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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1. 2024

거울 속 세계 같은 건 없어요


시네필의 수는 통계적으로 볼 때 줄어들고 있는 듯 보인다. “누구보다도 시네필처럼 보이는 사람이 자신을 시네필이라고 소개하지 않는 일”이 늘어났다. 심지어는 누군가 시네필이냐고 물으면 손사래를 치기까지 하는데, 어쩌면 오늘날 시네필이라는 말은 ‘힙찔이’나 ‘락찔이’와 같은 멸칭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 말인즉, 시네필은 영화가 아니라 영화 문화 자체를 향유하는 존재로서 이들 문화의 가치와 배경만을 취하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영상자료원과의 인터뷰에서 김형석 평론가는 이런 일을 청년세대의 한 경향으로 소개하면서, 원인으로 ‘공동체’의 부재를 꼽는다. 과거에는 영화 공동체가 있었기에 서로를 묶어주는 용어로 시네필이라는 정체성이 발탁되었으나, 개인주의가 심화하고 대의가 사라진 오늘날에 ‘시네필’은 집단이나 연결보다는 ‘속성’에 더 가깝다는 뜻이다. 바꾸어 보면 이와 같은 일은 시네필의 속성이 젊은 세대에 선호도가 떨어진다는 점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 점에서 시네필이 된다는 것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젊은 시네필이 된다는 건, 오래된 기계나 인형을 수리하는 일이나 반려동물과의 추억을 쌓는 일과도 같다. 고전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영화 속의 낡은 화면이나 관습, 시대상들에 반발하기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주된 관심사다. 어떤 사람은 맥락과 배경을 배제하고서 “그냥 버리고 새거 사라”고 말하지만, 사회초년생 때 샀던 첫차를 떠나보내는 일만큼이나 ‘영화’는 인간의 희로애락에 감정적으로 동화된다. 즉, 사람이 낡은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를 ‘고친다’는 게 시네필의 첫 번째 태도이며, 이는 영화를 통해서 자신을 고친다는 뜻에서의 ‘수리’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포스트 휴머니즘의 일종일 수도 있다. 시네필은 영화를 받아들이고자 자기를 개조하기도 하므로, 그런 뜻에서 포스트 휴먼으로 남는다. 시네필은 영화를 보며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나 결핍된 요인을 채워넣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영화가 자기를 대체하기를 바란다. 볼 영화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은, 그 길을 따라가며 얻게 되는 감흥들이 자신의 삶을 더 풍족하게 해주리라는 믿음에 기반한다.


그런데 영화 문화란 게 시네필을 참칭할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한 문화에 소속된다는 건 사실 무언가를 즐기는 일보다는 “왜 나는 그들과 다른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다. 즉 문화란 것은 ‘내부’로 추방되는 것이지 외부로 나아가는 게 아니다. 가령 청춘 장르를 다루는 서브컬처 계열의 작품들에서는 ‘상실증’이라는 주제가 부각되곤 하는데, 이는 사랑이나 꿈과 같은 명랑 소재부터 존재나 우울처럼 다소 심각한 주제에도 이른다. 개중에서도 단연 흥미로운 건 ‘엔트로피 상실증’으로 아무쪼록 서브컬처에서는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일’을 뜻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표면성의 의미 그대로, 응당 증가해야만 하는 엔트로피가 되려 감소한다는 점에서 ‘상실증’은 존재감이 점점 희미해지면서 삶의 의미를 잃어가는 일에 빗대어지는 듯하다. 그러니 시네필이라는 이름을 참칭하는 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시네필은 영화를 상실하는 과정에 이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시네필이 된다는 건, 타인을 비추어줄 수는 있지만 반대로 자신을 담을 수 없다는 걸 뜻한다.


문화는 필연적으로 외부자를 구분 지으면서, 한 문화를 끝내는 게 자신이기를 원한다. 그런 점에서 시네필이 된다는 건, 시네필을 끝내는 일과도 같다. ‘시네필’을 하나의 호칭으로 사용하는 일은, 그 자신이 어떠한 문화의 대표자로 이해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자신을 외부의 선봉에 세우는 것과도 같다. 마찬가지로 꿈은 깨어지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의미와 닮았는데, 꿈은 항상 외부 세계와의 접촉에서 선봉에 서므로 그 자신은 깨어지기 위해 존립한다고 보아도 좋을 테다. 즉, 영화 문화는 사실상 영화를 보며 얻었던 감정 이후에 자리한다. 영화를 보며 환희에 차거나 슬픔을 환대하는 일이라면 몰라도, 시네필이라는 존재는 영화를 보며 ‘얻게 될’ 감정 이전에는 있을 수 없다.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이나, 이별을 겪었던 사람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듯 어쨌거나 영화는 우리를 계속 밖으로 밀어낸다. 그러니 영화 문화는 기본적으로 ‘소속’이 아니라 ‘탈출’에 더 가까우며, 이를 따라 문화에 ‘소속’되려 하는 일은 다소 이상하게 보이는 게 사실이다.


