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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5. 2024

멀리, 높이, 끝없이


여러 글에서 나는 영화가 인간의 삶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말했고, 혹은 허황된 꿈처럼 느껴진다고도 말했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영화를 수집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이 일은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를 내려받아야 하는 관람자의 태도에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에 대한 기대와 발굴의 마음을 짊어진 것 같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영화 파일을 찾아내는 일은, 자신에게도 혹시나 있을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 잃어버린 꿈과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은, 이를 되찾아 흡수할 때마다 더 나은 ‘자신’이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본래 자신은 멋진 인간이었는데 어떤 사건으로 나락에 빠져 지금 상황인 것이라고 말이다. 혹은 그런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을 테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화가 되어야 한다”고. 개인적인 좌우명이기도 한 이 말은, 실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영화와 함께 훌훌 털어버리자는 뜻이기도 하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슬픔을 이겨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언가 ‘일어난다’라는 행위성과 연계된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일어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자신을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일은, 벌어질 수 있는 일에서 흉터가 남지 않게 해준다. 


같은 의미에서 어떤 영화를 수집해서 발견하고 싶어하는 건, 분명 우리에게 남은 가능성이 아직은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마음 탓일지도 모른다. 이에 관련된 한 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언젠가 매거진 FILO에 소개된 영화글을 보던 누군가는, “볼 수 없는 영화를 소개하고 있네”라며 불만을 표했다.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합당한 지적이었는데, 이 문제의 핵심은 그런 영화제조차 접근성이 무척 동떨어져 있으며, 그럼에도 FILO는 이를 ‘본 사람’을 상대로 한 글을 실었다는 점이다. 영화제나 상영회의 기능이 어떤 영화를 ‘공개’하는 일에 있는 건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영화제가 해외에서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시간상에서 방문하기 어렵다면 영화를 볼 방법은 사실상 없게 된다. 혹자는 영화를 위해서라면 ‘구태여’ 시간과 돈을 들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이와 같은 일은 현실적으로 들이는 비용 대비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므로 다들 포기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판데믹 시기에 진행되었던 온라인 영화제는, 가히 시네필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았다. 집에서 간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건, 시간이나 제반 상의 여건으로 영화제에 방문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한 가지 ‘이점’이었다. 


혹자는 “영화는 제대로 된 상영시설과 환경을 갖추고 봐야만 의미 있다”고 말하는데, 반대로 그와 같은 점을 희생해서라도 영화를 보는 일이 더 나을 때도 있다. 왜냐하면 영화는 결국 모습을 드러내야만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게이트키핑에 관한 논란을 생각해볼 수 있다. 모 예술 영화를 국내에 수입하고서 시장에 공개하지 않는다는 사례에서 우리는 미술관이나 배급사 등이 자사의 영화를 아카이빙 하는 방식이 문자 그대로의 ‘보존’이라는 걸 깨닫는다. 영화를 보존한다는 건 이를 외부에 알려 질료나 희소가치가 ‘손상’되지 않도록 기관의 수장고에 ‘감금’하는 일이다. 이들은 주로 자신들이 소유한 작품의 희소가치를 올려서 기관의 명성이나 재고 등에 영향이 가지 않게끔 이런 태도를 취한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영화를 ‘보존’하는 미술관의 태도에 어떠한 비난을 보낼 수 있을까? 영화는 눈으로만 보는 예술이니 몇 번 보여준다고 손상될 일이 없겠다고 말해볼 수 있을 테다. 영화필름이나, 디지털화된 파일, 촬영된 동영상 파일을 웹에 업로드하면 ‘작품’이 대중과 만나는 길은 활짝 열리게 된다. 그러나 영화도 엄연히 저작권이 있고, 또한 디지털의 특성상 한번 유포되거나 확산되면 제어가 불가하므로 공개에 신중한 건 몹시 당연하다. 


이제 다시 한번 질문해보자. 영화를 본다는 건 무엇인가? 어쩌면 영화는 우리에게 ‘있다’고 믿어지는 일에 관한 믿음의 증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IMDB 등에서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탐색하다 보면, 어떤 형태로든 검색되지 않거나 발견되지 않는 작품이 수두룩하다는 걸 알게 된다. 반대로 이런 탐색을 거치다 보면, 구태여 영화제나 상영회에 가지 않더라도 온라인상에서 작품 파일을 ‘쉽게’ 획득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게이트키핑’이라는 단어는 본래와는 다소 동떨어진 문제의식이 된다. 분명 게이트키핑은 작품 유통을 가로막으면서 작품의 가치를 줄저울질하는 투자 행위, 혹은 산업계의 관습일 것이다. 그러나 정정당당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가지 않을 때, 이와 같은 문은 쉽게 무시되는 ‘절차’에 불과하다. 딱히 타인에게 ‘승인’받으려는 마음이 없다면, ‘영화’는 아주 분명한 형태로 여기 이곳에 존재한다. 이는 오늘날 영화 보존이 아주 위태로운 상황에 이루어진다는 점을 가리킨다. 어떤 영화는 수십억 개의 판본으로 나뉘어 각자의 저장장치에 안에 잠들어있을 것이므로, 원본이 사라진다 한들 이를 감상하기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다. 즉, 영화를 ‘본다’는 건 영화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뜻한다. 


