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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01. 2024

영화와 국외자, 그리고 무정부주의


영화를 하나의 영토라 가정해보자. 만약 우리가 영화에서 무언가를 수입해오는 과정은 해외직구의 일종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관세를 부과하면서 검역을 진행하거나 하는 일이 있다. 해외직구를 통해 유입되는 여러 상품은 중간 유통업자를 거치지 않기에 가격적인 면에서 경쟁력을 지닌다. 그래서 해외직구는 대개 같은 상품을 더 저렴하게 구하고자 하는 소비자들의 경제절약 창구가 되어왔다. 영화도 그렇다. 누군가는 사람 사는 게 어딜 가나 다 똑같다고 말하면서, 영화에서도 ‘현실 정서’에 어울리는 게 있다고 말한다. 동시에 현실 안에는 특정한 질서나 분위기가 있고, 이를 해치거나 왜곡하는 것은 마땅히 검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에 맞게 들여오는 과정에서 일종의 현지화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건데, 이 과정에서 영화는 다양한 부가 설명이나 사례가 덧붙여진 현실 담론보다 더 정제된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한다. 현실에서는 현실에 대한 지배적인 의식을 거스르기 어렵지만, 영화는 현실과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기에 현실 인식에 도달하는 우회로가 되어준다. 결국 영화를 보는 일에 검역의 잣대가 들이대어지는 이유는 명쾌하다. 현실에는 담론이 유통되는 과정에 얽힌 여러 이해관계가 자리하지만, 영화엔 그런 게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영화가 현실의 인식을 반영한다고들 한다. 어쩌면 영화를 자신의 삶이나 여건에 맞게 버무리는 일은, 되려 영화가 현실을 벗어난 무언가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현실 안에서 현실은 대개 인식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영화 안에서는 어떤 현실이 정말로 잘 관측되는데 아마도 이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 충분한 정도의 ‘거리’가 주어지기 때문일 테다. 즉, 영화에 검역을 진행하는 일은 영화의 의미작용이 주체와 상호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관계를 맺는 일은 양측 간에 간격이 있어야만 가능하므로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현실 인식을 수행하기 위해 현실을 발견하는 곳이 바로 영화인 셈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형태로 현실을 인식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영화가 우리의 시선 아래에 내리꽂힌다는 점에서 아직 되지 못한 현재라는 인상이 있어서다. 영화가 현실의 인상을 갖고 작업한다면, 영화는 아직 현실이 되지 못한 것이면서 동시에 현실 세계의 그림자와도 같은 무언가다. 우리가 영화에 검역을 하는 이유는, 그런 현실이 온전한 제 모습 그대로를 잃지 않도록 돕는 일이여서다. 혹시라도 중간에 무언가 개입해서 유전자가 손상된다면, 연약한 현실만을 결과표로 받아들이고야 말 테니 말이다. 


다른 한편, 한 의견이 지지받으려면 문화적으로 특정한 ‘세금’을 헌납해야만 이를 수용할 수 있는 때도 있다. 외래 ‘문화’이론이 영화에 묻어 들어오는 일을 경계하기도 하고, 더 좋은 생각이나 글이 있으면 해외에서 이를 수입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영화의 내용이 자국의 정서와 맞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영화를 둘러싼 설왕설래가 펼쳐지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에서 담론을 들여오는 과정은 국외에서 물건을 들여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해외직구에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한다고 보는 일은 영화에서 영토의 문제, 그리고 국외의 관계를 연상케 한다.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야만 비로소 영화를 받아들이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생명이 삶을 영위하는 방법 중 하나다. 모든 생명체는 항상성을 지니며, ‘자기’와 다르다고 생각되는 것을 밀어내거나 고민하는 일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특정한 것을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와 정반대다. 영화에서 검역은 꿈에 발발한 이상 현상을 두고서 의문점을 품는 쪽에 더 가깝다. 자기만의 현실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영화는 개개인의 현실 인식을 반영하는데, 정말로 완벽한 꿈이라도,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나면 꿈이 악몽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두고서 하나의 담론으로 보는 일은 영화를 현실과 분리해 바라보지 않는다. 여기서 영화는 마치 국외와도 같아서, 규칙이나 언어를 갖고 접근하면 얼마든지 교역할 수 있다. 영화 또한 우리 현실에 있다고 보는 셈인데, 이 경우 우리가 ‘현실적’이라 일컫는 몇몇 요인은 현실 영토 내에서 ‘월경지’에 해당하는 입지를 지닌다. 무엇이 현실인지에 관해서는 그게 정말로 있다는 결론에서 출발할 뿐, 그 진위 자체에 의심을 품는 일은 없어진다. 결과적으로 영화를 본다는 건 영화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영화 그 자체’를 보는 셈이 된다. 오히려 영토의 관점으로 바라본 영화는 자기를 입증해야 하는 책임이 아니라 엑스레이나 CT 사진 같은 인체의 투사도가 된다. 이 경우 영화는 어떤 세상으로 통하는 창구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이례적일 수 있는 국외일 뿐이다. 영화가 현실의 국외로 여겨질 때 영화는 도피의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 현실 인식에서는 모든 의미가 자신의 영역 안으로 필중한다. 왜냐하면 깨지 않는 꿈을 꾼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감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현실에 있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반영한다고 여겨진다면, 이제 영화는 우리를 적대한다. 


