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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17. 2024

그 영화는 문제아지만 최강


1.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를 감상했다. [다크나이트 트릴로지]에서 정작 1편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전체 트릴로지에서 <다크나이트>만 봤거나, 혹은 이름에 끌려 <라이즈>까지 보았을 몇몇 이들 중에 하나였다. <다크나이트>가 한편의 영화로서 완결성이 있었던 덕도 있지만, 무언가 1편은 <다크나이트>라는 이름에 비해 빛이 바랜 감이 있었다. 팀버튼이 1992년에 만들었던 배트맨 시리즈가 바로 ‘리턴즈’라는 부제를 달고 있어서, 아무쪼록 ‘비긴즈’는 그 이름의 연장선에서 생각되었다. 하지만 <비긴즈>는 생각보다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후속작에 비하면 원작의 분위기에 더 가까울 뿐더러, 무엇보다 <라이즈>에서 들었던 여러 의구심을 해소하는 일에 도움이 됐다. 라스 알 굴의 등장이라던가, 혹은 이야기 전체를 수미상관으로 완성하는 일에서 ‘추락’의 역할이라던가 하는 일이 그렇다. 


이야기는 익숙하다. 어린 브루스는 부모님이 눈앞에서 강도에게 총을 맞고 죽는 걸 목격한다. 이후 방황을 하며 라스 알 굴 산하로 들어가 전투기술을 배운 후, 고담시를 수호하는 배트맨으로 거듭난다. 이 과정에서 브루스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해주셨던 덕담을 떠올린다. 우물에 빠졌던 브루스는 추락이 죽음의 일종이기보다 올라가려는 마음에 가깝다는 점을 깨닫는다.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그러니까 ‘산다는 것’이다.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말하는 선과 악의 구분에서 전자를 일어서는 힘에 빗댄다는 것이다. [트릴로지]의 큰 줄거리는 브루스의 선친이 사망한 이후 악의 구덩이에 빠진 고담시가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다. <라이즈>에 이르러서는 베인의 통치에 반발한 시민들, 그것도 경찰이나 범죄자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희망을 갖고서 악에 대항한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의 백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브루스가 불살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 ‘악’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브루스가 <라이즈>에서 베인이 살았던 감옥에 빠지는 일은 캐릭터의 서사에서 신화적인 죽음을 묘사한다. 죽음을 마주한 브루스지만, 이내 감옥을 탈출함으로써 타락에서 돌아오게 된다. 특히 이 설정은 과거에 있었던 첫 번째 탈출이 탈리아 알 굴이였고, 그녀가 감옥에서 태어났다는 점과 대비된다. 브루스는 한 인간이 악에서 출발했든, 아니면 잠시 악에 빠졌든 간에 중요한 건 추락에서 다시 일어서는 법이라고 말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선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단,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어디까지나 선으로 돌아오는 법이라고 말이다. 가령 <다크나이트>에서 시민과 범죄자는 조커의 예상과는 달리 양쪽 모두 폭파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조커는 누구에게나 악에 대한 본능이 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인간은 악하게 태어났을 수도 있고, 혹은 잠시 악의 길에 들어설 수도 있다. 그러나 선으로 돌아오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외도를 하더라도 마지막에만 선한 행동을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모든 생명의 의지가 존중받듯이 선으로 향하는 길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존중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거나 할 수는 있지만, 선을 행하려는 마음은 그보다 더 강하다. 결과적으로 [트릴로지]를 요약하면 주제의식은 “모든 인간에는 죽음 충동이 있지만, 삶에 대한 의지는 그보다 더 강하다”쯤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설정은 절망에 빠졌던 브루스가 잠시 타락했다가 고담을 구하는 영웅으로 돌아오는 모습, 악의 구덩이에 빠진 고담시를 정상궤도에 올려놓는 과정에 연계된다. 브루스에게 고담은 어떤 면에서 거대한 원초자아처럼 보이는데, 이를 구하는 일은 자기를 구하는 일과도 같았다고 볼 수 있다. 


2. 왜 생명은 깊은 잠에 빠지는가? 잠자리에 드는 일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는 경험과 깊이 연결된다. 몸을 움직이는 일부터, 오늘 하루엔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고민하는 일까지. 단어에서 사용되는 ‘일어난다’는 말은 우리가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사실관계를 전제한다. 가령 우리가 잠자리에서 일어서는 일은 수면 상태의 중단을 뜻한다. 더 잠을 잘 수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에 잠에서 깨려면 알람을 두는 것과 같은 외부 원인을 두어야만 한다. 한편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사건사고는 확률 분포상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에 속한다. 근 미래에 벌어질 수도 있고, 먼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데 이런 일들은 ‘예측’할 수는 있지만 그 실현의 과정이나 시기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특정해두는 일이 불가하다. 결국 ‘일어남’이란 이를 위해 어떤 형태로든 중단을 유도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많은 경우에 ‘일어남’이라는 말은 벤야민의 맥락으로 발의된다. 파국의 열차를 멈춰 세울 방법은 ‘폭파’뿐이라고 설명했던 일은 “자본주의라는 꿈이 세계를 덮쳤고 (…)”라는 인용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열차의 도착>을 자본주의 시대의 개막에 빗대었던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외부의 충격 없이는 깨어날 수 없는 체제에 빗댄다. 그리고 이 일은 반세기가 지날 무렵에 현실화되어, 자본주의 체제가 승리했음을 선언하는 일로 나아간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철의 장막이 무너진 일을 두고서 이제 세계는 하나의 울타리를 안게 되었다고들 말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만한 건,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도 힘든 현재 상황은 마치 “일어날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진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종말은 그런 일이 ‘벌어질’ 틈도 제공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아주 매끈하게 봉합되어버린 이 꿈들에서 우리가 ‘바깥’을 상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후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에 대한 멸칭으로 ‘가속주의’를 소개하면서 이제 세계에 ‘대안’은 없어졌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의 내부를 공유한다면, 지구를 떠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는 자원이 모자라면 다른 국가를 정복하면 됐고, 혹은 낯선 땅을 개척하면 됐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깊은 심해를 제외하면 우리가 알 수 없는 곳은 거의 남지 않았다. 지구촌이라는 말은 우리 모두가 건너건너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뜻과도 같다. 이제 비밀은 없고, 오히려 숨기는 일보다 속이는 일이 더 편해졌다. 이는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숨길 만한 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영화가 더는 비밀을 숨길 수 없게 된 것처럼, 오히려 기술은 사실을 숨기는 게 아니라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오늘날 영화는 한 비밀을 숨기기보다 우리에게 아직은 세상이 괜찮다고 속이는 쪽에 더 가깝다. 


