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본질을 보는 일은 가능할까? 꽤 추상적이지만, 이 물음은 생각보다 간명한 이치를 담는다. 우리가 영화를 잘 보고자 영화이론을 공부한다고 가정해보자. 영화이론이란 영화를 이루는 여러 방법론을 공식으로 작성한 것일 테다. 이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이루는 본질이 있다고 보아서고, 이 본질만 알면 여러 다양한 사건들에 대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는 일에 만능키 같은 게 있을 리는 만무하다. 각자의 시선과 목격담이 흔적처럼 남을 뿐이다. 허나 어떤 면에서는 사물에도 본질이란 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서브컬처 등에서 모에라는 단어가 그러한데, 모에는 본래 캐릭터 단위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특성을 솎아 이것 자체를 추종하는 일을 가리킨다. 영화로 치면 “이 영화는 클로즈업 숏이 모에하다”정도로 사용할 수 있을까. 안경을 착용하는 일에서부터 츤데레 같은 장르적인 캐릭터성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모에는 사물을 설명하는 본질이란 게 있다고 믿는 것 같다. 특히 모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기호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작품과 맺는 관계 요인이 되기도 한다. 번안하면 입덕요소로 볼 수 있을 이 무언가에 대한 판단이 영화 전체에 대한 본질을 이룬다고, 우리는 흔히 오인한다.
영화 평론가는 자신이 오인한 것을 믿는 사람이다. 그게 정말로 말이 되든 아니든 간에 이미 자신이 그렇다고 판단한 순간 작품의 본질은 오인된다. 평론가는 자신이 지지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취향을 이루면서도, 동시에 그 지지를 쭉 밀고 가야 한다는 점에서 작품과 명운을 함께한다고 보아도 좋다.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 판단은 평론가의 사적인 오인에 의해 외부로 밀려나고야 만다. 그 점에서 영화는 축제와 닮았다. 송경원은 축제의 기능을 생존신고에 빗대면서, 이상은 불완전한 것을 바깥으로 밀어낸다고 말한다. 한 영화가 현실의 자장 안에 자리하면서도 자신의 취향을 여실 없이 드러내는 법이란 오로지 영역전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현실은 많고 다양한 관계들로 얽혀있고, 이 사이에서 영화란 관계의 지점이 아니라 나머지 잔여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를 거름망이 아닌 안전망으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이와 같은 오인의 본질적인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잘못된 건 우리가 아니라 세상이라며, 불완전을 외부로 몰아내어 우리 자신이 완벽의 자리를 대체하는 게 바로 축제다. 축제는 그 본래적 기능처럼, 세계의 불완전을 잠시 잊음으로써 한 세계에도 여전히 낙원이 존재할 수 있음을 말했다.
영화 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모두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논리의 정합성이나 사실 묘사와는 상관없이, 이곳 현실이 아니라는 점만으로 그곳 너머를 인정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영화의 완전함은 현실의 불완전함에 상반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곳을 안전하다고 여기기에 유발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영화를 보기 위해 ‘불완전함’을 바깥에 놓고 와야만 했기에 그런 완벽에 대항할 힘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안전을 무언가를 지켜내는 힘이 아니라 마찰을 빚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일로 생각할 때 그런 일이 벌어진다. 발에 걸릴 게 없다면 자연스레 넘어질 일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즉, 영화의 특징은 바로 ‘넘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마치 폐허와도 같아서 넓게 펼쳐진 장소를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지평선이 탁 트여있고, 시야에 걸림돌이 없으니 어떤 그림이든 간에 그럴듯하게 보일 것만 같다. 말하자면 영화에서 실패의 의미는 그것이 유발될 수 없다는 부재 자체에서 유발된다. 실패할 수 없는 세계는, 게임의 속성을 빌리자면 얼마든지-언제든지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안전망이 형성됨으로써 실패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고 나면, 이곳에서 사람들은 실패야말로 가장 고유성을 지니는 ‘완전’으로 여기게 된다.
실패야말로 완전에 가깝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한 실패가 완전한 추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실패는 처음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는 점에서의 태초다. 태초마을로 돌아가는 것은 단순히 폐허로부터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영화의 기능이 왜 실패인지를 잘 말해주는데 시작점이 있다는 건 바꾸어 말해 그 이상으로 더 떨어질 수는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떨어지는지도 모를 구멍은 그 자체로 죽음을 가리키지만, 오히려 시작의 지점이 명확하다면 그 반대인 결말 또한 함수로써 역산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마치 한 영역에 가장자리가 분명 외부와 내부를 구분 짓듯이, 시작과 끝의 유무는 우리가 그 안을 하나의 영역으로 사유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과거에는 지켜내야 할 것이었지만, 오늘날에 실패는 그 자신을 토대로 나머지 것을 바깥으로 밀어낸다. 모에라는 낡은 용어는 이와 같은 특성에서 서브컬처의 본래 의향보다 한 매체가 현실을 구성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일에 더 잘 어울린다. 모에가 대체 불가능하고 타협 불가능한, 그러나 그 자체로 관계망 안에서만 설명되는 하나의 기호적인 특성이라고 가정해보자. 이는 현실에서 영화의 지위와 정확히 같다고 볼 수 있다.
