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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11. 2024

세계의 구축과 파괴의 확장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구출은 사물이 타자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면서, “의미있는 세계는 타인이 있는 세계”라고 말한다. 타인이 없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아무런 의미 작용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거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서로에 거리를 두지 않는다면, 의미가 채워질 곳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우리가 영화의 세계에 침투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영화가 우리의 현실에 비집고 들어오는 무언가일 수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우선 영화는 기술적으로 상을 맺기 위해 적정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했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암실은 이를 들여다보는 관찰자가 화면 너머의 세계를 ‘구출’해야 한다고 여기게끔 한다. 그런데 만약 관찰자가 이를 들여다보면서 어떠한 의미를 발견한다면, 이 세계는 우리가 아는 무언가는 아닐 것이다. 가령 뤼미에르 형제의 초기 영화 중에서 <물 뿌리는 사람>은 촬영을 위해 의도적으로 상황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자연적인 세계는 아니다. 외부에서 의도가 개입했다는 점이 관찰자와 영화 간의 거리에 의해 숨겨지면서 영화 속 세계는 마치 ‘우리’인 것 마냥 여겨졌다. 영화에서 ‘간극’은 영화가 또 하나의 타자임을 숨겼고, 이를 따라 영화에서 재현의 문제는 자기 고백과 연결되었다. 


상바오는 『주변의 상실』에서 ‘자기’를 증명하는 일은 ‘자기’의 존재증명을 다른 사람의 논리와 프로세스에 맡기는 일이라고 비판한다. ‘자기’라는 건 증명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냥 원래부터 있으니까 그걸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를 고민하기만 하면 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초기 영화의 주된 고민은 영화에 담긴 이미지가 실제 현실임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 그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었다. 정지된 사진이 사람의 영혼을 빨아들인다는 불신을 주었던 것과는 달리, 영화는 현실과 같은 속도를 유지했기에 현실 세계에 무리 없이 녹아들었다. 이때 영화가 현실과 동시대에 있음을 알릴 조건은 영화와 현실 간에 관측될 만한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영화는 본래부터 거기에 있을 뿐인 타자가 아니라, 관찰자의 논리와 프로세스를 따라 ‘자기’를 증명하려 했다. 영화는 자신이 속한 곳이 우리와 같은 현실이 아니라 또 다른 ‘영역’임을 증명하려 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영역을 설정하는 일이 곧 의미를 결정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정하는 디디-위베르만과 들뢰즈의 관점에서 이를 “다른 문제와 층위에 대응하고, 서로 낯설었던 문제와 결합해 있던 세계를 재단하는 교차지점”으로 설명한다. 자신에 대한 서술적인 방법인 ‘이미지’는 한 세계를 갈무리해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엮어내는 ‘방법론’이다. 


다음으로 미셸 푸코가 자기고백의 행위로서 ‘고해’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푸코는 고해를 ‘자기 자신의 증언’으로 일컬으면서 “중요한 것은 (…) 죄인이라는 의식,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려는 의지를 표명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자기고백을 두고서 증언과 벗어남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한 푸코의 맥락에서 영화는 현실을 증언하고, 어떠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두 가지 힘으로 풀이될 수 있다. 즉, 정보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한 사람 안에 공존하는 셈인데 이는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어떤 정보를 나 자신에게 다시 전달하는 경우를 가리킨다(김수환).” 일컫자면 ‘영역’은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서 이에 벗어나려는 의지의 표명, “영화에서 ‘틈새’를 발견하는 일은 이곳 세계를 타자의 현실로 탈바꿈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얼핏 보았을 때 영화에 거리를 둠으로써 그에 접촉을 피하려는 일처럼 보이지만, 도리어 영화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거리가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바로 이때 영화는 한 시대가 내포한 ‘의미’를 관계 속에서 ‘구출’한다. 예컨대 영화에서 영역을 전개하는 건 자기고백의 논리를 마련하면서, ‘세계’를 ‘문제’ 안에서 구출하는 일이다. 영화에서 문제는 여러 관계 안에 얽히고설켜서 쉽사리 손을 댈 수 없고, 또 이게 이미지의 흠결무고함을 증명하지만, ‘의미’는 한 세계가 자신의 영역을 전개함으로써 보존된다. 