영화를 본다는 건 여행을 떠나는 일과도 같다. 잠시 머무를 수는 있지만 본질에서 집이 될 수는 없고, 다시금 떠나가거나 아니면 이곳에 돌아와야만 한다. 따라서 영화가 황무지를 보여줄 때 그곳엔 항상 영화가 존재한다. 황무지와 영화의 공통점은 아직 개척되지 않은 땅이면서, 동시에 골드러쉬와 같은 환상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영화가 황금이나 석유처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무언가를 갖고 있으리라 여기며 영화에 살기를 택한다. 그러나 영화에 살기를 택하는 것은 한 이야기에 살기보다 여러 이야기를 떠돌기를 택한다는 점에서 집시의 삶에 더 가깝다. 영화에 산다는 건 본질적으로 비천한 것이고, 또 찢어지기를 택하는 일이다. 여기서 비평가가 등장한다. 과거에 비평가가 시네필의 우상이었던 건 황무지에 나가 쓸만한 고철을 주워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비평가가 자기들을 대신해 황무지를 탐사해주기를 바랐다. 비평가의 역할은 선구자가 아니라 희생양이었다. 르네 지라르의 이야기에서 희생양은 집단 내부의 갈등과 폭력을 갖고서 사라지는 존재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야기에서 비평가는 영화가 현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이를 국외에 폐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가 영화에서 무언가를 보고 들으며 느낀 많은 추억이 수하물적재중량의 한계로 인해 버려진다. 영화에서 현실로 건너오는 과정에서는 영화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여러 것이 영화에 남겨진다. 이때 우리에게 남은 건 어떻게 집으로 돌아올 것인지 뿐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들고 온 물건만을 갖고서 다시금 현실에 돌아올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확실히 친환경적이지만, 인간이 영화를 삶의 조건 삼아 살아왔던 역사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영화에 무언가를 버리지 않는다는 건, 무언가를 들고 나간 우리가 그만큼 무언가를 충분히 들고 올 수 없다는 점을 뜻한다. 영화를 분석하기 위한 숱한 방법론이 영화 안에서만 존재하는 현실에 적용되기 때문에 반대로 ‘영화’는 현실을 위한 게 될 수밖에 없다. 그 둘 사이가 같지 않기에 우리는 영화를 지배하는 위치에 선다. 따라서 우리가 영화에 보내는 러브레터는 많은 경우 짝사랑으로 끝나고야 만다. 영화와 현실 간에는 명백한 위화감이 존재한다. 영화를 본다는 건 영혼의 형태가 고정되고야 마는 황금향으로 떠나는 일과도 같다. 꿈속에서는 잠자리에 드는 것이 불가능하듯, 영화 안에서 우리는 영혼을 잠재우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다. 


송경원 평론가는 팟캐스트 [조용한 생활]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이제 시네마라는 것이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의 퀄리티, 완성도에 주목하는 시대는 지난 것 같아요.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해석 사이의 과정 같은 게 중요해진 거죠.“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두고서 한 이 말은, 별다른 의미와 설정 없이 세계가 구성된다는 점에서 탈권력화나 탈중앙의 기조에 맞물린다. 카메라가 분명 초점을 잡아야 할 것임에도 의미가 바깥으로 밀려난다는 건, 결과적으로 한 세계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역할이 주변부로 산포되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서로에 의해 다발적으로 응시되는 현실, 그 위에서는 크고 작은 면역계의 싸움이 벌어진다. 이전 시대에 비평가는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주는 사람이었다. 과거에는 담론을 전문적으로 유통하는 비평가 같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해외직구가 보편화하면서 사람들은 이제 더는 평론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과거에 비평가가 국외의 이야기나 이론, 소식을 전해주는 ‘중간 유통’ 역할이었다면 해외직구가 보편화한 오늘날에는 사용자가 직접 사서 쓴다. 즉, 모두가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며 이에 정정당당히 맞서 싸우고 있다. 


