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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22. 2024

프로토콜 통과, 초토화 작전 집행!


올해 상반기에 발매된 두 기념비적인 책이 있다. 하나는 한민수의 『영화도둑일기』이고, 하나는 김경수의 『밈의 계보학』이다. 두 책은 그동안 우리가 너무 광범위한 문화 세계를 살아왔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사회가 발전하고, 문화가 변할수록 사람들의 취향이 세분화된다면 으레 우리의 지대 또한 넓어지기 마련이다. 그로 인해 이제는 블록버스터와 같은 폭탄이 한 방에 모든 구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됐다. 아무리 큰 유행이 닥친다 한들, 지하세계는 사람들을 대피소로 끌어들였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게 바로 해적과 밈이다. 전자는 우리가 분명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곳에서도 지하수로가 있음을 보여줬다. 단순히 이력서에 ‘영화감상’이라고 적어내는 일이 많은 감정과 삶을 단순화하듯, 영화를 ‘본다’는 말은 그 영화를 어디에서 볼 수 있고 혹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가 눈앞에 펼쳐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극장에 갈 정도로 시간을 낼 수 있는지를 먼저 자문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일컫자면 영화를 보는 일은 틴더 앱을 사용하는 일과 같다. 먼저 앱을 켜서 구미가 당기는 로그라인을 살펴본 다음, 그/녀에게 “어떻게 해야 당신을 만날 수 있나요?”라고 의사를 타전해야 한다. 영화를 본다는 건 우리가 영화에 얼마나 매력을 느끼는지와 같으며, 이는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지위를 형성하는 일에 관한 흥미로운 단서 하나를 제공한다.


남들도 이 영화를 보고 있다. 심지어 잘 아는 지인도 이 영화를 봤다고 한다. 그런데 당신은 이 영화를 못 봤다. 궁금해서 대체 어디에서 이 영화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 『영화도둑일기』가 묘사하는 것은 오늘날 영화가 과거의 경험을 관습적으로 대물림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국 영화계에서는 각자가 지닌 영화 파일을 비디오로 구워 은밀히 공유하는 일이 성행했다. 한 자료를 갖고 있는 집단이 다른 집단에 접촉해 파일을 바꾸기도 했고, 이를 통해 성황리에 그들만의 영화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런 일은 프랑수아 트뢰포처럼 서구사회에서도 흔하게 벌어졌었는데 물론 그 배경맥락에는 한국의 학생운동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중세 수도원에 가까웠던 건 아마도 후자이다. 중세 수도원에는 항상 어딘가로 빠져나갈 수 있는 지하수로가 있었다고들 하는데, 한국에서도 군사정권 시기에 건축된 건물이 그렇다. 지하 운동을 표면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건물 자체가 침입자의 동선을 교란하도록 짜여있고 이를 따라 단지 환경을 ‘이용’할 뿐이라는 변명이 가능해진다. 영화 도둑질도 마찬가지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주류 문화를 연결하는 지하 수로를 침범하는 일은 오늘날 네트워크 기술과 분산 시스템의 이중 결합을 ‘응용’할 뿐인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를 도둑질하는 일은 해당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구조를 바꿀 만한 힘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즉 밀수 루트가 계속 유지된다.


『영화도둑일기』를 보고 있으면 로마의 지하수로를 떠올리게 된다. 옛 로마에서는 공용 목욕탕을 운용하기 위해 도시 곳곳에 수로를 깔았다. 목욕탕이 로마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걸 고려하면, 이 수로는 단순히 물을 끌어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수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한편으로 로마가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던 이유 중에는 도로의 건설이 있다. 도로를 건설해 물자와 인력이 원활히 오갔으며 이는 사람들 간의 교류를 넘어서 영토의 외곽까지 피를 전달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말하자면 로마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건 나라 전체가 하나의 신경망처럼 되어있었다는 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도둑일기』는 해적질이 우리 문화의 소외된 지역에서 등장해온 게 아니라 침입자의 동선을 교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축성가의 ‘지식’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한 공간이 동선을 설계하는 방식은 입구에 들어선 방문객이 이 세계에 제대로 ‘초대’되었다는 점을 전하는 것이다. 영화 도둑의 지하수로 역시, 우리가 배경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과 관습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 사이를 뒤집는다. 영화를 보는 방법으로 토렌트를 제시하는 일은, 동일한 목적의식을 지닌 이들 사이를 동시다발적으로 잇는 작업에서 하나의 건축물을 축성한다. 토렌트는 피어교환이 이루어져야 하고, 또한 하나의 믿음을 줄곧 쏘아 올려 이를 계속 지탱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프로토콜의 일종이다. 즉 믿음의 알레고리를 중요시한다.


이제 『밈의 계보학』으로 넘어가 보자. 디지털 밈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밈이 항상 초토화 작전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밈은 대개 자신이 등장해온 배경이나 시기를 초과한다는 점에서 이미지의 표면에 서는 경향이 있다. 언어에서 고유명사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밈의 등장에는 분명 역사가 있지만 어느 순간 이것이 특정한 상황을 가리키면서 다양한 변형 판본을 유지할 수 있게 되면 이제 밈은 공간의 역사 그 자체가 된다. 이렇게 한 영역을 소유하게 된 밈은 마치 쥬라기 공원이나 닌자처럼, 문맥을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맥락으로 이미지를 변형할 수 있다. 앞서 영화 도둑이 구역 폭격에 별반 상관없는 지하를 택한다고 보았던 것을 떠올리면, 여기서 밈은 자신이 속한 영역을 가속해서 남은 모든 것이 사멸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밈은 한 시대를 평탄화하는 게 아니라 그 무엇보다 오래 살아남을 뿐이다. 즉, 디지털 밈이 갖는 콤플렉스는 생존자 편향이나 잔존의 슬픔에 비견된다. 밈은 한 사회에서 그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았기에 되려 공터로 남은 것일 뿐, 그 자체로 재밌거나 타 분과에 수발되기 쉬워서 진화론적으로 ‘선택’받은 것은 아니다. 결국 밈을 대표하는 말은 실패이다. 무언가에 어울리는 일에 실패했기에 도리어 아무런 소속 없이 생존하게 되는 이 현상을 두고서 우리는 ‘미끄러진다’는 표현을 쓴다. 말 그대로, 미끄러짐은 마찰계수를 최소화하며 많은 미래를 꿈꾼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과학의 형상을 한다.


