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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07. 2024

넘어설 수 없지만, 넘어지지 않게도 해주는 것


<파묘>에 대한 감독의 공식적인 답변은 이것이 상처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트라우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었다는 그에게 선과 악은 중립적이며, 따라서 영화는 무언가에 반(反)하지 않는다. <파묘>는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야기일 뿐이다. 실제로 영화에서 등장하는 친일인물이나 사무라이 정령 등의 행적은 관객이 가치판단을 할 수 없게끔 그 배후 사정이 제거되어있다. 어떤 점에서는 마치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도드라지는 특징들의 기호적 조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즉, 인물의 사연을 배제하고 남은 키워드인 친일, 말뚝, 사무라이, 음양사 등의 키워드는 마치 만화나 드라마의 특징화된 공식처럼, <파묘>를 메인 히로인 한 명에 서브 히로인 하나,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자 주인공과 같은 부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게끔 한다. 이런 점에서도 자신이 장르물임을 숨기지 않는 이 영화는 다큐라기보다 드라마에 가깝고, 드라마이기보다는 예능에 더 가깝다. 비유하자면 [무한도전] 같은 방송 프로그램의 역사 특집 같은 부류라고나 할까. 이야기는 흥겹고, 인물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가운데 이들이 활동하는 무대에서 어떠한 기호를 찾아내는 일은 전적으로 관객의 흥미일 뿐이다. 


 인물의 개인사가 제거된 이 영화에서 인격은 사물과 동등하고, 그런 점에서는 사물에 영혼이 깃든다는 ‘정령’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정령은 영혼의 존재가 선험적이지 않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자연을 같은 지위에 두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영화를 단순히 현실의 재현일 뿐이라고 보는 일에서는 영화가 어떠한 영혼을 갖는 일이 불가능하지만, 사물의 기계적 움직임에서 포섭되지 않는 리듬 등을 목격할 때 여기서는 고유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 등이 대두하게 된다. 즉, 우리가 영혼이라고 보는 것은 다른 무언가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점에서의 ‘해체’이며 이는 개인사를 따로 두지 않는 영화의 설정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끔 한다. 배후사정을 제거하는 일은 대상을 기호화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본래의 의도와 어긋나거나 또는 오용될 가능성이 상시 존재한다. 설사 상처를 들여다보기 위해 주변의 오염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친다 한들, 기호란 상징계에 박힌 말뚝과도 같은 것이므로 의미의 고정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영화가 아무리 중심을 유지한다 한들, 풍수지리에서 말하듯 땅 자체가 기울어져 있다면 그 땅을 살아가는 것들은 모두 ‘정령’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영화가 다루는 소재인 쇠말뚝은 진위를 가리기보다 총이 발포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는 점에서 맥거핀에 더 가까워 보인다. 물론, 비유적인 의미에서다. 영화가 다루는 말뚝을 두고서 의미와 운명의 고정을 뜻한다면, 작중 인물들의 여정조차 어쩌면 영화가 이들을 다루는 한 가지 방식일 수도 있을 테다. 기본적으로 오컬트 장르의 특징 중 하나는 증상과 징후를 다루는 방식에서 이것이 하나의 분위기와 흐름이 된다는 것인데, 이는 사회로 말하자면 ‘시대정신’과도 같아서 작중 풍수사의 말처럼 “살아가는 이 땅을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그런 시대라고 가정할 때 여기에서만 비로소 통용되는 정신이 있기 마련이다. 정신은 시대라는 토양에 깃들어 생겨난 정령과도 같다. 시대정신은 단지 사람에게서만 비롯되지 않으며 어떠한 사건이나 사고, 사물이나 건물 등에서도 충분히 발견될 수 있다. 따라서 <파묘>를 상처를 말하는 영화로 보는 일은 정합성이 떨어지는데, 이때의 정신은 단순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실천을, 상징계의 질서에 우선하는 것으로서의 상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파묘>의 문제의식은 “상처가 실천이 될 수 있는가?”이다. 


상처는 실천이 될 수 있을까? <파묘>의 후반을 보며 느낀 것은 세월호에서 발현되어 판데믹을 거친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이었다. 영화는 개인의 역할을 줄곧 강조하면서 생존자의 지위이면서 관찰자의 지위인 ‘어른’의 입장을 강조하는데, 이는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에 팽배해버린 시대정신을 연상케 한다. 개인은 시대를 바꿀 수 없고, 정신은 육체를 초과해 선다는 것. 만약 영화에서 선보이는 첩장이 말뚝에 고정된 개인의 운명으로 보인다면, 이 운명은 시대를 초월해 살아남은 하나의 정신으로도 볼 수 있을 테다. 하지만 말뚝에 묶인 상징들은 사무라이 정령에 사로잡힌 인물의 행적을 한 명의 피해자로 보이게끔 하며, 이는 ‘친일’의 행적조차 개인의 욕망보다는 거대한 시대정신의 일부가 아니었을지를 추론케 한다. 친일 행위가 시대정신이라는 게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두고서 상처와 트라우마의 시기로 본다면 결국 그러한 상처 자체가 이들의 영혼을 ‘시대’를 넘어설 수 없게끔 속박해버린다는 것이다. 빗대자면 말뚝이 하나의 고정이 될 때 운명은 파국의 지평을 넘어서지 못한다. 마치 영화의 결말이 항상 특정한 지점과 순간에 멈춰 서듯 <파묘>의 말뚝은 시대를 넘어서지 못한다. 


