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비추기를’ 거부하고 인간 정신이 ‘어둠 속에서 걷도록’ 내버려두는 과거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그리고 현재를 파괴하려는 욕망으로부터.” -한나 아렌트-
한 곳에 고립되어 있다 보면 방향감각을 잃게 되는 때가 있다. 너무 오래 머물러서 한 사회의 어느 자리에 있는지를 까먹게 되는 일이 그렇다. 소위 ‘고인물’이 되고 나면, 그곳에서는 자신이 전문가일 수는 있어도 영역 밖에서는 능력을 잃고야 마는데 그래서 더 바깥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물론 자신에게 유리한 곳을 찾아가는 건 비겁하거나 나쁜 일이 아니다. 주어진 환경을 잘 활용해서 자기만의 영역을 가꾼다면, 이는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라 해야 할 테다. 그렇지만 때로는 한 문화에 소속되는 일이 정말로 옳은 일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우물 안에서만 갇혀 있으면 아예 세상 물정을 모르게 되듯이, 어떤 곳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 바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때가 그렇다. 이런 뜻에서 자연스럽거나 익숙함은 자신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인 듯하다. 계속해서 걷다 보면 무언가 이상한 곳이 나오는데, 거기까지가 바로 자신의 영역이라 보면 된다. 마크 피셔는 으스스함과 기이함을 두고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으로 설명하면서 이를 아직 완성을 향해가는 일에 빗댄다. 이른바 잘-못-됨은 무언가가 이상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뜻이므로, 그것을 ‘잘-됨’에 견주어 생각한다면 으스스함과 기이함은 이해에 다가서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을 테다. 즉, 으스스함과 기이함은 ‘되기’의 가치를 갖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역의 바깥을 으스스하고 기이한 것으로 인식하는 일은 오히려 되기의 수행을 위해 지향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를 위해 신체를 점점 외부에 확장하면서, 정신을 분산하면서 자기 경계를 해체해야만 한다고 말이다.
자기만 빼고 계속 진행되어왔던 동창회에 갔더니 무언가 공기가 탁하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곳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다. 자신이 지배할 수 없거나, 혹은 자신을 지배할 수 없게 하는 곳. 영화는 아마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영화는 흘러가는 시간 동안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되기의 감각을 제공한다. 되기가 기본적으로 차이의 지속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영화에서 현상은 우리가 차이를 발견하는 곳으로 보아도 좋을 테다. 우리는 영화를 두고서 우리와는 다르다고 여기며, 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은 영화가 왜 으스스하고 기이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이언 보고스트의 말처럼, 영화는 우리의 현실에 연계된 무언가가 아니라 완전히 동떨어진 한 영역일 수 있다. 영화는 현실의 모사체이기보다 한 인간의 내면과 그 안의 실존들을 드러내는 방식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 입국하기 위해 입국심사와 위험물검사를 거치는 등의 엄격한 절차를 요구받는다. 무엇이 우리 세계와는 다른지를 따져 물으면서, 검역을 거치고 나면 우리는 스스로를 ‘잘-못-됨’을 ‘잘-됨’으로 이행한다. 본질은 바뀐 게 없지만 으스스함과 기이함을 승인함으로써 우리는 한 개인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영역은 한 개인을 억압하거나 통제하기보다는 받아들이는 것을 예비하고, 나아가는 것을 담기 위한 공간적 개념에 더 가깝다. 영역은 우리의 지배하에 놓인 공간이 아니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에 대항해서 존재하는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다. 결국 영역은 적어도 영화와 연결되면서 둘 중 하나를 외부에 두는 식으로 연계될 수밖에 없다. 자신을 경계하는 과정에서 외부를 인위적으로 적대하는 일이 바로 ‘영화’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까? 우리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을 신체로 인식하듯, 시야가 닿고 손과 발이 닿는 것은 모두 한 개인의 영역이 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으스스함과 기이함을 담은 ‘바깥’으로서의 영화란 기본적으로 우리와 공존할 수 없는 가치다. 오늘날 시네필 문화에서 잘못된 것은 이와 같은 공존의 불가능성이 사실은 자기 경계를 위해 사주된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세상이 영화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일은 한 세계를 영화에 예비된 존재로 엮는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은 바로 ‘우리’의 외부에 있음을 지시하는 것과도 같다. 이를테면 한 집단이 내부의 결속을 위해 공공의 적을 지정하는 일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는 영화가 악역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기 중심을 잡고자 영화를 이용할 뿐이다. 영화가 으스스하고 기이한 것이라면, 르네 지라르의 말처럼 영화는 영상문화 시대의 희생양에 빗대어질 수 있을 테다. 한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위기를 타파하고자 희생양을 물색한다. 이때, 영화는 으스스하고 기이한 것으로서 ‘희생양’이 되며 개인은 희생제의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원한다. 오늘날 영화 문화에서 어떤 시네필에게는 이와 같은 희생제의가 세계의 주류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비평과 젊은 시네필 사이에서 언급되는 비천함의 정체란, 자신의 삶에 자리한 으스하고 기이한 것을 외부로 밀어내어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영화를 두고서 잘-못-됨으로 가정한다면 영화를 보는 일은 ‘잘-못-됨’에 대한 긍정과도 같아서, 평소라면 내면에 자리할 수 없을 이 감정이 우리 삶에 현존할 수 있게끔 해준다. 이 세계를 망가트리지 않고서도 줄곧 삶을 이어나갈 방법이란, 자기 삶의 몇몇 감각을 바깥에 밀어내는 일뿐이다.