변형-프리온처럼 밈은 생물학의 분과에 속하면서도 정작 생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는 인종이나 국적, 성별을 초월한다고 믿었던 20세기 인터넷 문화의 기대 일면을 내포하는 것처럼 보인다. 밈은 레일건처럼 아주 멀리 있는 누군가를 저격할 수도 있고, 혹은 일상의 많은 분야에서 사람들 사이의 기계 결합을 돕는 관절이 되어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밈은 서로 다른 분과에 속한 우리가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하나의 공동에 도달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아는 것과는 반대의 방식으로 집단을 연결한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기에 되려 연결된다는 이 개념은 지하수로를 따라 도망친 도둑들이 훗날을 기약하며 흩어지는 일처럼 보인다. 지하수로를 따라 산포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아니라 현재를 초과해선 과거일 뿐이다. 이처럼 고고학적 탐구를 무력화하는 밈의 특성은, 블록버스터와 같은 폭탄이 구역에 쏟아져 내릴 때 사람들을 통로로 대피시키기보다 이를 평면으로 바꾸는 효과가 있다. 밈의 특징 중 하나인 환락은 모든 고난과 역경의 상황에 웃음짓는 조이보이를 연상케 한다. 모든 진지한 사건이 우스꽝스러운 무언가로 변하고, 일촉측발의 상황도 축하파티에나 사용되는 머니건으로 변해버린다. 그런 점에서 밈은 우리에게 가장 본원적인 것을 자극한다. 밈은 자기로 남기 위해 펼쳤던 고유의 영역을 지우고, 사람들 사이를 구분 짓는 기능을 공동체 설립의 기초과학으로 응용한다.


판데믹 시기에 두 사례가 유달리 돋보였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밈은 감염되고 전파된다는 점에서 생물학에서의 병균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판데믹은 우리가 하나의 지구에 산다는 점에서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게 해준 감이 있다. 이는 어디로 도망가든 미사일의 위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지하수로로 들어가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뿐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때 공동체는 찢어지거나 분열되고 있을까? 오히려 실패의 감정이 분산되면서 실패의 기능적인 면만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실패’는 ‘슬픔’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언급해두고 싶은 이미지가 하나 있다. 판데믹 이전 시기에 인터넷에서 유명했던 DJ인 ‘J.E.B’는 축제 등에서 주로 활동했었다. 2017년 무렵에 평소 하던 작업물을 단편으로 올렸고, 그중에 ‘전국노래자랑리믹스’가 사운드클라우드와 유튜브를 중심으로 밈화되며 인터넷상의 유명인이 되었다. 이후 신비의 인물로 유명해진 그는 다양한 형태의 곡을 작업하여 선보였으며, 오래전에 냈던 앨범 “찐따”까지 재발굴되면서 인터넷 아티스트로 거듭났다. 그러던 중 판데믹으로 인해 외부행사가 금지되자 그는 생존의 위협을 마주하게 되었다. 외부 축제가 모조리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공연에 사용할 매쉬업을 제작할 이유도 사라졌고, 이에 유튜브에 신곡을 올릴 이유 같은 건 사라졌다. 본래 매쉬업 곡들은 공연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나온 재료들이었으므로, 공연이 없다면 당연히 이런 곡을 수고스럽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이때 요일바는 그동안 사용했던 컨셉인 “요한-일렉트릭-바흐”를 이용해 사회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활동을 해보자고 마음먹는데, 이렇게 등장한 게 바로 온라인 공연이다. 평소 인기에 힘입어 그는 온라인으로 모금행사를 열자고 말하며 다섯 시간여에 이르는 온라인 라이브 공연을 세 차례 진행했다. 이후 판데믹이 끝나면서 본업에 복귀한 그는 아무쪼록 리믹스곡을 업로드하거나 하는 일은 줄어들었고, 이 시기에 정점을 찍었던 인기가 적당히 사그라들면서 밈의 자리에서도 내려오게 됐다. 그러나 이전에는 아는 사람만 알던 인터넷 유명인은 판데믹 상황에서 리스너와 소통하며 자신의 슬픔을 이겨냈다. 분명 판데믹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그의 작업물을 접할 기회는 비교적 적었을 테다. 판데믹은 오히려 모두가 전면에 나서게 됨으로써 모두가 같은 지위에서 소통하게 해주었다. 소통이라기보다는 서로를 구분할 방법이 없어진 것에 가깝다만, 어쨌거나 문화적 상황 등에서의 구분짓기가 제대로 행해질 수 없는 이런 상황이 오히려 무위의 공동체를 만들어낸 일은 판데믹 시기의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특히 현대카드에서 기획했던 2019년 5월의 “Curated 52 슬픔의 케이팝 파티 SKPP 2019” 영상을 살펴보자. 단편적으로 알던 매시업 노래들과 케이팝 팬들의 호응이 한자리에 묶일 때 인간의 조건은 음원 사이의 간극으로 대체된다. 한 음악을 마주하며 끝내는 지하수로는 ‘도피’를 도주로, ‘탈출’을 ‘탈주’로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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