송경원 평론가의 의견은 애초에 영화가 무언가를 직접 드러낼 필요도 없이, 혹은 손해를 겪을 이유 없이 곧바로 소비자에 물건을 공급해버리면 의미를 유통하는 일에서 손실이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모두가 왓차에 들어가 한 줄 평을 남길 수 있고, 혹은 유튜브나 인터넷 방송에서 사람들이 자기만의 감상을 들려주는 일에 참여할 수도 있다. 레거시 미디어의 종말은 공교롭게도 인터넷을 통한 직접 유통의 세태에 잘 다가선다. 따라서 비평가를 두고서 중간 유통업자로 파악하던 이들은 비평의 역할이 쇠퇴한 오늘날의 세태를 더 반길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 비평가는 문화 권력 구조에서 마이크를 독점한 한 사람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비평가가 본질에서 사회 내부의 비천함을 짊어지는 존재였음을 고려하면, 오늘날 찢어진 것은 좌대 위의 마이크가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일지도 모른다. 쓰레기 매립할 장소가 사라지고 나면 남은 쓰레기는 현실의 거리 여기저기에 나뉘어 저장될 수밖에 없다. 온라인상에 갈 곳을 잃은 언어들은 이와 같은 사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커뮤니티는 이제 국외의 담론만을 수입하기만 할 뿐이며, 검역 없는 수출입에서는 여러 감정들이 난삽하게 흩어진다. 


현대 포스트-진실 담론에서는 진실에는 항상 대안적 진실이 파생되어 존재한다고 본다. 이와 유사하게 과거는 하나로 일치되기보다 각자의 현실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다 보면 이 과거란 것은 저주인형처럼 몸 하나에 숱한 양의 바늘이 꽂힌 듯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여기서 비평가의 천함이 빛을 발한다. 천함에 관한다는 건, 천함이 아니게 되는 것과도 같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회 전체의 슬픔을 한 사람이 짊어지기만 해서는 안 된다. 비평가가 어떤 사건이나 사태에서 상처를 짊어지기를 기대하는 건, 현실의 상승적 지위에 반한 부정 에너지를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비평가의 대속을 토대로 자신이 살아가는 땅을 더 윤택하고 고결하게 만들고 싶어하지만, 난삽하게 흩어진 감정에서 우리가 거둘 수 있는 건 오직 물리적 현실의 구원뿐이다. 그러니 비평가가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과거에 비평가는 문화적 담론이나 영화 세계와의 교역을 담당하면서 이를 현실에 맞게 가공하는 역할을 했다. 슬픔의 크기를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소화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것은 언제나 비평의 몫이었다.


만약 비평가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보면, 아마도 무정부주의와 탈중앙화를 구분해야 한다. 무정부주의자가 모든 이가 비평가일 수 있다고 말한다면, 탈중앙화의 지지자는 한 사람에 책임이 몰리는 구조에 반대한다. 누구나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영화를 국외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이를 경유해서 내부를 사유한다는 생각을 파훼한다. 어떤 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가두어놓는 것은 교역에 대한 중단과 검역의 행위이다. 그러니 해외직구가 보편화한 오늘날에서도 중간 유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면, 싫어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다만 이는 적어도 영화에서만큼은 진실이다. 영화에서 천함과 비천함을 구분하는 건 영화가 현실과는 다르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현실을 ‘천함’에 빗대기 위함이 아니다. 한 시대의 전면에 선다는 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지 미래를 탈락시키고자 함은 아니다. 영화가 삶의 중심에 설 때 우리는 개인의 삶을 설명하는 단서로 영화를 응용하고 싶어한다. 과거에서 출발해서, 다시금 미래로 돌아오기 위해, 이 둘 사이에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있다. 영화는 삶에 대한 문화적이거나 행정적인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설명하는 일에 동원된다. 영화가 현실에 내는 균열은 우리가 현실의 표면에 미끄러지지 않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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