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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20. 2024

재난을 펼치고, 좌절조차 집어삼킨


“토마스 엘세서가 멜로드라마에 관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비극의 형식(들)이다”. (…) 

멜로드라마 장르는 불가능성, 지연, 항복에서 출발한다.” 

-히토 슈타이얼-


김경수는 『밈의 계보학』에서 한국 사회의 밈 문화는 속도와 인식 간의 낙차를 응용했다고 말하며 이를 서스펜스에 빗댄다. 이 과정에서 애드리브는 실패를 겪어 비천함에 물든 ‘개드립’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밈에 대해 갖는 생각이 바로 서스펜스인데, 왜냐하면 디지털 밈의 특성은 (비)천함에 많은 것을 기대기 때문이다. 먼저 서스펜스라는 용어를 톺아보자. 알프레드 히치콕은 정보의 낙차에서 비롯되는 스릴감을 ‘서스펜스’라고 칭한다. 이를 따르면 작중에서는 인물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작품 밖의 관객이 알고 있을 때 어떠한 ‘낙차’가 생겨난다. 어머니가 뜨개질에 열중한 사이 거실에 홀로 남은 아기가 뜨거운 물이 끓는 주전자를 향해 걷는 일 등이 그렇다. 중요한 건 이 감정의 응용이다. 히치콕은 서스펜스를 로맨스 장르에 결합하면서 두 연인의 사랑이 (비)천함을 획득하는 일을 보여준다. 특히 1970년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중심으로 멜로드라마가 당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수용한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멜로드라마의 ‘낙차’는 현실에 져버린 이들의 감정적인 추락에 빗대어졌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멜로드라마에서의 낙차란 일종의 ‘투신’이라는 것이다. 이후 한국에서는 김기영의 <하녀>나 오즈 야스지로의 <바람 속의 암닭> 등의 작품에서 해당 사실이 발견되어 공표되기도 하는 등, 영화에서 서스펜스는 추락의 과정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존 머서와 마틴 싱글러는 이데올로기를 “사회가 자신을 영속화하고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여한 이미지”라고 지칭하면서, 멜로드라마를 “실패와 불신, 아이러니, 웃음과 관객으로부터 다른 모든 환영받지 못하는 정서들이 야기시키는 많은 과장된 순간들”로 설명한다. 이 맥락에서 멜로란 비천함에 대한 환대로서, 우리가 우발적으로 겪을 수 있는 추락들을 ‘환희’로 바꾼다. 중요한 건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런 투신의 과정을 무대 위의 아티스트가 팬들에 안기는 것과 같은 부류의 ‘정동’으로 바꾸는 일이다. 밈은 많은 경우 시대착오적인 이미지로 표상되며, 그와 같은 낙차에서 개개인의 지위가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을 때 벌어지는 ‘서스펜스’로 동작한다. 어떤 경로든 간에 과거에서 재발굴되어 현재에 누설된 이미지는 명목상에서 매끈한 표면으로, 자신의 지위와 주변부를 지우는 방식으로 작동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끄러움은 일이 잘 풀려가고 있다는 점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미끄러진다’는 건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후회와 비탄을 안긴다. 오늘날 디지털 밈은 그런 점에서 실패와 비천함의 감정이 디지털 표층에 누설된 것처럼 보인다. 디지털 밈은 사회의 불량한 부분이 결정화되거나 한 게 아니라, 인간의 고통이 타인을 치유하기 위해 선택하는 무작위적 연대의 한 징표다. 


