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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13. 2024

모든 생명은 내일을 위해 깊은 잠에 빠진다



나에게는 웹툰 <닥터 프로스트>의 4부가 유독 기억에 남아있는데, 다루는 내용이 인물의 한 사연에만 불과하지 않고서 더 큰 영역의 무언가를 건드려서가 아닐까 싶다. 가령 2020년대를 전후로 각각의 매체에서는 혐오의 양상이나 전개, 사례를 다루는 일이 늘어났고 <닥터 프로스트>도 개중 하나였다. 1부에서 3부까지가 주인공인 백남봉의 이야기를 다룬다면, 4부는 [역전재판]과 마찬가지로 ‘후속작’으로서의 주인공 변경이 이루어진다. 백남봉이 스승 포지션으로 밀려나고 나면, 제자인 윤성아가 새로운 주역이 되어 극을 이끌어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이 겪었던 업적만이 아니라 과오를 상기시키는데, 이때 ‘혐오’는 백남봉이 억눌렀던 감정으로 등장해서 윤성아를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 백남봉은 윤성아에게 자신도 그 터널 안에 있었다고 말하며, 터널의 끝에는 빛이 있기에 혐오는 숨겨야만 하는 감정이 아니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혐오는 애초에 ‘터트려야 할’ 무언가가 아닌 것이다. 숨을 쉬는 일을 두고서 ‘뱉는다’라는 말로 특정하지 않듯, 인간의 본성이 혐오라면 그건 모든 인간이 죽음으로 향하는 길에 불과하다.


바로 이 “‘죽음’으로 향한다”라는 뜻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에게 ‘죽음’은 어떠한 사건을 겪어 나락의 구덩이로 떨어졌을 때를 은유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기에, 이는 ‘추락’의 한 증명이 된다. 그래서 죽음으로 향하는 길은 깊고 깊은 추락을 경험하는 것과도 같으며, 이 점에서 ‘혐오’는 나락에 떨어지기 싫다면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다. 하지만 인간에게서 ‘죽음’은 이미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기도 하므로, 터널의 끝에 죽음이 있는 게 아니라 삶의 시작점에 바로 죽음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죽음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올라가는 것에 가깝다. 나락에 떨어지는 게 아니라 나락의 위로 올라가는 게 바로 인간의 본성인 셈이다. 가령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비체’라는 용어를 통해 인간의 본성이 ‘비천하고 더러운 것’에 있다고 보았다. 이 맥락에서 ‘혐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고, 우리 사회나 집단의 한 틈새로써 밖으로 드러나야 할 존재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은, 이런 일들에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백남봉이 윤성아에게 말했듯이, 혐오 또한 우리가 지닌 감정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런 곳에도 올라설 수 없다. 자신에게서 혐오를 분리하는 일은, 오히려 무대에 올라서기 위한 발판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젊은 남성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주로 통용되는 패배자 문화는 그런 점을 상기시킨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배척받는 호칭들을 자신을 지칭하는 일에 사용하는 이 문화는, 이를 통해 자신을 방어하기보다 그만큼 터널의 끝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 더 가깝다. 더 깊은 곳에 있을수록, 더 높은 곳을 올려다볼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의미’있어진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할 때 패배자 문화는 희망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일로 보인다.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에서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패배자 문화는, 단순한 자조나 위로의 행위이기보다 현재에 대한 적극적인 구명이나 탈출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행위성이 깊다. 패배자 문화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발견된다고 해서 그저 수동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들 커뮤니티의 패배자 문화는, 이들을 배척해서 밖으로 밀어내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패배자를 밟고 올라서는 일에 가깝다. 모두가 함께 추락하기보다는 최대한 밟고 올라갈 수 있는 환경일 때 이 터널이 끝날 수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상대방을 배척하거나 제거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나락에 있자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밟고 올라선다는 말은, 상대방을 업신여기면서 지배하려 드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은 항상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의식한다. 패배자 문화에서 “당신도 나락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일은, 그 타겟이 바로 당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희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 분위기를 염두에 둔다. 이른바 패배자 문화에서 가장 패배자인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패배자가 된다는 건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된다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이들은 현실 인식을 지우고 싶어서 자신이 세상에 제대로 존립할 수 없도록 여러 비천함을 뒤집어쓴다. 그 천함의 의미가 갖는 진위와 상관없이, 이들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방식으로만 살아남을 수 있다. 


