어있음’으로 바라보지 않게 한다. 이와 유사하게, 오늘날의 우리에겐 자신이 좋아할 게 너무 많다는 점이 아니라 좋아해야 할 것들 사이에서 폐허가 탄생한다는 점이 주된 문제로 부각된다. 자신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과정에서는 나머지 모두를 전적으로 싫어해야만 하는 밀어내기가 필연으로 동반된다. 여기서 조롱이나 혐오와 같은 감정은 무너진 것들 사이를 빠져나오려는 몸부림의 일환이 된다.


의미를 고정하는 쪽에서 메시아가 있다면, 반대로 의미를 풀어놓는 쪽에서도 메시아가 있다고 보면 어떨까. 세계가 점점 매끈해진다면 이런 와중에 ‘자기’란 어떠한 이질감이나 모순을 토대로 발설되는 하나의 ‘감정’인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건 가장자리를 아슬아슬하게 걷기만 하는 일이 아니라 쉴새없이 되묻거나 상상하면서 자기를 넘쳐 흐르게 하는 일이다. 사막의 프레멘처럼 스파이스를 오버도즈하는 일은 신체의 극단적인 움직임에서 포섭되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이러한 공백을 당김의 운동으로 탈바꿈시킨다. 따라서 ‘자기’를 감각하는 일에서는 신체가 하나의 정동으로 작동하는데, 이는 신체가 늘 어떠한 흐름 안에서 하나의 구분점이 되어주기 때문에 전적으로 감각에 앞서는 ‘실천’이 되기 때문이다. 과잉은 취향을 구획하기보다 모조리 확증 파괴해버리고, 그런 출력을 내고 난 후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영웅 서사의 일종이기도 한 것 같다. 영웅의 일상은 이어짐을 위해 끊어지거나 단절되며 그 끝엔 바깥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인’은 혹시나 생길 수 있을 삭제를 방지하고자 항상 세계의 극단에 자리하고자 하고 따라서 영화의 스펙터클은 그 표면이 매우 거칠어진다. 어떠한 분류 안에서 개인의 지위와 입장을 찾아내는 일은 그런 점에서 운명의 파열에 대한 불안과 고독, 존재의 과잉에 대한 예비적 감정들을 동반한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 산업의 블록버스터는 주류에 어울리지 않으려는 개인이나 힙스터를 양산한다. 오늘날 취향은 자기 존재를 특정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고립주의적 노선이라 볼 수 있다. ‘자기’란 세계의 가장자리에 자리한다는 점에서 신체를 아슬아슬한 경계로 밀어낸다. 과거에 취향을 주장하는 방법이 성을 쌓는 일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가르는 것, 이른바 영역전개가 중점이 된다. 어쩌면 그런 점에서 취향은 그 자체로 우리의 세계가 대피소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신체가 자기에게 세계의 가장자리를 구분하는 하나의 ‘지점’이자 ‘선’이라면, 여기서 ‘자기’란 바깥에서 대피해온 쪽이지 바깥으로 향하는 쪽은 아닌 것이다. ‘구분짓기’라는 말은 이제 계급적 차별화를 가리키는 것이기보다 알고리즘 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자기를 특정하는 것, 즉 ‘에러’ 값을 출력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꾸어 말하자면, 폐허의 한복판에서는 항상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그러니까 구분짓기라는 말은 자기를 에러로 인식하는 일이 어떻게 개인의 본질을 결정하는 일에 관여하는지를 설명한다. ‘자기’는 세계가 폐허로 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는 점에서 항상 소진된 존재이다. 이 존재는 더는 차이를 발산하지도 못하고 따라서 더는 새로워질 수도 없지만, 항상 개인의 자리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신체의 말단을 신경 중추로 끌어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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