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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12. 2024

영화의 한 세기는 연결을 기능적으로 이해한다


이보라는 영화평론가의 일상을 다루는 KMDB기획에서 “엿보지 않으면 보는 것은 시작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후 이우빈은 기자 신분으로 만난 다른 영화평론가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치킨을 한 마리 시키면 껍질만 먹는 사람도 있고 샐러드만 먹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본인은 치킨의 맨살만을 먹게 된다고 말하며 “억지로라도 닭의 살이 아니라 껍질만을 원해야 하는 사람들”을 영화평론가로 정의한다. 이 말을 들으며 생각난 건, 역시나 하스미의 『영화의 맨살』이다. 영화에는 표면이 있고, 이 안에서 맨살을 끄집어내는 게 하스미의 관점이라고 본다면 그의 관점 안에서 드러나는 서부극의 사내들은 육체의 표면과 사물의 표층을 활보하는 것임이 틀림없다(김영진). 즉 ‘맨살’은 일종의 프론트라인인 셈인데, 껍질만을 원해야 하는 게 바로 비평가라는 지적은 우리가 서로 나누는 대화가 얼마나 위태로운 삶 위에 놓였는지를 상기시킨다. 가령 영화평론가는 자신이 맞닥트린 세계를 다른 이에게 설명하려 하지만 많은 경우 이는 속도의 발달로 인해 모사가 원본을 앞서나가는 상황에서 손쉽게 좌절된다. 여기서 ‘원본’은 항상 표면 사이로만 엿보이고, 그래서 껍질을 파헤치는 것은 영화평론가의 의무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이보라는 송경원이 팟캐스트에서 언급한 사례를 언급하는데, 그의 말을 따르자면 오늘날 영화비평은 점점 더 자기만의 것으로 변해가고 이를 따라 ‘영화적 에세이’가 강세를 이룰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한 사회를 설명해보려는 일이 힘을 잃고 모두가 작은 희망만을 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자리의 삶을 택한 이들을 두고서는 ‘비천하다’고 해야 할까? 여기서 영화에 대한 아우라는 분명 본질을 보고 난 후에 모사된 것에 불과하지만, 자기만의 고유성이 있기에 부분적으로 원본의 속성이 있으며 이를 따라 ‘껍질’은 경험을 보존하는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지구의 공기와 물을 붙잡아두는 게 중력이듯, 영화에서 경험을 보존하는 건 영화평론가의 의식이다. 영화가 세계를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다면 반대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경험 안에서 살아남으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 영화평론은 어떤 행위이고,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누군가는 젊은 비평가들이 ‘영화광’과 ‘시네필’이라는 단어를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시네필이 영화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사람이라면, 영화광은 세상을 영화로 바꾸려 했던 사람이라고. KDMB가 만난 젊은 비평가들이 자신의 사적 경험을 꺼내놓는 모습은 어떤 경위로든 살아가는 세상을 ‘영화’로 치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박예지는 자신을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30대 여성’으로 소개한다. 이광호는 자신을 ‘영화와는 별 관계도 없는 직장에 자리 잡은 남자’로 소개한다. 박동수는 자신을 영화평론가로 소개하지만 인터뷰에서도 짧게 언급되듯 그는 게임에도 조예가 깊다. 이우빈도 영화평론가로 활동하지만, 본업은 씨네21 기자로서 다른 평론가를 대하는 ‘기자’로서의 신분이 더 크다. 이런 식으로 나열하는 것은 전업으로 평론을 하거나 아니면 감독이라도 하는 몇몇 사람에만 ‘평론가’의 지위를 국한할 것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영화평론가가 직업이나 신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나면 그와 같은 의문은 해소된다. 오히려 영화평론가는 소속이나 집단에 더 가까워서, 명목상으로 참칭이나 대변이 이루어지지 않는 형태의 협회에 더 가까운 것 같다(실제 협회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가령 한국에서 군필 남성은 모두 예비군이 되는데, 그 누구도 자신을 예비역이라고 소개하지는 않지만 전쟁이 나면 언제든지 군인으로 자신을 ‘전환’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안다. 다른 곁가지를 제하고 생각해보면,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성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단지 나라를 지킨다는 명목만으로 같은 일을 수행하는 이 모습은 신기하기 짝이 없다. 영화평론가도 마찬가지다. 길을 가다 불이 나면 달려와 불을 끄는 시민이 알고 보니 비번 중의 소방관이었다는 사실이나, 비행기를 탑승했는데 갑자기 발생한 환자를 돌보는 의사 등을 떠올려보자. 영화평론가는 신분이나 직함이 아닌, 자신의 소중한 것을 세상에 나누고자 하는,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덮어씌우려 하는, 모두가 같은 밤을 살아간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좋아하는 대사는 “긴 낮과 밤을 쉼 없이 살아나가요”다. 우리가 낮과 밤에 관용적으로 부여하는 이미지를 제하더라도 이 대사는 생명력이 있다. 가령 낮과 밤은 영화가 시작되고 끝나는 일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엔딩 크레딧도 다 보고 나오는 편인데, 극장 직원들은 불이 켜지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다음 회차를 준비하려면 신속히 내부 청소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관객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게 불가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불이 켜지는 일은 긴 밤이 끝나고, 하루를 시작하며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고 치근대는 일처럼 느껴진다. 일요일 밤의 개그콘서트 엔딩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불이 켜진다고 해서 영화가 끝난 것은 아니다. 모두가 같은 밤을 살아간다는 믿음은 우리가 각자의 삶을 지니고서 다시금 이곳에 돌아오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해가 지고, 연등이 켜지면 마법처럼 찾아오는 몇몇 순간처럼 영화는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센과 치히로>의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려봐도 좋겠다. 혹은 <너의 이름은>의 황혼을 떠올려보자. 조금은 더 슬픔에 가까워진다면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의 황혼>을 언급해두고 싶다. 오즈의 영화는 낮과 밤이 하루를 이어나가듯이 삶에서 이어지고 맺어지는 것들이 결국에는 삶을 분절하지 못하며, 우리는 그저 긴 낮과 밤을 반복해서 살아갈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자녀의 결혼이나 남편이나 아내의 사망 같은 일은 영화의 순간으로 보면 서로를 깊게 밀어내지만 삶의 한순간으로 보면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사적 경험’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시네필이 영화를 애호하는 박물관장의 입장이라면 영화광은 온 세상이 영화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영화가 자신의 슬픔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입장인 것이다. 영화에 대한 경험이 사적 경험이 된다면 그 이유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속력에 있다. 세상이 점점 가속한다면 그 안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경험 또한 같은 수준을 유지한다는 뜻이 되므로, 우리도 결국 세상이랑 ‘같은 눈높이’를 살아간다고밖에는 볼 수 없으며 이를 따라 뒤처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이다. 