하나가 되어버린 세계는 우리가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지시하거나 투입하기보다 다가오는 것을 마주하는 쪽에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여러 번 반복되며 한 사건이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지만, 그런 일어남의 끝은 항상 우리 자신이었다. 한 세계를 끝낸다는 것은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도 같다는 점을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죽음에 이르는 여정이 낯선 꿈을 만날 때 삶은 난파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꿈의 세계지만, 이 꿈은 깨어지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속인다. 쉽게 말해 ‘일어남’이란 중단할 수 없으면서 통제가 불가한 하나의 거대한 흐름에 가깝다. 영화는 우리를 잠시 죽음에 데려다 놓는다는 점에서 작은 죽음과도 같으며, 그러니 만약 영화가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영화가 중단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아직은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고, 그러니 당신은 희망을 잃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3. 많은 영화에서 지하실은 비밀을 감춘 곳으로 묘사되고는 했다. 이는 특히나 플롯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틈’이 벌어지는 일을 가리켰다. 이를테면 <케빈 인 더 우즈>에서 지하실은 작품이 숨겨놓은 진실이 드러나는 곳이면서, 한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다. 영화는 세계가 숨겨놓은 비밀이 지하실에 있음을 보여주면서 이를 끝까지 밀고 간다. 지하실에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지하에는 온갖 이야기에 있던 괴물이 감금되어있고 그 끝은 크툴루와 비스름한 무언가가 있다. 이후 주인공이 한 선택을 거절하면서 이야기의 바깥에 나서기를 거절하면, 영화는 초월적인 괴물로 말미암아 이야기 자체를 끝내버린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일까? 꿈에서 깨어나는 법은 오직 외부를 받아들이는 방법 말고는 없다는 점일 테다. 


특히 그전에도 조짐은 있었지만, 판데믹을 거치며 이런 상상이 더 강화된 느낌이 있다. 온 지구가 하나의 대사건을 겪는다는 점은 우리가 사는 곳이 지구가 아니라 하나의 ‘장소’라는 점을 주지케 했다. 어디를 가도 사람들은 같은 사건을 겪었고, 반대로 그 사건은 마스크를 통해 모두의 내면을 맴돌았다. 무언가에 의해 덮여졌고, 그 안을 맴도는 언어는 스크린 안에서만 존재하는 몇몇 존재들의 입지를 강화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말하기를 점점 더 주저할수록 꿈에서만 존재하던 것들은 마치 오페라의 유령처럼 등장해온다. 죽었던 몸에 생기가 돌아오고, 잃어버렸던 꿈들이 자리를 되찾고 나면 이 안에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 아니라 아직 벌어지지 못한 균열만이 남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서 지하실은 세계의 틈새에 관해 말해준다. 만약 영화가 매끄러운 표면으로 이루어진 꿈이라면, 이 안에서 탈출할 방법 같은 건 없을 테니 말이다.


봉준호의 <기생충>에서 지하실 장면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영화의 시작이 지하실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하는 우리와 같은 세계중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라는 점에서 지시하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무대는 지상으로 한정되므로 지하는 서로 다른 공간처럼 여겨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영화가 안에서 지하실을 드러낼 때 이들 세계는 하나의 세계로 편입된다. 그리고 영화는 ‘바깥’을 상실해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으로 변모하면서, 이들 세계의 기쁨과 슬픔 모두를 내부에 가둔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마지막 장면이 기만적인 이유가 그렇다. 영화는 마지막에 지하실에 내려가는 인물의 모습을 현실의 아우슈비츠 장면과 병치한다. 이 둘은 시간대와 장소 모두 어긋나있어서 영화 내부가 아니라 ‘바깥’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마치 영화가 우리의 현실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는 동시기에 지구 반대편에서 진행 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에 관해 자신의 영화를 연결한 바 있다. 이 논쟁은 영화와는 별개의 사건과 관점이었지만, 지하실 장면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현실에 대한 하나의 충격으로 응용한다는 점에서 지구 세계를 하나의 거대공동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이 생각은 눈을 떴을 때 무언가 ‘일어난다’라는 점을 근간에 둔다. 어디를 가든 떠날 수 없다는 말은 우리에게 실낙원이 사라졌음을 뜻한다. 하나의 체제가 승리하고, 전 지구적인 통신시스템이 발안된 상황에서 지구는 판게아 시절로 돌아간다. 여기서는 인간의 왕래가 끊기고 동물의 길이 들어선 자리를 차지한 게 무엇이었는지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꿈을 꾸는 이들이 영화를 보며 느낀 것은 우리 세계가 지구를 고쳐야만 비로소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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