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Jul 05. 2024

시급하지 않은데 인기만 많은 문제


“영화는 일종의 포스트모던적인 자기서술이다.” 레이 초우의 <원시적 열정>은 포스트 시네마를 이해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초우는 이 책에서 중국의 영화를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 도리어 그와 같은 오리엔탈리즘을 해체하는 단서가 된다고 말하면서, ‘원시’라는 말을 ‘시원’으로 바꾸어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특히 초우의 다음 서술은 오늘날 ‘포스트’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와 행동적 지위에 대한 좋은 비평이 된다. “즉 번역작업은 그 대부분이 ‘이질적인 것’을 ‘토착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다는 소망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가정이 따르는데, 그것은 ‘토착적인 것’이 ‘고유한’ 참조점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번역은 이질적인 것이 ‘토착적인 것’에 영향을 주거나 그것을 오염시키는 걸 허용하는 과정이다.” 초우의 관점을 따르면 포스트 시네마에서 ‘포스트’는 ‘이후’의 맥락으로서 이질적인 무언가, 비전형적인 무언가로 이해되기에 십상이지만, 이는 사실 “’이질적인 것’을 ‘토착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은 마음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외부의 관점으로 바라본 ‘포스트’라는 말은 우리가 시네마를 두고서 ‘본래’ 갖고 있던 것처럼 여기게 한다. 이를테면 말테 하게너는 오늘날 ‘영화’는 장소, 상영, 사운드, 스크린 등의 다양한 면에서 일상에 녹아듦을 지적하면서 이와 같은 유래는 모두 영화의 후시성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포스트 시네마를 ‘필름’의 이후나 ‘디지털’ 이후를 가리키는 일이 아니라 영화에 본래부터 내재한 구성요인을 실현해가는 고정으로 평가한다. 대표적인 것은 바쟁의 완전영화론으로, 바쟁은 영화가 리얼리즘을 실현하려는 관념이라면 언젠가 그 관념은 ‘리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의견은 영화의 기술론에 접목되면서 ‘영화’는 어떠한 구조나 장치의 조합이 아니라 ‘영화’라는 가치를 실현해가는 과정과 그에 따른 기술의 발전, 문화상의 발전, 사회의 발전 등을 가리키는 게 되었다. 


초우는 토착적인 게 중국의 영화를 바라보는 데 있어 하나의 ‘고정관념’이 된다고 말한다. 바꾸어 서술하면, 우리가 영화를 어떻게 보든 간에 고정점이 있으므로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포스트 시네마에서는 무엇이 고정점일까? 고정점은 우리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좌표계가 되면서도, 특정한 영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가 된다. 오늘날 포스트 시네마는 이와 같은 울타리에 의해 가로막히거나 혹은 보호받는다. 즉 포스트라는 말은 ‘영화’라는 가치를 실현해가는 과정에서 이를 포기하지 않거나 주저앉지 않게 돕는 ‘울타리’가 되어준다. 아마도 인간적인 의미에서 영화는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이유와 그 가치의 실현에 관련될 것이다. 사람들이 각자의 고유 영역을 갖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이 왜 필요한지를 생각해보자. 그린버그는 피카소와 브라크의 환영주의적 회화에 관해 “평평한 표면의 저항적 실재, 그리고 이념화된 깊이를 낳으면서 그 표면 위에 나타나는 형상들 사이를 더 명시적으로 변별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그렇지 않다면 그 형상들은 너무나 직접적으로 표면과 하나가 되어서 오로지 표면 패턴으로서만 존속할 것이다.”라고 적는다. 여기서 그린버그는 그림에서 콜라주로의 전환을 강조하면서 표면과 입체 간의 차이를 서술한다. 다른 한편 들뢰즈는 표면에 대해 서술하면서 “외재성은 항들이 변화하지 않고도 관계가 변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마누엘 데란다는 “부분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진정한 종합”이 된다고 말하는데, 중요한 건 “’자기 원인으로서 [구성 부분들]의 속성들을 지니지 않는다.”는 진술이다. 