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후반 이후로 멀티버스 개념을 도입하거나 응용하는 작품이 많아지면서, 관객들의 이해도 어느 정도는 무르익었다고 추측된다. 멀티버스는 다중우주론을 따라 한 선택이 다른 시간선으로 분기되고, 어떤 세계에는 나 자신이 비슷하지만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으리라는 믿음을 따른다. 콘텐츠로 보면 ‘만약’에 대한 수요를 흡수한 건데, 선택과 책임이 한 쌍을 이룬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고독한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가령 판데믹 시기에 흥행했던 <오징어 게임>의 경우, 신자유주의 시대에 힘입은 데스게임 장르이면서 동시에 깐부라는 특징적인 개념을 도입한 바 있다. 깐부는 경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개념인데도 작품 내에서 주된 요소로 등장한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선택’이 죽음과 같은 절단이나 단절의 요인이 된다면, 깐부는 무언가를 가르지 않으며 바깥 세계를 어떠한 형상으로부터 지켜내려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2023)의 결말을 살펴보자. 영화는 운명의 한 형상으로 엮인 스파이더맨들을 보여주면서 이들 간에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후 마일스 모랄레스는 자신이 스파이더맨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차원의 자신이 몰락했음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의 운명이 뒤바뀐 상황에서 마일스는 자기의 범주를 신체가 아닌 운명의 형상에 엮어 넣으면서 맞닥트린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새로운 시대의 문>은 정글 포켓과 아그네스 타키온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다룬다. 경주장면에서는 신체를 형상 안으로 구겨넣는 연출, 만화적이라 할 수 있는 표현이 동반되는데 이 연출에서 떠올린 것은 <탑건: 매버릭>의 한 장면이다. <매버릭>의 도입에서는 한계 속도인 마하9에 도달하는 매버릭 대령의 모습이 묘사되며, 김병규는 이를 두고서 “매버릭의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소요되는 기나긴 주마등의 시간”이라 부른 바 있다. 작품의 도입에서 이미 매버릭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보는 이 관점은 “폭발과 추락, 죽음의 위협에 노출되어 언제든지 스크린이 꺼질 수 있는 불안정한 영화, 그리고 죽음의 위협이 제거되어 그 어떤 폭발과 추락에도 스크린에 되돌아오는 자들의 영화.”라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새로운 시대>의 도입부에서 빠른 은퇴로 포켓에 지향점이 되어주는 타키온은 서사적으로 볼 때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등장하는 태섭의 죽은 형과 같은 위치에 있다. 영웅은 이미 죽어버렸고,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든 간에 ‘실패’의 이미지는 대체될 수 없다. 극복될 수 없는 목표란 자신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이미 다 끝나버려서 재론될 수 없는 처지의 무언가다. 어른들이 아이에 말하듯, 모든 것은 때가 있으며 벌써 부터 그런 걱정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은 어른의 처지에서 성장의 시기가 끝난 자신을 조소하는 것이기도 하다.
타키온이 미래의 궤적을 그리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연출은 그 끝에서 붕괴의 조짐을 엿본다. 다리 부상을 직감한 타키온은 자신의 미래를 포켓에 맡긴 채 그라운드를 떠난다. 여기서 경주를 그만두는 일은 “달리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우마무스메에게 의미상으로 삶을 관둔다는 말과도 같아서, 일종의 유사 죽음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 장면 이후로는 실제로 타키온이 멀쩡하게 살아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죽어버린 것 같다는 인상마저 준다. 특히나 타키온의 은퇴는 실존마의 사연으로 이미 잘 알려진 터라, 이를 보는 관객으로서는 타키온의 경주를 폭발과 추락으로 바라보게 된다. 다리에 부상을 입었을 때 타키온은 한 번의 죽음을 경험하고, 이후로는 언제든지 부상이 재발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이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그녀는 그라운드로 돌아오게 된다. 한편으로 포켓은 이길 수 없는 경주를 하고 있었다. 포켓이 게임의 캐릭터 육성 스토리를 따라 해변에 합숙 훈련을 갔을 때, 그녀는 꿈을 포기했던 선배에게서 한 가지 조언을 듣는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진취적이고 또 운명적이다. 