영화의 쓰임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는 취지에 공감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건 ‘어떻게’라는 물음이다. 방법이나 절차의 문제를 따져 묻는 일은 분명 우리가 영화에 대해 하지 않는 이야기 중 하나다. 위에서 말한 판데믹 시기의 온라인 영화제의 경우, 스크리너가 다수 유출되기도 했지만 영화를 ‘본다’는 취지 자체를 잘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영화제란, 사람들이 행사가 개최되는 장소에 방문해야 하는 필요성을 심어줌으로써 지역에 대한 문화적 부흥을 이끄는 일로 알려졌다. 바꾸어 말하면 특정 영화제의 이념이나 의도를 실현하는 일에서 ‘지역’은 상당수 큰 영향이 없거나 배제된 것도 사실이다. 이는 영화제가 지역 축제로서의 영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이들 영화제에서 지역명은 사실상 하나의 고유명에 더 가깝다는 뜻이다. 가령 우리는 칸 영화제와 황금종려상, 불곰상이 왜 그런 이름인지를 모른다. 오늘날 이런 축제들은 그냥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됐고, 영화 도시로서의 전주와 부산도 그렇다. 도시에 대한 매력과 영화에 대한 기호가 한곳에 모이지 않는다. 바로 이 높이에서 시선을 좌우로 돌리면, 우리는 영화에서 전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왜 영화는 미술관에 있어야 할까? 


영화를 보존하는 일이 더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보게 하는 일은, 영화를 보존하는 일에 들어가는 행위에 대한 가치와 정당성으로 인해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영화를 처음 만들었던 제작의도를 살리는 일이 시네마테크의 주된 행위의사와 목적이라는 걸 잘 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점에서 영화를 ‘본다’는 말은 영화를 보존한다는 말과 같은 선에 있지 않다. 우리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영화도둑일기』의 저자 한민수는 자신이 카라가르가에서 활동하며, 영화를 올리거나 내려받는 일을 하고 있다고 밝힌다. 한민수는 여기서 생산자로부터 곧바로 파일을 해적질하는 사례를 밝힌다. 유운성은 게이트키핑의 사례를 지적하며, 책을 읽고 있는 영화 관계자는 자신들이 영화를 상영하는 과정에서 영화를 수집하거나 보존하는 방법에 대해 자문할 것을 주문했다. 이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건, ‘게임’은 서로가 규칙을 준수할 때 성립할 뿐이라는 점이다. 규칙을 벗어난 순간 통제는 의미 없어지고, 놀거리는 공격수단이 되며, 서로를 향한 포옹은 소매치기를 위한 작은 눈속임이 된다. 카라가르가 또한 이들 커뮤니티의 규칙을 세워 토렌트 피어 공유를 철저히 통제하지만, 영화로 들어가는 입구는 스크린에만 펼쳐진 게 아니다.   


언젠가 프랑스에서 수학하며 영화이론을 공부했던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눴었다. 교수님께서는 유학시절, 가난했지만 자신이 행복했던 건 유학생의 작은 신분으로도 시네마테크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덕택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잉마르 베리만이 어부를 취재한 다큐멘터리(Faro-document)를 프랑스의 시네마테크에서 봤던 경험을 말씀하셨다. 이 경험과 현재 내가 보관 중인 디지털 파일은 서로 동등한 가치가 있을까? 현재 이 다큐멘터리는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으로 발매되었고, 근 일년 여 사이 유튜브에 업로드되기도 하는 등 어디서나 쉽게 만나볼 수 있게 됐다. 결과적으로 여기에는 다큐멘터리에 대한 세 개의 판본이 있다. 하나는 현장에서, 하나는 저화질로, 하나는 고화질로. 어쨌거나 이들 영화는 모두 같은 영상을 담고 있어서 사실 무엇을 보든 간에 레터박스와 같은 기록 사이트에 ‘보았다’고 표기하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그러나 서로는 서로 다른 의도와 목적의식을 갖고서 해당 영화에 접근했기에, 이들이 서로 같은 게임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대로 영화를 보는 것 자체에 어떠한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며,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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