한 영화에 소속되려면,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한 현실을 바깥에 두어야만 했다. 자신이 무너지더라도, 현실은 무너져서는 안 되기에. 꼭 무너져야 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자신으로 남아야 하는 내부가 아니라 모든 것에서 자유롭기 위한 외부가 되어야만 했다. 영화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런 낙원에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상심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실패는 우리가 영화의 끝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동시에 그런 끝에서 시작점으로 움직이는 운동성을 낳는다. 한 영화가 현실 안에 존재하는 방식은 그래서 개인에게 일종의 쉼터나 도피처가 되어준다. 꼭 현실에 반하는 것만이 영화의 존재 원리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어쩌면 우리 세계에서도 여전히 낙원은 존재할 수 있다고. 낙원은 완벽한 이상으로만 구성된 장소가 아니라 도달할 수 없는 곳이기에 실패로서의 지위를 갖는다. 그러나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실패이며, 구성주의의 원리를 따라가면 그 끝에 낙원을 증명할 방법은 분명 있다. 낙원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바로 이곳이 낙원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실패란 우리가 처한 것이 바로 실패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낙원으로 가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영화가 도피처가 되는 것에는 이곳에 입장하는 일에는 하나의 의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명민한 사실이 자리한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는 한 현실과 너머의 현실이 한 자리에 포개지는데, 이때 의식이 분열되지 않는 건 우리가 완벽함과 불완전함 사이에서 자신을 의식하는 덕택이다. 영화가 하나의 축제에 빗대어진다면 그와 같은 완벽이 불완전한 현실의 가장자리까지 자신을 밀어내기 때문일 테다. 축제가 끝나고 나면 공기가 차갑게 식는 것도 둘 사이의 유사점이다. 영화에서 실패는 이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가리는 것에 그 역할이 있다. 살아가는 현실이 그저 시뮬레이션 우주일 뿐이라면 그런 진실을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다. 분명 한 영화는 우리가 자신의 신체를 확대해 영역의 가장자리에까지 영혼을 맞대게 해준다. 여기에 실패가 없다면 영화는 추락이나 추방, 둘 중 어느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처지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화가 되어야 한다. 사회 안전망의 수립과 구축이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필요한 조처라면 영화에 실패의 전개와 효율은 영화와 현실의 가장자리, 그 중심부에 있는 공간을 증명하는 일에 들어갈 비용을 절감해준다.
영화의 역사는 개척의 역사이기도 하다. 북미 대륙의 원주민을 외부로 몰아내었던 건 이곳이 백인의 땅이 되어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미국인에게 대륙의 원주민은 백인이 되지 못한 존재, 즉 ‘불완전’한 존재였으며 이를 따라 ‘안전’은 한 세계를 파고드는 방식으로 생성됐다. 영화의 역사에서 안전은 공간을 장악하는 능력, 한 구역을 확보하면서 점령하는 게 아니라 블록버스터와 같은 방식으로 구역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이렇게 확보한 ‘완벽’은 근본적으로 현실의 불완전함을 치료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인간의 경계가 한 공간을 비집으면서 입게 될 손상을 예방할 수는 있었다. 즉 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일은, 한편으로 어떤 현실을 바깥에 두는 행위이기도 한 셈이었다. 이런 점에서 개척은 한 공간이 본래 갖고 있던 감각을 지우고 이를 새로 기록할 수 있는 면으로 만드는 행위다. 영화는 터무니없거나 비교적 개연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라도 자신의 영역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이런 일은 사실 대상에 관한 배경지식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체적이지 않고서 표면적인 무언가로만 그칠지도 모르지만, 현실에서 낙원은 ‘발견’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발명되는 것만이 가능하다.
아그네스 타키온은 말 그대로 다리가 부셔질 것처럼 달렸다. <우마무스메>가 특징적으로 가져가는 고증 위주의 세계관은 경마로서 스포츠물의 특성을 갖기도 하지만, 한 스포츠 주자의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철저히 현실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기도 하다. 현실에서 경마용 말이 그저 장비나 도구로만 취급되었다는 사실을 제하더라도, 모두가 한 곳을 향해 달린다면 그 열정만큼은 존중할만하다. 무엇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이야기 안에서 자체적으로 극복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경마 주자들 사이의 경쟁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생각이 닿게끔 한다. 영화가 자신에게 주어진 한 현실을 이겨내는 방식은 분명 외부 세계의 리얼 월드와 대결하는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한 현실을 비집고 들어간 게 아니라, 현실의 경계를 흐리며 그 자신의 면모를 생생하게 발산하기 때문이다. <우마무스메>의 TVA에서 사일런트 스즈카의 유학, <새로운 시대의 문>의 타키온의 복귀. 아마도 이와 같은 대체는 현실이 실패했기에만 가능한 것이고, 적어도 축제의 빈자리보다는 오직 이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현실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마지막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