어떠한 타임라인을 따라 거대한 톱니바퀴가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은 타키온이 말하는 운명의 궤적이 어딘가를 향해감을 전한다. <매버릭>에서의 해변 장면처럼 이 합숙훈련은 어딘지 모르게 죽음의 궤적 앞에 선 이들이 즐기는 마지막 ‘순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미 끝나버린 것을 대하는 태도는 그것을 이기는 게 아니라 이겨내는 게 되어야 한다. 영화의 중심 서사는 주인공인 포켓이 과거의 자신을 넘어서는 일이지만, 동시에 타키온이 자신의 운명을 넘어서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타키온의 이야기는 네 번의 경주 이후를 기약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타키온이 창밖을 보는 장면에서는 타키온의 시선이 닿는 곳이 다음 쇼트로 이어지지 않으며, 외화면의 유무는 전적으로 작품 밖의 이야기가 되고야 만다. 그렇다면 타키온은 이 이야기를 극복하거나 이어갈 수 있을까? 게임에서 타키온은 제4의 벽을 넘어 바깥의 플레이어를 응시하거나 말을 걸기도 하는 캐릭터다. 그리고 게임에서 다루는 타키온의 서사는 경주를 한번 그만두고 은퇴한 상황에 접근해 그녀를 그라운드로 끌어내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영화를 보면, 이 이야기는 게임에서 타키온을 구원할 운명으로 설계된 플레이어의 역할이 영화의 한 기능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른바 영화는 이미 끝나버린 것들을 대체하는 ‘유사-현실’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서 헛된 희망이나 애꿎은 분풀이라고도 말하지만, ‘대체’라는 말은 현실을 침식해가는 일이 아니라 과거를 극복 가능한 대상으로 만드는 절단과 분절의 매체를 가리킨다. 영화는 신체의 확장이고, 실패에 따른 부하를 대신한다.
처음에 포켓은 타키온을 경쟁상대로 인식하면서 넘어아 할 벽으로 여겼다. 그러나 타키온이 은퇴를 결정하고 나면, 현실의 잔영만이 남아 자신을 줄곧 작은 방 안에 가둬버린다. 포켓의 경주에 자극받은 타키온이 경주장에 돌아오는 것은 영화의 오리지널 서사다. 현실에서 타키온이 경주장에 복귀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이 장면은 <퍼스트 슬램덩크>의 마지막에서 태섭의 미국 경기를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는 현실이 성취하지 못한 미래를 끌어안았고, 이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대체의 양식보다 역사적인 만약에 가까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가 의미를 갖는 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순간에 자리를 떠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마지막을 멋지게 끝낼 방법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앞서 <매버릭>의 사례처럼 영화가 이미 타키온의 죽음, 그 미래 결말이 예견되었다는 점에서 앞당긴 미래를 안고서 운명을 마주하는 형태라고 가정한다면. 그 운명을 넘어서려 하는 건 영화의 ‘이후’를 보려 하는 욕망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 영화를 떠올려보자. 젊은 시절이 자신이 겪었던 실패의 감정을 토로하자 제자는 “나는 당신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말대로 포켓과 타키온은 서로 다른 존재지만 그라운드의 궤적에서 같은 미래를 공유한다. 영화는 현실이 아니며, 현실이 겪었던 실패의 감정을 영화까지 끌어안을 필요는 없다.
우리의 삶에서 영화는 ‘이후’와 ‘이전’, ‘내부’와 ‘바깥’ 중 어디에 자리하는 것일까. 타키온이 방 안에 갇혀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나, 노트북의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타키온은 영화에 한 궤적을 남긴 후, 뒤로 후퇴해 이를 바라보는 위치로 내려온다는 점에서 자신의 입장이 다른 무언가에 대체되기를 바라는 것만 같다. 영화는 바깥을 끌어안으며, 그 대상은 비천함에 관하는 때가 잦다. 물론 이 묘사가 관객이 영화에 이입하는 창구가 되어준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현실에 실패를 풀어놓을 수는 없으니 영화가 이를 대신해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연상시킨다. 실패를 다루는 영화들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리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작품에서 타키온은 자신을 가상으로 정의하면서 언젠가 포켓은 이를 뛰어넘을 것으로 본다. 관객이 현실의 궤적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여기에 영화적 ‘입자’가 현실의 스펙터클에 우위를 갖는다고 본다. 그 말마따나 언젠가 돌파될 것으로 믿어지는 ‘가상’은 점으로 수렴되는 미래 궤적 안에서 한 세계를 끝낼만한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지는 보존이 아니라 안정의 문제의식을 갖는다. 실패는 주저앉음이 아니라 끌어안음의 가치를 갖는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자신이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고 말하면, 신시대는 그런 불안으로 작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