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직업에 갖는 편견이란 그 일에 필요한 하나의 능력만을 가리킬 뿐이다. 하나만 잘한다고 해서 모든 결과물을 낼 수는 없다. 삶을 살아가는 일이 그렇다. 혼자만 잘해서는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힘들다. 프리랜서라던가 하는 경우는 대개 자기만 잘하면 된다고 여기기 쉽지만, 결과물에 반응하고 이를 토대로 협업을 요청하는 것은 모두 한 생태계에 연결돼있다. 글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한 개의 글은 적확한 한 개의 주제를 다루지만, 하나의 글은 다양하고 많은 글에 연결되면서 예기치 않은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자유’라는 것은 모든 일에서 예외적이게 되는 게 아니라 모든 일에 자기를 맞댈 수 있음을 가리킨다. 그 점에서 ‘작가’라는 건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글과 글 사이의 반응을 예측해서 설계하는 사람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작가는 자기를 지켜내기 위해 영역을 설계하는 게 아니라, 한 영역을 지배하면서 바깥 세계에 유효한 대응 수단을 마련한다. 세계는 작용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작용에 대항하는 반작용이 동반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걷기’는 발을 들어 중력에 대응하고, 다시금 이를 내려놓는 추락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걷는다’라는 말을 단정적으로 사용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작가에 대한 인식도 단정될 수 없다.
살다 보면 그런 게 있다.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 자리가 있는데, 그때마다 뭐라 말해야 할지 곤란해진다. 비평가? 작가? 인터뷰처럼 공식적으로 무언가를 해내야 할 때면 소속에 대한 요구가 간절해진다. 진행하는 일은 소속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상대방을 설득하고 소통하려면 자신을 드러낼 소속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소속 없이 일을 진행한다는 건 아무런 이름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과도 같다. 자기 신분도 밝히지 않는 사람하고 비즈니스를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처럼 소속은 한 개인에게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안정감을 주기도 하지만, 대외적으로 상대방을 대해야 할 때 훌륭한 외부가 되어준다. 비즈니스에서 명함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단순히 연락처를 공유하는 일이기 전에 상대방의 소속에서 한 개인의 역할이니 능력, 이미지 등을 미리 공유 받을 수 있는 덕택이다. 무협지에서 정파와 사파, 마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각 소속에 따라 정해진 이미지가 존재하고, 이는 이야기를 따라감에 있어 이야기나 세계관의 이해를 효율적이게 한다. 즉 소속은 이야기에서 장르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 이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 불행해야만 한다고, 혹은 원래 그런 이야기니까 그 틀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혹자는 이를 두고서 선입견이라 할지도 모른다. 무언가 행동을 취하는 일에서 사전에 주어진 정보가 있으면 아무쪼록 행동이 유리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상대방을 미리 예단해서 섣부른 행동을 하게 되는 때도 있다. 그래서 비즈니스를 할 게 아니라면 자신을 어떤 소속으로 소개하는 일은 최대한 지양하게 된다. 단순히 한 이름을 참칭하는 게 멋쩍다고 느껴서만이 아니라, 그런 입구를 통해서만 이야기를 진행하게 되는 게 싫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의 연장선에서 이름이나 신분 등의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한 문화가 소속된 곳에 따라 문화의 역할이나 능력은 달라질 수 있을까. 대개 나는 평론가라는 말보다는 서브컬처에 관심이 많고, 글을 쓰는 걸 좋아한다는 정도로만 자신을 소개하고는 한다. 무언가 소속이 있다면 그것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기에 그렇게 소개한다. 영화인도 아니고, 오타쿠도 아니고, 음악을 애호하지도 않으며, 예능이나 연예, 정치 시사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을 입구 삼아 자신에게 상대방이 진입하는 일은, 도리어 상대방이 집으로 돌아갈 때 자신이 획득한 정보를 갖고서는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할 것이다.
게임 <사이버펑크 2077>은 사이버펑크 장르를 컨셉으로 한다. 작품은 시작점에서 기업, 부랑자, 갱단으로 시점을 선택할 수 있고 소속에 따라 다양한 시점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이야기의 큰 줄기가 바뀌지는 않지만, 인물 간의 대화나 관계 등에 차이점이 있으며 플레이어는 이를 관찰하는 일에서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갱단 루트에서는 기업을 적대하지만, 기업 루트에서는 자신의 전 직장이기도 하기에 대화의 의향이나 접근은 달라진다. 즉 이야기는 큰 줄기에서 바뀌지 않지만 이에 다가서는 방법이 다르다. 그렇다면 소속에 따라 관계의 지향점이 달라진다는 건,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우리가 간접적으로 택한 방법인 것이다. 세계를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우리는 소속을 옮기며 자기와 세계의 관계를 새로 쓴다. 이런 구조에서는 세상이나 자신, 둘 중 무엇하나 바뀌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야기의 결은 달라진다는 점이 특별하다. 우리는 자신으로만 남을 수 있고, 반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부정감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된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수많은 방법이 있으며, 그 결말이 확정적이라면 의미는 수행에 있다. 장르의 변주와 이야기의 명중에서 중요한 건 도리어 “편지는 도달하지 않는다”는 데리다식의 화법이다.
