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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5. 2024

밈을 재발명하기, 문화적 풀이되기


밈이란 무엇일까? 많은 경우 인터넷 유머나 은어를 예시로 들곤 한다. 이와 같은 밈은 마케팅 분야에서 주로 활용되면서 사람들에게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인식을 친근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주로 유희를 위해 소모되었던 밈이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의 이미지에 결합할 때, 이미지는 밈의 유전적 성질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면서 그 자신을 해당 유전자 풀 안에 소속시킨다. 말하자면 밈은 그 자체로 거대한 군체이며, 어떤 밈을 사용한다는 건 군체의 유전자 풀에 소속된다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한 밈을 사용할 때는 접속지점과 무관하게 그 내부집단으로 편입될 수 있고, 이와 같은 점은 반대로 밈이 무부분별하게 전파되는 게 아니라 무작위로 통로를 배설함을 보여준다. 즉, 밈은 어떠한 발명이 아니라 발견에 가깝고 우리는 이를 이용할 수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마케팅 분야의 밈은, 단일 개체의 질과 양을 늘리기보다 군체 일부가 됨으로써 그 자신을 급속도로 진화시키는 일에 그 목적이 있다. 밈은 사람들이 어떠한 유전적 성질을 기계적으로 연구하거나 재현하기보다는, 자연발생의 요인과 여건들을 갖고서 자신을 치장하는 일에 자신의 손을 빌려준다. 요약하면 밈은 특발적으로 생겨났기에 오직 이용하는 것만이 가능한 진화의 한 ‘수단’인 셈이다. 


밈은 언어를 거치지 않고서 내부를 지니므로 그 자체로 탐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를 따라 어떤 밈이 첫발을 내딛는 과정을 묘사하는 일은 일종의 고고학적 작업에 빗대어지기도 하고, 혹은 스탠드 코미디를 온라인으로 옮겨놓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부가 비어있으면서 겉으로 문화가 흐른다는 점에서는 힙합 같은 음악적인 면에 빗대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들은 음악에서 가사는 단지 ‘느낌’을 주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이며, 중요한 건 리듬이나 그루브, 성조나 운율처럼 언어를 초과하는 무엇이라고들 말한다. 실제로 밈은 어떠한 기호나 지시사항을 담고 있는 게 아니라, 맥락에 따라 자신의 내부 특성을 발현한다는 점에서 대안적(Alternative)이다. 음악을 듣는 사람 모두가 그걸 자신의 이야기처럼 여기고 또 감동하듯이, 밈의 유행에서 중요한 건 그것이 자신들의 문화에 잘 포섭될 수 있는지 여부이다. 많은 경우 밈은 내부에 무언가를 들여놓으려 한다는 점에서 백룸처럼 기능한다. 무한히 반복되며 변형되는 공간은 점수 따기를 위해 변형된 무대 공간과 이와 같은 전투의 연속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출구를 배제하고 존재를 내부로 끌어들인다. 


가령 한 밈을 소모하며 공유하는 집단은 크게 보았을 때 분파가 아닌 계급으로 규합되는 경향이 있다. 밈을 소비하며 전파하는 일은 사상이나 이념의 동질감이 아니라 문화에 대한 동질감이 우선시된다. 밈은 자체로 하나의 유전자 풀이므로 생물학적인 면이 인간적인 면에 더 앞서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밈에 대한 혐오는 문화보다 본능에 더 좌우되고는 한다. 한 밈은 문화의 최전선에서 생겨나므로 밈에 대한 이해는 항상 생물학적인 조우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마치 외계 문명과의 소통을 묘사하는 듯 보이는 이런 점이 밈의 주된 성질이다. 그러나 밈을 이해하는 일에서 이와 같은 사례는 한 가지 예시일 뿐이며, 밈은 더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범주에 얽혀있다. 음악을 예로 들어보자. 음악은 사람들 사이를 떠돌며 각자의 판본으로 전파되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는 우스꽝스러운 숏 폼 콘텐츠로 가공되기도 한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특정한 계층군만 노리는 게 아니며, 또한 자발적으로 전파되는 성향이 있기에 의도하지 않은 조우를 일으키기도 한다. 심한 경우, 음악은 ‘브금’이라는 형태로만 남아 특정한 상황이나 감정을 호소하는 ‘스위치’로만 사용되는 때도 있다. 


음악은 문자나 언어가 아니므로 국가와 대륙을 초월하지만, 반대로 자신에 따라붙는 문자 설명이 없으면 차츰 의도나 맥락이 잊히고야 말 것이다. 밈은 그 핵심 구절만이 살아남아 더 큰 악장의 일부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악기의 종류와 분배를 달리함으로써 익숙하지만 낯선 무언가로 등장해올 수도 있다. 밈은 맥락에 대한 맥락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중앙가지를 남겨두지 않으므로, 그 ‘원형’이 없다는 점에서 모든 상황에 촉발제로 사용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밈은 가장 안정적인 물질이기에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물질이기도 하다. 밈은 영역이기보다 깃발에 더 가까워서 자신들의 것이 타자에 의해 점용되었을 때 언제든지 외부로 지정될 수 있다. 밈은 그 원본인 유전자처럼 생물학적인 특성이 있으므로 마찬가지의 의미에서의 생물학적 테러로 환원될 수 있다. 자신이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특성을 유전자 풀 안에 집어넣는 순간, 밈은 오염된 유전자를 받아 순식간에 변형되고야 만다. 밈은 항상 총체로만 있는 게 아니라 작은 이야기들을 양산하고, 혹은 매 순간 어떤 이야기를 멸망시키면서 종국을 향해 나아가기만 할 뿐이다. 


문제는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자신’이 유전자 풀 안으로 뛰어들 때다. 이 경우 밈으로 환원되어버린 대상은 그와 같은 밈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지만, 한 문화에 소속되는 게 아니라 이야기에 소속될 뿐이므로 그 자신은 내부에 아무런 구성을 내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밈이 자신의 이야기로 여겨진다는 건, 바꾸어 말해 이것이 다른 집단에 의해 점용될 때 반발이나 박탈감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뜻하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이런 경우는 다시금 외부로 나아가 밈을 재발명하는 수밖에 없다. 기억의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화적 영역에서도 밈은 다른 형태로 치환될 뿐이므로, 본래 연상의 의도나 용도를 재발명하는 일 말고서는 밈의 영역을 외부로 밀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이와 같은 점을 의도한 것일 수도 있을 테다. 어떠한 존재의 틀에 포섭되기보다는, 특발적으로 자아를 제기함에 따라 유지되는 하나의 문화적 풀이 되는 일 말이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자기로 남아있기를 포기하면서 오히려 동시다발적으로 자기를 표출하려는 욕구를 지니고는 한다. 그리고 생각건데, 아마도 이는 생물학적인 생존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다른 형태로 자기를 남기려는 문화적 번식의 욕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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