자신을 부정하거나 바꾸지 않고서도 여전히 세상에 연결되게끔 두는 것, 우리는 영화를 매몰차게 대하면서 그 하나만 희생하면 모든 게 다 괜찮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어떤 면에서는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영화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현재 시네필이라는 말과 영화광이라는 말을 분리해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중 후자를 사회문화적인 맥락에서의 젊은 시네필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젊은 시네필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두고서 영화 세계의 완전성으로 갈음하려는 시도를 꾀하는 게 아닐까. 젊은 시네필은 영화를 희생양 삼음으로써 자기 삶의 영역을 ‘확보’하고 그와 동시에 자기 신체의 온전성을 ‘확인’받는다. 영화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반대로 자신의 영역이 지켜진다는 이 가정은 우리가 기존에 알던 것과 정 반대의 양상을 띤다. 젊은 시네필에게 영화는 삶을 유지하려면 필수불가결하게 배제되어야 하는 자기의 일부다. 이들에게 영화를 본다는 건 모든 게 잘 풀리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으스스하고 기이한 게 거기에 있으니까, 반대로 우리의 삶은 아직 잘못되지 않았으니까 회복될 여지가 남았노라고. 이렇게 영화는 스스로를 잘-못-됨을 짊어진 희생양으로 만들면서 관객의 살아가는 세계를 창조한다. 무언가 잘못된 이 세상은, 우리가 그런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냄으로써 합류를 위한 여정을 일탈이 아닌 모험담으로 만든다. 그런데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는 가정은 어떻게 스스로의 힘으로 가능한 것일까? 객관적 현실은 오로지 외부를 거쳐 돌아올 때만 비로소 확정되는 게 아니었나?
신체의 기능성을 위해 배제되는 외부란 잘-됨이 아직 되지 못한 것을 수행해서 얻어질 수 있는 가치라고 여기기에만 가능하다. 자신에게는 아직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린다고 믿는 과정에서 영화는 희생양이 된다. 세계의 온갖 천한 것을 버려버리는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영화가 비천하다면 그건 천함에 비할 것은 아니기에 그런 표현을 사용할 뿐이다. 살아가는 세계가 외부를 거쳐서만 비로소 신체의 거동능력을 확보한다면, 여기서 ‘바깥’은 한 세계가 자기를 경계하기보단 외부에 사로잡혀 서 있을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헌데 그렇다면 이와 같은 낯섦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익숙하게 작동하던 것들이 낯설게 다가오는 현상은 전위 예술가들이 마약에 손을 대는 이유이기도 했다. 영감을 얻기 위해 대마를 피운다든가 하는 일은 자신이 속한 신체/영역/현실/세계를 벗어나지 않고서도 이를 외부에서 바라볼 기회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느 낯선 부족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여기는 건, 그곳이 익숙하지 않다는 점을 뜻한다. 젊은 시네필에게 미학적으로 우수한 영화란, 칸트적 의미에서 그냥 본원적으로 가치가 있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일에 사용될지도 모른다. 좋은 영화를 보는 일이 좋은 자신을 가리킨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영화를 보는 일은 추락을 경험하는 것과도 같고, 그런 점에서도 좋은 영화를 보는 건 충격경험을 하는 것과도 같다. 젊은 영화광의 슬픔은 자신이 어딘가에 추락하는 과정이 파손이나 상실이 아닌, 다시 일어나기 위한 상승과 걷기의 과정으로 이해되기를 바라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미지가 추락하고, 영상문화가 비트로 분해되는 상황에서는 세계와의 관계도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