오늘날 보편화한 이직은 유동화하는 사회분위기만큼이나 우리 자신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리는 증표일지도 모른다. 직업의 의미가 개인의 신분을 증명하거나 보완하는 역할이 있다는 걸 고려한다면 그렇다. “이름을 담는다”는 명함의 속뜻처럼, 소속은 무엇으로든 확장될 수 있는 개인에 가장자리를 부여하고 이를 토대로 물리적인 형태의 세계에 나설 수 있게 한다. 직업과 이름, 신분은 서로 다른 맥락에 있지만, 중요한 건 이 둘 간에 부분적으로 비대면의 속성이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서도 상대방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은 우리가 한 세계를 체험하지 않고서도 마주했다고 여기게 하는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한 신분은 상대방에 대한 태도와 예우를 결정하는데, 여기서 신분은 이 채널로는 당신이나 나나 이런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상호협력을 지시한다. 이런 뜻에서 “원래 그런 이야기”라는 말은 자신의 선택을 제약하는 감금의 속성도 있지만, 반대로 미래에 대한 확정 지시를 통해 외부를 배제하는 효과가 있다. 마치 영화의 기능처럼, 특정 채널을 통한다는 건 미래 궤적을 통해 결말을 예시하지만 반대로 비천함에 사로잡히지 않게끔 상호 간에 협력을 소구하기도 한다.
탐색의 목적은 상대방의 능력이나 사물의 출력이나 기능 등의 상한이 어디까지인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탐색이 끝나고 나면, 결말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지점에 자리 잡기에 그에 도달하는 수 싸움이 중심이 된다. 탐색전은 한 개인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을 체감하면서 이를 토대로 상대방의 소속을 빼앗는 일이라는 점에서 땅따먹기와도 같다. 이 점에서 신체는 하나의 영토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상한선을 넘어버리면 그 캐릭터는 작품 안에서 암묵적으로 탈락하거나 퇴장하는 처지에 놓인다. 신체가 개인을 담는 그릇이라면, 반대로 신체의 변형은 그릇의 변형과도 같으며 결과적으로 ‘목적’은 다시금 본래로 돌아오는 것에 있다. 이야기의 목적지가 같다면 어떻게든 그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고, 인간의 조건은 마지막에 인간으로 죽는 것에 있다. 그래서 영화는 대개 탐색전이기보다 운명론에 더 잘 어울린다. 영화에서 프레임의 역할은 영역을 물리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이 창 안에서만 가능한 세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세계를 살아가기보다 한 세계를 입는다. 우리가 특정한 소속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이 안에서 어떤 세계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정장은 이곳이 공적이면서 그에 걸맞은 격이 있다는 점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된다. 정장은 불투명한 미래와 분위기로부터 한 개인의 신체를 방어하는 효과가 있다. 정장은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기 때문에 반대로 자신의 주관을 일상에서 분리한다. 그러니 정장을 입는 일이 한 세계를 입는 일에 비견되는 것은, 도리어 우리의 비일상이 일상으로 풀려나지 않게끔 구속하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을 타인에게 소개하면서 소속을 강조하는 일도 그렇다. 일반적으로 익숙한 삶을 ‘일상’이라 부르고는 하는데, 이때 외부란 익숙하지 않거나 낯설어서 다가서기 힘든 무언가를 가리킨다. ‘나’가 아닌 소속을 준거 삼아 외부에 접근하는 일은 그와 같은 비일상을 대하는 태도로 볼 수 있는데, 어떤 면에서 소속은 비일상을 상대할 요령만 존속한다는 점에서 비일상으로 다뤄지기도 한다. 요점은 어딘가에 소속되는 일은 주체에게 있어 본연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신체는 외부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하나의 내부로 사유되기 쉽지만, 정확하게는 주체의 자리에 불과하며 여기서 ‘세계’는 주체가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확장’이다. 어딘가에 소속되는 일이 자신을 분단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한 세계를 입을 뿐이다.