<파묘>를 보며 세월호와 판데믹을 떠올린 건, 우리가 더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수명이 무척 짧지만 그럼에도 겪게 되는 몇몇 비약적인 사건이 있는데, 90년에는 IMF였다면 2010년대에는 아마도 세월호일 테고 2020년대에는 판데믹일 것이다. 가속주의자들은 세계의 가속을 두고서 위기의식의 발현보다 사건의 발생이 우선한다는 점에서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하는데, 아마도 이는 중력가속도의 단계적인 상승 과정에서 벌어지는 고정의 역할을 가리킨다. 그들에게 고정이라는 건,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이를 넘어설 수 없다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이들 덕분에 우리의 운명이 산발되지 아니할 수 있다는 한 가지 의식적 전회의 방법이다. 그러니까, 만약 <파묘>의 말뚝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가 출구 없이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만 있을 뿐이라고 보는 게 아니라 세기의 추락이 붙들어놓는 시대정신, 그중에서도 스모킹 건으로서의 영화의 역할과 의무인 셈이다. 영화는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해주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상처가 절대로 치유될 수 없다고 말하는 증거일 수도 있다. 


그러니 영화는 상처에 대한 어떠한 증명이나 공식이 될 수 없으며, 이때 그러한 영화를 넘어서는 일은 불가능하기에 되려 영화는 실천이 된다. 이런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판데믹을 생각해보고 싶다. <너와 나>를 보며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서울의 봄>이 역사적 사건을 남성성에 기대어 풀어내는 것과 동일하게 <너와 나>의 사건적 상처는 여성성에 기대어 풀이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점을 옹호의 지점으로 삼을지 비판의 대목으로 삼을지는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제 세월호는 사람들 사이에 남아있다기보다 이미 운명의 고정점 안에 속해있으며 이러한 소속감이 바로 공동체로서의 시대정신을 구성한다는 점이었다. 세월호 직후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생존에 대한 박탈감과 이에 따른 타의적 상실이었다면, 이러한 생존에서 잔존을 발견하고 상실에서 지평선을 발견하게 된 건 일종의 콜롬버스적 전회에 가깝다. <너와 나>의 감정선은 바로 그러한 감정을 두고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작업이었으며 이러한 가정에서는 <파묘>의 구성들과 마찬가지로 ‘도드라지는 특징들의 기호적 조합’이라는 의구심을 피해 가기 힘들다. 


<너와 나>에서 중점이 된 건 동성애 코드로써, 시대를 말하고자 인물을 사용했든 아니면 그 반대든 간에 이들 간에 놓인 말뚝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기란 힘들다. 그럼에도 <너와 나>의 구성은 사건으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현시점에서, 이것이 한 가지 전회를 이루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어쩌면 <너와 나>를 두고서 세월호를 오용한 게 아니겠느냐고 묻는 일은 우리가 말뚝을 두고서 개인의 한계로 지정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세월호는 이제 극복의 대상인 사건이기보다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무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판데믹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판데믹에 대한 생각 중 하나는 그것이 우발적인 사건에 불과함에도 어쩌면 우리의 운명이 명시적으로 드러났을 뿐인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꽤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세월호가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을 단지 드러냈을 뿐이라고 보는 입장에서 판데믹 또한 우리 시대의 한 징후에만 불과할 수도 있다. 이른바 사건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서 인식되었던 것은, 사실 상처받은 몸을 두고서 감정을 앞질러 존재하는 실천으로 여기려 하는 우리의 마음 탓이었을 수도 있다. 


기후변화와 판데믹과 같은 전지구적인 재앙이 단지 교과서의 과학적 추론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뉴스를 넘어선 실천이 되고 말았을 때 사람들의 삶은 마치 영화처럼 속박된다. 세계의 가속은 우리의 삶이 하나의 무대 위에 올려져 있다는 점 말고도 지평선 너머에 대해 말해준다. <파묘>의 말뚝은 바로 이 지평선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넘어설 수 없지만, 넘어지지 않게도 해주는 것. 영화에서 ‘오컬트’ 장르가 갖는 매력은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에 대한 인식을 영화가 진행되는 무대 위로 옮겨둠으로써 파멸의 감정을 환락의 정치로 작업하는 힘이다. 환락의 우인들이 현실을 사로잡을 때 영화는 긍정을 넘어 자기를 내보인다. 모두의 삶이 하나의 운명으로 얽힐 때 우리는 이런 운명 너머를 상상할 수 있을까? 영화와 운명처럼 엮이던 시대라는 브로드웨이의 풍경은 모두가 서로를 연기하고만 있을 뿐인 게 아닌지 생각하게끔 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시대정신 안에서는 모든 정신이 거짓이며 육체는 그저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파묘>를 두고서 상처에 관한 이야기로 바라보는 일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닌, 해결되어버린 것과 헤어져야 할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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