많은 경우 영화는 한 세계로서 우리가 진행 중인 시공간에 자기를 틈입할 수 없노라고 여겨진다. 반대로 그 자신이 구원을 바라며 틈새를 내비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한 시점에 대한 세 번의 반복이 이루어지면서, 한 문제에 엮인 여러 관계를 쉽사리 풀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두 아이는 영화 후반부의 놀이터 장면에서 보여지듯 한 세계에 갇혀있고, 영화의 의무는 이들의 세계를 문제 안에서 구출하는 것이다. 영화는 세 번의 반복에서 영역을 구축하면서 이곳이 우리가 파악한 현실과는 다른 무언가임을 알리고, 복잡다단하게 연결된 문제의식과 층위를 유동적으로 분리해낸다. 이제 정지된 것만 같았던 순간이 마술적으로 풀려나면서, 영화에 숨겨졌던 거리감은 관찰자의 논리와 방식을 명중하는 회로가 된다. 이때 벌어지는 것은 우리가 영화를 두고서 투입했던 사고와 판단과정이 중단되고, 한 현실이 외부에의 구원을 바라며 내비치는 틈새이다. 영화와 현실이 서로 다른 곳임이 알려지고 나면 이제 영화는 우리가 손을 내밀 수 있을 타자가 된다. 그러니까 이는 우치다 타츠루의 말처럼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것에 대해 개방 상태가 되는 것”, ‘돌아갈 곳이 없고 치유되지 않는 결함에 끝없이 고통받는 것’이다. 내-비치는 세계는 들뢰즈의 말마따나 “부재하는 외부 세계의 표현, 가능 세계의 표현”이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의 종결편에서 데쿠는 토무라에 자신의 개성인 올포원을 넘긴다. 이후 토무라의 내면에서는 선대 올포원 계승자들의 의지가 발현되면서, 외부적으로는 데쿠의 주먹을 맞아 소멸에 이른다. 이때 소멸 중인 토무라는 데쿠에게 “나는 부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하고, 데쿠는 토무라에 “너는 이미 부쉈어.”라는 답을 돌려준다. 작품의 전반적인 메시지는 개성이라는 단어에 담긴 고유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만화는 개성의 발현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지만, 개성의 소유권을 이전하거나 혹은 그에 따라 인격이 깃드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작품의 전개를 위한 예외적인 편의성을 적용한다. 여기서 올포원과 원포올은 서로의 대적자로 등장하면서 하나를 위해 나머지 모두를 등지는 에티카의 가치를 선보인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필요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신형철은 이를 두고서 “몰락은 설명되는 세계가 아니라 나머지 모두를 실체로 사유하기 위한 행동”임을 지적한다. 이미 시작부터 몰락이 예견된 빌런이었던 토무라는 데쿠의 표현대로 이미 히어로 사회의 모순과 불신을 수면에 드러내면서 이를 훌륭히 입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그동안 올마이트 일인으로 유지되던 치안체제에 부재했던 외부를 부각하면서, 이와 같은 체제 이후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개성의 이양과 전파다. 에리카 발솜은 『고유성 이후』에서 이미지를 물질적 지지체와 결부지어 이해하는 것과 이미지를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 전시된 백남준의 미디어아트 <다다익선>은 다양한 크기의 CRT로 제작되었다. 이후 수십 년이 지나 CRT의 내구연한에 다다르면서 작품을 전면 보수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문제는 더는 CRT가 생산되지 않는 상황에서 작품을 전면 보수할 만큼의 중고 제품을 수급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로, 작품의 본질인 ‘디스플레이의 탑’을 유지하면서 제품을 LCD로 교체하는 것과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CRT 내부 부품을 개수하는 것이 있었다. 만약 백남준의 작품이 CRT라는 물질적 지지체에 결합된다고 볼 경우, 이와 같은 개수 작업에서 작품의 훼손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반면 작품의 메시지 자체에 집중하면, 다양한 크기의 모니터에 형형색색의 미디어아트가 표출된다는 컨셉을 이어가는 행위 자체가 곧 작품을 구성한다. <나히아>에서 올포원과 원포올의 대립은 그런 점에서 히어로를 토대로 구성된 사회 체계의 모순점을 보여주면서도, 히어로는 구성되는 게 아니라 타자의 현실을 간직하는 게 곧 삶의 영역을 지켜내는 일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히아>는 고유함이 곧 특별함이나 소중함과 같은 가치에 등치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재능은 사용하기에 따라 사람을 구하는 것도 사람을 죽이는 것도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일컫자면 히어로는 주어진 재능이나 외견에 결부지어 이해하는 것과 영웅의 모습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구분되어야 한다. 영웅은 한 현실을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에서 타인의 세계를 구출한다. 영역은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틈새를 내는 게 아니라 타자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열린다. 작품은 이에 앞서 한 개인에 내재한 가능성의 방향을 예판하는 것은 가능한지를 묻는다. 그러나 ‘열림’은 닫힘의 반대항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존재’는 비존재와 쌍을 이루지 않는다. 타인을 구하는 일은 그저 자기고백의 일종이다.  자신에서 타자를 분리해내는 일은 자기에서 틈새를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간극’을 끌어안는 일이다. 노먼 로도윅의 말처럼, 현대성은 “그 매체가 우리의 지각과 사고를 앞서나가는 자기 변형과 창조를 계속하고 있음”을 뜻한다. 현대의 영화는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기보다 적정 수준의 거리를 갖고 살아간다. 관객은 영화가 펼쳐놓은 영역에서 자기를 구출함에 따라, 영화를 물질적 지지체 삼아 현실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긍정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즉 영화를 두고서 ‘타인’이라 부를 만한 근거를 확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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