마리아 투마킨은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에서 현대 사회에서 이해의 가치는 연대가 아니라 껴안는 일에 있다고 말하며, 이해는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따르자면 이해는 자기만족적인 환상이기보다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과정으로써, 실패와 좌절을 마주하기를 요구하는 ‘태도’다. 우리는 영원히 타자를 이해할 수는 없다. 이 사실은 자명하고 또 명징하다. 하지만 우리가 바로 실패와 좌절을 마주하면서 후회하고, 또 비탄감을 느끼기에 서로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게 가능하다. ‘미끄러짐’에 약간의 마찰을 가하면 이 일이 ‘걷기’가 된다는 점을 떠올리자. 미셸 드 세르토는 “걷는다는 것은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고유의 것을 추구하는 것과 부재의 상태가 무한히 지속되는 과정이다.”라고 말한다. 한 대상이나 사건, 주체에 대한 이해는 이를 대하는 태도와 그에 안길 수 없는 상태가 양립하는 일을 가리킨다. 특히 걷기가 미세한 추방으로 조립되었다고 일컫는 대목은 오늘날 밈의 속성이 왜 후회와 비탄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일에 도움을 준다. 밈은 자신의 주변을 지운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폐허에 선다. 이후 폐허에 선 주체는 오히려 이 매끄러움이 탈압박과 시대착오를 일으킬 근거가 된다는 점을 발견한다. 이때,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디지털 밈이 시대착오를 자기 삶의 동력원으로 삼는 것과 우리 사회가 폐허로 변해가는 일을 구분해야 한다. 밈의 출현은 특발적이지 진화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여로는 건포도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그냥 나는 편향되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본 것을 보려고 한다. 다양한 시선을 내가 다 하는 게 아니라, 남들과 함께하면 되니까.”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블로그 통계를 언급하면서, 자신과 비슷한 나이와 성별의 유입지표가 형성되는 것을 보며 자신의 글이 의도치 않게 패거리를 형성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고 진술한다. 이른바 “어떤 전제 없이 제로에서부터 쓰는 글”은 그에게 아마추어리즘의 형성 근거가 된다. 이 문장은 편향이라는 말을 터널시야의 한 표현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인간이 겪은 고통의 파편을 두고서 다른 이와 함께해야만 비로소 하나로 나아갈 수 있음을 표현한다. 이른바 착오란 잘못된 도착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로 나아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추락을 수행하는 행위인 것이다. 시대착오는 우리가 잘못된 시기에 태어났음을 인정하기보다 어떠한 실패의 감정을 두고서 ‘낙차’를 투신으로 갈음한다. 만약 밈이 매끄러운 표면에서 실패의 감정을 껴안는다면, 밈은 우리에게 걷기를 수행하기 위한 발판이 되어줄 테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 입장에 서는 일은 추락의 예비 동작이기보다 자기에의 환대에 가깝다. “환영받지 못하는 정서들이 야기시키는 많은 과장된 순간들”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밈이 사회학적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밈은 패배의 정서를 갖고 작업하지만 자신을 과장해서 보여주지는 않는다. 단지 감정적인 굴곡만이 대비를 형성할 뿐이다. 


디지털 밈을 두고서 남성적인 문화에 빗대는 일은 많은 부분 실패의 감정과 연결되었다. 오늘날 밈에 대한 이해 중 하나는 패배자 남성을 가리키는 인셀(Incel)과 연결된다. 이 논의에서 밈은 실패의 감정을 갖고서 작업하는 자기번식의 생물학적 대안 행위다. 이 이야기도 물론 흥미롭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오늘날 실패는 더 보편적이고 문화적인 상황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경쟁 사회를 떠올려보자. 신자유주의 이후 서브컬처에서 보편화된 감정 중 하나가 바로 실패의 감정이라는 사실 말이다. <헌터X헌터>나 <미래일기>, <배틀로얄> 같은 작품을 보면 여기서 ‘생존’은 ‘성공’과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생존은 다른 모두를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잔혹하다.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다른 모두를 떨어트려야만 하는 상황은 배틀 장르에서 극단화되어 살해와 제거의 과잉적인 징후로 표출된다. 특히 밈이 배틀 장르와 공명하는 지점은 존재가 표면에 내쳐진다는 점이다. 생존이라는 말이 삶에 대한 다른 표현이 되어버린 세상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전면전에 나설 수밖에 없다. 생존이라는 말에서 개인의 삶을 탈역사화하고 또 신화화된다. 특히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민중들이 시대착오적인 재몽타주를 실행하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고 말하면서, “이른바 자신들 기억의 내재적-물질적이고 신체적인-힘을 형성하는 자신들의 잔존으로 살아남”았다고 언급한다. 


밈도 그렇지만 이여로의 자기고백은 어딘지 모르게 들뢰즈의 소진 개념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들뢰즈는 『소진된 인간』의 첫 문장을 “나는 소진되었다”로 적고 있으며 이 대목에서 ‘폐허’는 타인에 어떤 이해를 요구하기보다 모든 이해와 좌절조차 집어삼킨 곳이다. 특히 디디-위베르만이 아비 바르부르크의 작업에서 발견한 것은 “이질적인 요소들의 혼합, 이성주의와 신화의 혼합”이라는 혼성모방이었다. 디디-위베르만은 “모래알에 지나지 않는 개인적 기억을 이어붙이기 위해 (…) 재난을 펼쳐야 했다.”고 서술한다. 이어서 그는 “이 역사적 재료 속에서 무엇인가를 읽기 위해서 나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과거를 향해 다시 거슬러 가면서) 시간을 재몽타주 해야 했고, 심지어 (연대기 안에서 이접하는 요소들을 함께 재조립하면서) 시대를 재몽타주해야 했다.”고 술회한다. 마찬가지로 밈을 혼성모방으로 언급해둘 수만 있다면, 여기서는 대하는 태도와 안길 수 없는 것들의 양립이라는 ‘걷기’를 떠올리게 된다. 한 밈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수직적 낙하로 인해 바닥조차 마주할 수 없는 시대에 일정 부분이나마 마찰력을 만들어주는 힘이다. 밈이 대변하는 것은 우리 세계가 얼마나 모순되고 분열적인지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이와 같은 징후는 우리들의 세기를 완전히 죽여놓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시대착오성’은 ‘현대성’의 도피처일 뿐이고, 거울 속에 세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밈은 트롱프뢰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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