영화가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일탈이라 가정해보자. 일탈은 통상적으로 일상을 벗어나는 일로 취급되기 마련이다. 일상이 자신의 신체 거동을 자동화한다면 일탈은 발걸음 하나하나를 전부 의식해야 한다는 점에서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과도 같다. 그리고 꿈을 꾸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꿈을 보여주는 일은 불가능하므로 시네필이 된다는 건 곧 일상에 잠식되는 일과도 같다. 즉 시네필은 일탈의 존재이다. 시네필이 그 자체로 탈출을 위한 지위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 자신을 시네필로 지칭하지 싶지 않아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사람들은 대개 스크린 내부 세계에 관심이 있지 스크린 자체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스크린은 단지 열림과 닫힘을 수행하기만 할 뿐이고, 시네필은 그 이름의 선언에서 문화의 내부를 성립시킬 뿐이다. 오늘날 시네필이라는 존재는 거대한 하나를 꿈꾸는 게 아니고, 다른 이를 자기 세계로 초대하려 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서 젊은 시네필 집단이 시네필이기를 자청하지 않을만한 이유는, 영화가 아니라 자기에 살기 때문이다.


남들과는 다른 자신을 원한다면서 정작 남들을 자기로 받아들이게 되면, 다른 이들이 자신을 통해 내부로 들어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대체되면 그걸 받아들일 주체가 사라져버리니까, 신체의 말단부터 외부를 하나둘 끌어들이려 하는데 이게 바로 시네필이라는 호칭의 의미이다. 흥미롭게도, 점점 더 신체에서 벗어나 정신적으로 교류하는 일에 가까워지는 세상에서는 신체야말로 서로에 관한 믿음을 담는 그릇이 되어주고 있다. 이 일은 인터넷 문화가 융성하며 서로에 대한 비교가 손쉬워진 일이 원인일 수 있어 보인다. “저 사람은 저렇게까지 하네…” 싶은 마음이 드는 한편에는 그 누구도 시네필 자격을 저울질하지 않음에도 스스로를 검열하는 일이 뒤따르곤 한다. 이때 자기검열의 행위는 엄중한 자기 세례의 의식으로 변형되면서, 개인의 신체를 꿈을 담는 하나의 용기로 만든다. 요컨대 시네필을 참칭하는 일은, 적어도 문화의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는 있지만 반대로 안이나 밖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다는 뜻이므로 그리 가볍게 사용할 만한 호칭은 아니다. 


시네필에게 영화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꿈과 마음을 담아 전하는 전송수단에 가깝다. 아마 그건 몸이 꿈을 꾸는 용기여서가 아닐까 한다. 용기에 따라 달라지는 액체의 모양처럼, 몸에 따라 꿈의 형태도 달라진다고 말이다. 결론적으로 젊은 세대에게도 영화 공동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공동체의 형태가 오프라인에서 서로를 만나는 게 아니라, 각자가 서로에 기억을 전함으로써 서로의 일부가 되는 일로 바뀌었을 뿐이다. 영화가 꿈을 담는 용기이듯이 우리의 몸은 공동의 영화를 담는 용기가 된다. 영화가 우리의 부서진 꿈을 메우는 매개 물질이라면 영화 문화의 시네필 집단은 좋은 꿈을 찾아다니는 모험가와도 같다. 시네필은 좋은 꿈이 악몽이 되지 않도록 여기저기에 자신을 채워넣으려 한다. 그리고 시네필이라는 표현이 망가진 것을 고치는 일을 뜻한다면, 오늘날 영화를 보고 나서 타인의 생각을 자신에 채워넣으려는 모습은 소문난 병원에 다니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병들었고, 자신보다 더 나은 의사가 있다면 그걸 찾아가는 게 자연스럽다. 


이상한 말이지만, 영화를 ‘본다’라는 점은 우리가 결국 영화의 ‘전면’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위치계에 대한 확정좌표가 되어준다. 그 누구도 스크린의 뒤편에서 영화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이런 일을 토대로 하나의 무대를 상상해보면 어떨까. 각자 능력이나 분야, 재능이나 성별, 국적이나 취미 등이 다른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주는 건 ‘영화’를 스크린 앞에서 보게 된다는 ‘지리적’ 사실이다. 영화는 점점 더 물리적인 지지나 옹호, 연대의 행위보다 정신적인 교감이나 결합 같은 분자적 구조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점점 더 개인이 원자화되는 세상에서 분열의 신호가 하나의 폭발로 이어진다면, 영화는 이와 같은 불안정의 구조를 안정화하는 물질일 것이다. 어떤 이는 거울 속에 ‘세계’가 없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거울 속에는 인간의 시기를 담는 작은 성이 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고 느끼곤 하지만, 영화 앞에서 우리는 무대에 오른 배우가 된다. 시네필이 된다는 건 이 성이 무너지는 마지막 시기를 함께한다는 것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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