영화에서 프레임의 역할은 다른 무언가에 개인이 포섭되거나 혹은 구속되는 일을 방지하는 것이다. 보통은 영화에서 한 인식을 가두는 것을 두고서 프레이밍이라는 표현을 쓰겠지만, 외부에 대항해 자신을 보존하려는 운동 또한 프레임의 기능 중 하나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시네필에게 영화는 그런 의미일 것이다. 공간의 관점에서 영화는 개인의 일상과 비일상을 판가름하지 않는다. 시네필에게 영화는 준거집단이거나, 혹은 소속이며, 그런 점에서 가능 세계의 일원이 된다는 건 자신을 장르적으로 사유하는 것과도 같다. 소속과 프레임, 장르는 그런 곳에서만 합당화되거나 진행할 수 있는 사건을 생성하지만 반대로 그와 같은 건축 외부로 나아가는 일을 방지하기도 한다. 그다지 일상적이지 않은, 육면각체. 영화를 입는다는 건 이를 채널 삼아 자신의 결말을 예시하고자 하는 것, 궤적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함이다. 서브컬처의 역할과 기능을 자문할 때 영화가 한 개인의 삶을 대리할 수는 없는 건, 그런 장르 안에서는 모든 결말이 자신에로 향하는 탓이다. 일컫자면 편지가 도달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전언이 되는 게 바로 장르적 삶이다. 장르는 자신을 소개하는 편한 방법이 아니라 공간을 가르지 않는 법이다.
외부가 차이를 생성하기에 영화는 하나의 어트랙션이 된다. 이를 따라 신체의 규격은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고서 자신을 외부에 밀어낸다. 예를 들어, “목소리가 좋다”는 말은 외모에 대한 선입견을 대체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전하려는 말에 일정 부분 도움을 줄 수는 있다. 혹은, 작은 키는 상대방이 얕보거나 무시할 만한 높이를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대방에 자신이 ‘무해하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적어도 이미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바꾸는 일은 힘들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를 가두는 것은 외부에 불과하다는 걸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우리가 세계와 맺는 것은 인식이지 계약이 아니기에, 행동하는 세계는 어디로든 나갈 수 있고 어디로도 연결될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의미를 찾는 것은 삶에 목적의식을 찾아 헤매는 것과도 같고, 모두를 연결하고 싶다면 자신을 무언가에 잡아두어서는 안 된다. 한 영화를 두고서 자신을 설명하는 도구로 삼는 일은 자신이 정말로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점을 뜻하는 게 아니라, 전설이 되는 두 가지 방법을 따라 선택권을 쥐는 것과도 같다. “영광스럽게 죽거나, 아니면 느리지만 오래가는 것”(송경원). 세계를 예리하게 절단하기보다는 관계에 치이며 인식을 지켜내는 편이 더 낫다.
나는 인기를 얻는 것보다, 사람을 연결하고 같은 꿈에 동참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사실 우리를 매듭짓는 건 눈 앞의 교집합이 아니라 우리가 등진 세계라는 것. 무엇보다 우리가 꿈을 꾸는 이유가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라면, 밤하늘은 올려다보는 쪽이 아니라 그런 꿈의 세계 바깥에서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넓은 세상에서 발붙이고 살 수 있는 땅이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일까? 혹은, 모두가 하나의 세계를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귀중한 경험일까? 전체주의가 아니라, 모두를 끌어당기는 비가시적이면서도 표면적인 지구 중력에 관해 생각해보자. 한 세계를 살아간다면 누구라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 있다. 혹자는 각오한 자는 운명 앞에서도 웃음 지을 수 있다고들 하지만, 운명의 참된 의미는 미래의 한순간에 자신이 살아있을 것을 예측하는 능력이다. 영화를 보며 타임라인의 어느 순간을 찍어도, 이야기가 계속되리라는 믿음이라고나 할까.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회귀와 환생의 대체역사가 아니라 자신은 대체될 수 없다고 믿으며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는 힘이다. 그렇게 하면, 설사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더라도 이 꿈은 장막을 거두는 게 아니라 한 세계를 넘기고야 말 것이다.
수잔 벅모스는 기술의 부흥이 끝나고 자본주의가 시작된 20세기를 꿈의 세계로 부르면서, 이 세계가 다음 세 개 분야에서 파국을 마주했다고 썼다. 민주주의, 역사, 대중문화. 그는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제2세계(사회주의)에서 실패한 것으로 선언됐고, 제1세계(자본주의)에서도 의도적으로 포기됐다”고 말한다. 열역학에 의해 꿈은 법칙 안에서 보존됐지만, 그 형태나 측정에 관해서는 합의된 바 없다. 꿈이라는 단어가 전세계 어디에서나 단어와 행위가 한 자리에 묶인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자기를 포기해야만 한다. 꿈의 세계 바깥에서도 꿈은 여전히 유토피아의 한 면을 구성하지만, 그걸 관찰할 방법이 없기에 우리는 꿈을 꾼다. 이를 따라 ‘깨어남’이라는 말은, 우리의 세상을 허위와 불신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추락의 의미를 한 삶에 대한 예측으로 바꾼다. 모든 존재는 중력에 사로잡히고야 말기에, 언젠가는 추락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추락은 우리가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점에서, 우리가 원래 있던 세계를 지시한다. 추락은 우리가 닿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서 이미 한 세계를 획득할 것을, 그 세계에서 본래 살았다면 그 미래 궤적에서도 여전히 자생할 것을 예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