전체가 부분으로 환원될 수 없다면, “시네마가 일종의 포스트모던적인 자기서술”이라는 초우의 발언은 시네마는 포스트시네마로 환원될 수 없으며, 포스트는 시네마를 구성하는 원인이 아니라 구성 요인들 간의 ‘간극’에서 전체적인 ‘형상’을 이루는 콜라주 상품에 더 가깝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간극’이란 결국 표면상의 패턴으로만 인식되는 것들을 활인화하는 것, ‘입체’를 구성하는 일이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정치적으로 나타나기는 차이의 나타남”이라고 말하면서, “정치는 인간들 사이 공간에서,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인간의 바깥에 있는 어떤 것에서 생겨난다. (…) 정치는 매개하는 공간에서 탄생하고 관계로서 구축된다”고 적는다. 들뢰즈가 외재성에 관해 서술한다면 디디-위베르만은 그와 같은 외재성을 ‘차이의 나타남’으로 적으면서 정치가 가꾸어가는 인간 공동체의 형상에 대해 서술한다. 아비 바르부르크의 콜라주 작업을 연구했던 그에게 ‘간극’은 정치가 구성되어 편집되기 위한 요인이었다. 얼기설기 얽힌 이미지 조각에서 패턴이 등장하고, 이와 같은 발견은 민중들을 노출시키고 형상화하는 단초가 된다. 영화에서 ‘관객’들이 의미의 조각을 발견해 의미논리를 구성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바깥’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영화를 받아들이는 신체 이외의 문제풀이를 따른다. 의미는 체화된 지식의 바깥에서 생성되므로, 영화는 인간이 몸담은 세계를 최대한 재현하려 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바깥의 것들을 보여줌으로써 내부의 의미를 구축한다. 말하자면 영화가 자기서술적이라는 점에서 관객의 신체를 구성할 때, 포스트는 바깥의 것들을 보여줌으로써 의미논리를 세우고 ‘바깥’은 관객이 중심에 있는 신체로 돌아올 수 있는 방향감각을 정위한다. 이때 사람들이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은 스크린의 표면에 새겨진 패턴들을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구성하는 ‘간극’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일과도 같다. 포스트 시네마는 이질적인 것이 토착적인 것으로 배치되는 과정, 즉 차이를 통해 구성되는 정치행위이자 관객 공동체를 실현한다. 이처럼 우리가 시네마라는 좌표계로 돌아오는 과정에서는 포스트라는 외재성이 구성됨으로써 ‘패턴’을 ‘입체’로, ‘바깥’을 ‘차이의 나타남’으로 고쳐 적는 과정이 수반된다. 


포스트는 차이를 드러내어 이를 통해 공동체를 구성하는 방법론이다. 오늘날 포스트 시네마 담론에서 주로 소환되는 디스포지티브는 구성과 배치에서 시네마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차이의 방법론을 생각해보게 한다. 이를테면 대개 변화는 앞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진화와 같은 단어로 설명되는데, 이 경우 우리는 무엇을 얻거나 잃을지를 줄 저울질하면서 신체의 형상성을 주체의 성질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포스트 시네마에서 주체는 영화가 선보이는 의미의 조각들에서 패턴을 구성하는 일에 주력하며, 여기서 하나의 ‘입체’를 구성하는 일은 정치적인 행동에 대한 원리의식이나 증명이 된다. 그러나 트롱프뢰유는 눈속임에 불과할 뿐, 실질상에서 질감이나 촉감을 토대로 일상에 변화를 불러오지는 못한다. 트롱프뢰유는 의식의 표면을 대변하지만 실상은 사이 공간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체적으로 외부를 형성할 능력을 상실했고, 또한 ‘바깥’이 없으니 ‘발견’도 없다. 그렇다면 포스트라는 말은 결국 안전을 위한 것이기보다 “언어의 바깥은 없다”고 말하는 식에 불과해서, 어떠한 발견을 위해 사건을 만들어내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도되고야 만다. 포스트 시네마를 구성하는 일에서 중점은, 우리가 의미의 구조를 꾸리기 위해서 서로를 특정하고 이 과정에서 성립하는 언어가 상대방과의 궁극적인 ‘바깥’을 상실하게끔 하는 ‘차이’의 공간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가령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을 두고서 사용하는 프레이밍이라는 단어는 한 사건을 포착해서 이에 울타리를 형성하는데, 여기서 프레임은 이질적인 것을 지우고 그게 본래적인 것처럼 ‘착오’를 일으킨다. 그리고 이 착오는 우리가 본래 속해있던 곳에서 동떨어진 다른 무언가를 돌아가야 할 곳으로 선정한다. 이와 같은 일에서 벌어지는 오착은 변화라는 말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만이 아닌, 본래 갖고 있던 영역을 재배치함으로써 개인의 역량이나 문화를 다시 발견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은 포스트 시네마적인 사고는 우리의 문화생활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을까? 