패배자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생존자가 되는 일과도 같다. 패배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신념을 저버린 자신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패배는 더 큰 의지에 끌려가는 자신의 무기력한 민낯을 마주하는 감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패배는 상대방에 대한 정복이나 우열을 판가름하는 일보다 방향성의 문제와 더 잘 연결된다. 더 큰 행성의 인력에 끌려간다는 것은, 자신의 의도나 의지를 넘어서 존재하기에 현실적으로 손쓸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좋든 싫든 간에 의지가 이끄는 곳으로 가는 일은, 자신의 꿈과 현실에 대한 패배이기 전에 이들을 자기 삶의 최하단으로 내려보내는 부가효과가 있다. 분리하고 싶지만, 떼어낼 수 없는 ‘자기’를 지하실에 유폐하는 것. 이와 같은 일은 현실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을 지하실에 감금함으로써, 이들을 상상된 존재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 어쨌거나 혐오의 감정도 자신을 구성하는 일부이므로 이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터널의 끝에는 빛이 있다고 믿는 일은, 그곳이 세계 전부가 될 때 탈출에 대한 강한 의지로 탈바꿈한다. 


이런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패배’와 ‘실패’의 모습을 마주하지 말라고 종용하는 사회 분위기에 있다. 시체를 볼 때 느끼는 근본적인 두려움이나 역겨움처럼, 우리는 패배와 실패의 감정을 직시할 때 그걸 ‘역겹다’고 생각했기에 이를 회피했다. 바꾸어 말해 이들이 스스로를 패배자로 규정하는 일은,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기가 두렵거나 역겨워서라는 이유도 있다.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고 싫다면, 자신을 그만큼 역겨운 것으로 규정하며 자기학대를 수행하면 그만이다. 자신을 분리해 이를 상상할 수 있는 무언가로 만들어두는 일은, 그것이 상징계의 일이 아니기에 손쉽게 공격할 수 있는 ‘것’이 되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자기를 배신하지는 않게 두는 일이기도 하다. 이른바 상징계의 감정을 상상계로 올려보내는 일은, 바깥 세계를 지움으로써 추락의 상황을 반대로 역전한다. 마주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탈출해야 하는 일은, 단순히 두렵거나 혐오스럽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려 드는 일과는 거리를 둔다. 즉, ‘패배’의 진의란 어떤 형태로든 피하기만 할 뿐이므로 이후에 상대방을 끌어안을 여지가 남는다는 점에 있다. 


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나락에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할까? 그냥 남들이 잘 되는 게 보기 싫어서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 자신의 일부였던 것을 바닥에 묻어버리고 싶어서라고 생각한다. 캔슬 컬처가 보여주는 것은 지지에 대한 철회일 뿐 한때 그와 어울렸거나 소속되었던 기억까지는 취소하지 못한다. 이미 자기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을 잘라내는 법은, 이를 모아서 지하실에 가두어버리는 것 말고는 없다. 비록 그게 비루했던 자신의 과거라 할지라도, 실패로 얼룩진 식탁보라 하더라도 이런 일들에서 ‘패배’는 모두 자기의 일부로서 주체가 되기를 명령한다. 한때 자신이었던 것에서 시선을 거두는 일은, 오히려 바닥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필연으로 추락을 동반한다. 이른바 패배자가 되는 순간은 우리가 이를 마주하는 순간이 아니라 이를 회피하는 순간이다. 나락에 간다는 건 지지나 옹호행위의 회수에 따라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지는 일이지, 개개인의 잘못을 빌려 폭압을 행사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락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은, 심연이 아니라 심연의 하늘인 건 아닐까. 