모든 것에는 표면이 있다. 연인 사이에서 성교가 진정성이 있는 행위인 것은 표면을 벗어나 서로의 생리에 같은 속도로 다가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맨살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수사적으로 보면 영화의 맨살을 탐하는 건 서로 다른 세계가 한 테이블에 놓일 수 있도록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일, 이를테면 <인터스텔라>가 잘 묘사하듯이 양쪽의 회전속도를 맞춰 성공적으로 서로의 세계에 넘나들도록 계기를 마련해주는 일이다. 모두가 각자의 영화관을 살아간다면 이들에게서 영화에 대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까 두려워 무난무난한 말만 한다면 여기서 영역 싸움은 암묵적인 회색지대를 설정하면서 전쟁의 불씨를 남겨둘 뿐이다. 언어라면 모를까, 영화를 보며 얻는 사적 경험은 우리의 신체로 울타리 쳐지기에 표면 대 표면으로서 서로를 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자면, 서로를 향해있어서 껴안는 것 또한 가능하다고 보여진다. ‘포옹’은 느슨한 결합구조이면서 자신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또한 상대방을 해치지도 않는다. 포옹은 프론트라인을 가장자리로 오인하지 않게 해준다. 분명 영화를 보는 이들의 경험은 점점 사적이 되어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말하거나 이해하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영화는 한 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이들 사이에서 각자 의견을 모으며 협력하고 어쨌거나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만한 무대를 마련해준다. 협상은 서로가 테이블에 앉을 준비가 되어야만 비로소 시작되기 마련이기에, 영화는 우리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세계를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꼭 ‘사적인 것’이 외부에 방어적인 태도로만 여겨지지 않는 공간인 것 같다. 그렇기에 개인으로서 갖는 목표는 “표면을 껴안고, 발걸음을 맞추는 일”이다. 클럽에 가는 사람들은 음악의 리듬에 맞춰 신체와 감정을 동기화하고, 누구에도 섞이지 않으면서 심지어 자신에서조차 벗어나고는 한다. 그런 점에서, 한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영화의 한 세기는 연결을 기능적으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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