유리 로트만은 한 문화는 마치 생태계와도 같아서 모종의 항상성이 존재하고, 이를 따라 문화는 어떠한 변화나 진화의 방식을 따르기보다 자기에로 돌아가려는 성질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메모는 그와 같은 돌아가려는 성질에서 임시적으로 벗어나는 방법인데, 메모는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한 자리에 둔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이를 해석하고 번역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같은 자신이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것에 시차가 존재하므로 어느 정도가 착오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이와 같은 점은 오히려 의미의 내부에로 돌아가려는 의도를 내포하기에 단순한 기록보다 더 자기애적인 속성을 띤다. 가령 강덕구는 세마코랄의 좌담회에서 “블로그 활동은 제 자신을 계속해서 파괴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즉, 블로그는 보금자리이기도 하지만, 이명을 늘려 가는 훼손의 의미도 있습니다. 저는 두 명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이연숙이 말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 사변적이고 중요하지 않고 변두리적인 것”을 수식한다. 이들에게 “블로그는 자신의 멜랑콜리한 정서를 처리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시급하지 않은데 인기만 많은 문제”를 처리하는 곳이다. 어쩌면 블로그는 현실과는 동떨어져서 급하게 해야 할 이유도 없고, 자신이 생각해봤을 때 당장에 하고 싶어하는 일, 자기애를 구성하는 것 중에 인기를 담당하는 멜랑콜리의 한 부분일 수도 있다. 포스트 시네마 또한 반향정위를 통해 좌표계를 구성하기에 그 안에서 형성되는 주체는 대안이나 탈출구 없이 갇혀있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와 폐쇄적인 세계에 사로잡혀있을 수 있다. 동시에 정말로 바깥의 사유라기보다는 여러 번 중첩되어 센 강도를 지니게 된 몇몇 의미들에만 집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포스트’는 출발점과 도착점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기에, 자신의 이질적인 면을 속이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중요시되는 건 번역의 과정이다. 번역의 과정은 항상 정확하게 같은 의미만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번역의 과정에서 손실되는 데이터패킷은 우리가 이를 다른 곳에 전달하려면 필수적으로 부가되는 세금과도 같다. 그렇다면 번역이란 이질적인 것을 토착적인 것으로 속이는 일이기보다, 한 문화나 의미가 다시금 우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완전영화에 대한 신화가 결국 그 자체로 완전함이란 없다는 ‘신화’로 이해된다는 사실을 전할 뿐이다. 예를 들어 온라인상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음원 콜라주 작업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오민이 앤드루 유러스키에 대해 서술한 글에서, "여러 글을 동시에 읽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여러 형태를 동시에 자세히 보는 것도 쉽지 않지만, 여러 소리를 동시에 듣는 것은 가능하다."고 언급한 대목이 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영화 <메모리아>에서 이 개념을 끌고 가면서 여러 사운드 폼들의 집합체를 주체의 현실에 삽입한다. 쿵!하는 소리는 화면 안의 어느 곳에서도 속하지 않기에 도리어 외화면 밖에서 출처를 찾게 되는 면이 있고, 그와 동시에 이것이 한 소리로 특정되지 않고서 여러 소리로 이해되기에 자연스레 그 뿌리 또한 여러 이미지를 동시다발적으로 소환해내는 효과가 있다. 즉, 표면은 어느 정도 완전하고 매끄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실상에서는 여러 이질적인 것들이 마치 본래적인 것처럼 우리를 교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음원 믹싱 작업은 평소라면 하나의 곡으로 느껴졌을 음원의 분당 속도, 치고 들어오는 부분, 악기들의 맺어짐과 끊어짐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포스트의 담론과 닮아있다. 포스트는 차이를 위해 시작이나 끝을 두지 않으며, 단지 어디로 돌아올 것인가, 추락의 장소는 어디가 되어야 하는지만을 물을 뿐이다. 포스트 시네마 담론에서 시네마라는 말은 이처럼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그러나 차이를 통해 발생하는 무위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외면하고 싶은 것들의 보따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