인디게임인 [산나비]를 떠올려보고 싶다.  2023년을 장식한 이 게임은 가로가 아닌 세로 방향의 플랫포머 게임으로, 바닥에 떨어지는 일은 곧 추락으로 이해된다. 소위 ‘등반’이라 말하는 게임성을 지녔는데 이와 같은 구조는 근 몇 년 동안의 게임에서 강조돼왔던 추락의 요인과 연결된다. 게임은 아저씨인 ‘나’의 시점으로 진행되지만, 이를 바라보는 동료 금마리의 시선에서는 그녀가 나락으로 이끈 대상임과 동시에 ‘자신을’ 나락으로 이끈 대상임이 밝혀진다. 이를 따라 금마리는 지하실로 추방했던 이 실패의 감정들을 갖고서 치유의 여정을 떠나며, 작품의 제목인 산나비는 그와 같은 추방극에 대한 자기 직시의 동인으로 작동한다. 이윽고 게임의 절정부에서는 도심의 최상층에 올랐던 상황에서 벗어나 그대로 도심의 최하층으로 떨어진다. 이는 전과 달리 모든 진실을 깨우쳤다는 점에서 여태까지의 여정을 회고하는 과정이 된다. 일반적으로 플랫포머 게임에서 시작점으로 돌아오는 일은 ‘태초마을’이라는 별칭이 있기도 할 정도로 성가신 일이지만, 이때의 2회차 등반은 실패의 감정들을 갖고서 작업하는 일에 가깝다. 


게임성이 비슷하지는 않지만 ‘나락’의 감정으로 작동하는 몇몇 게임이 있다. [온리 업]은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하늘로 올라가는 게임이다. [항아리 게임]도 그렇고, [시시포스 게임]도 그렇다. 주로 인터넷 방송에서 소비되었던 이 게임들은 ‘떨어진다=나락에 간다’라는 직관성으로 방송상의 비주얼을 뽑기에 수월했다. 동시에 스트리머들의 반응 또한 그와 같은 추락을 잘 보여주었으므로, 시청자로서는 꽤 흥미로운 콘텐츠라고 볼 수 있다(혹은 [아마겟돈의 광차]처럼 직설적으로 나락을 가리키는 게임도 있다). 즉, ‘나락’에 간다라는 이 주제는 단순히 인터넷문화이기 전에 어쩌면 시대의식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숏 폼 콘텐츠가 범람하는 세상에서는 단시간에 무언가를 보여주는 일이 중요하다. 살아온 삶을 종이 한 장으로 압축해서 제시하는 이력서나. 수십 간의 여정을 단 한 번의 실수로 0시간으로 돌려버리는 이 실수는 그 무엇보다 ‘제시’되기에 간편하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말하는 이 세상은 대안과 바깥을 허락하지 않으며, 바꾸어 말해 혐오를 선점하는 일은 그런 점에서 혐오에 추락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락쇼는 혐오를 선점하는 경제구조가 아닐까? 나락쇼는 실패의 감정을 갖고서 작업하지만, 그 자체로 패배를 상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나락쇼가 보여주는 건 단순히 바닥에 떨어지는 일일 뿐 그 의견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락쇼는 그저 추락의 운동만을 보여줄 뿐이며, 사람들은 자신도 나락에 갈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살아간다. 그러니까 나락은 어떠한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점에서 되려 그곳에 떨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거나 희망을 안고 살아가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죽음을 생각해본 이만이 죽음을 편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왜 ‘나락’이라는 말을 다시 올라오지 못할 곳으로 추방하는 일에 빗대는지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 공간에 속한다는 것은 그게 다른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여행할 수 있는 어떤 세계에 속한다는 점을 뜻한다. '승리'라는 말은 터널의 밖으로 나선다는 뜻에서, 그저 우리 세계의 한 문을 여는 일을 뜻한다. 나락은 돌아올 수 없는 곳이 아니며, 모든 생명은 내일을 위해 깊은 잠에 빠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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