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 레스 존 제로]에서 엘렌 조 캐릭터를 맡은 이지나는 언더 성우다. 여기서 언더는 협회에 소속되지 않은 채로 활동하는 성우, 그러니까 한 체계에 포섭되지 않고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사례를 뜻한다. 한편으로는 무언가 더 낮은 곳에 있다는 인상으로 인해 이와 같은 ‘언더’는 공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거나, 주류에 포섭되지 못한 채 하위에 머무르는 것처럼 여겨지고는 했다. 특히 ‘언더’는 단순히 하나의 단어로만 기능하기보다는 어느 하나를 준거 삼아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였기에, ‘언더’는 위치와 얽힘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언더는 지정학적 위치계에서 동양이 서양이라는 말에 구분 짓는 상태로 등장한 것만큼이나 ‘표면’에 수반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위치에서 운동을 셈했다고 볼 수 있는데, 한국 사회에서 반지하라는 주거 형태가 갖는 사회적 의미 등이 이를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국에서 반지하는 장마 기간에 비가 역류해 들이치거나, 지나가는 사람이 힐끔 들여다보기 쉽거나, 근방에 주차된 차에 창이 가려 그나마 남은 햇살조차 들어오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지하에 걸쳐 있다는 특성으로 인해 수압도 비정상적이며, 곰팡이가 자주 생기는 등의 주거 여건도 몹시 취약하다. 아무쪼록 언더는, 위로 상승할 가능성보다 그 아래에서 내려다보이는 위치지정학적인 지위가 더 강조되는 감이 있었다.
비평계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다. 아마추어 비평가로 지칭되는 평론가들에서 전문성이나 책임감을 기대하는 일은 무리라는 시선이나, 등단을 하지 못했으니 이런 이야기에는 발언의 신뢰도나 지명도가 낮다고 보는 일이 그렇다. 흔히 블로그나 커뮤니티에 파편화해 분포하는 아마추어 비평가의 존재는, 이들이 정말로 프로를 지망하지 않더라도 프로‘의’ 언더로 이해되고는 한다. 스스로를 프로 지망생이거나 아마추어 비평가로 소개하지 않더라도, 공적 지면의 ‘바깥’에 해당하는 장소에서 활동하는 일은 일종의 ‘언더’로 이해된다. 이런 관점에서 개인 블로그나 SNS 같은 ‘바깥’은, 표면화하지 않는 의견들이 수렴되는 일종의 하수도처럼 여겨지며 ‘바깥’은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가 된다. 프로를 지망하지 않는 이들에게 언더는 공적인 법률과 주류 세계의 법칙이 지배하지 않기에 자기만의 법령과 제도를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지만 자기만의 영역을 주류로 이끌려면 언더에서 표면으로 올라가는 일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발언대에 서서 마이크를 잡는 일은 정확하게 아래에서 위로의 운동 이미지와 함께 약동한다. 즉 아마추어와 언더는 같은 개념이 아니지만, 언더는 오히려 위에서는 관찰되지 않는 것을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혁신과 위로의 장이 되기도 하며, 그와 같은 점에서 ‘언더’는 신규와 혁신을 위해 마련된 안전한 추락의 장으로 기능한다.
흥미로운 점은 따로 있다. 이와 같은 계급론적인 층위는, 생활세계의 분리로 인해 피상적인 이해와 거리와의 괴리를 겪는다는 점이다. 상호 간에 소통이 가로막혀있어서 ‘표층’과 ‘언더’ 간에는 교류라고 할 법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위치에 따른 기호학적 이해를 동반하면서, ‘언더’는 기이하거나 낯선 것, 혹은 자연스레 시선이 아래로 향함에 따라 그를 하대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소위 영화의 스크린에 대한 이해가 우리가 ‘내려다본다’는 점에 따라 지위에 따른 착각을 일으키듯, ‘언더’는 한 세계를 내비치기보다 자기 세계를 반향하는 경우가 더 잦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본 ‘언더’는 다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가시화되지 않아서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없고, 층계가 나뉘어서 기존의 법칙이나 문화가 바르게 적용되지 않는 곳. 정확하게는, 두 의미가 한데 얽혀서 한쪽과 다른 한쪽이 동일 위치계를 공유한다고 보면 좋겠다. 언더는 주류에서 유입된 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위와는 다른 재료에서 이색적인 자생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언더는 단순히 추락의 결과나 패배의 종착지만이 아닌,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나선 에너지를 방출하는 유인지대에 더 가깝다. 이를 두고서 우리는 ‘자생’이라는 표현을 쓴다. 잔류 에너지를 분화하거나 생명의 요람으로 분화하는 것은 ‘언더’야말로 전략적 요충지대라는 점을 잘 드러낸다.
다른 한편 ‘언더’라는 말은 부분적으로 아마추어라는 표현과 상충하는 감이 있는데, 프로로 활동하는 일은 대개 언더에서의 이탈과 같은 맥락에 놓이기 때문이다. 언더에서 프로로 활동하는 일도 가능하지만, 지하 시장과 주류 시장의 규모가 서로 다르기에 이는 쉽지 않다. 우선 프로라는 말을 해당 일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서 비즈니스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정의하자. 언더에서 줄곧 프로로 활동하려면 언더 문화 자체에서 생산과 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져야 한다. 작업물을 소비할 만한 독자층이 있어야 일감을 주는 쪽도 프로를 섭외한다. 즉, 자체적인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하나의 생태계가 구축되어야만 프로의 정의가 성립한다. 이와 같은 생각을 따라가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언더’에 부여하는 잔류의 이미지가 프로와는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자체적인 제작과 유통이 불가능하고, 일부 소수 유저 사이에서만 소비될 뿐이라면 비즈니스는 유지될 수 없거나, 아마도 작은 크기에 머무를 공산이 크다. 혹은 블랙마켓처럼 일반적으로 구할 수 없으므로 그 규모는 작더라도 재화의 유통량은 상당할 수도 있다. 프로를 정의하는 것은 수요에 부합하는 니즈의 충족,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 손을 내밀면서 이를 다시금 순환하는 ‘생태계’에 있다. 그 말인즉 자신의 쓰임과 역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 수 없다면, 프로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블로그 비평을 두고서 아마추어 비평으로 이해하는 일은, 블랙스완 같은 몇몇 사례에도 불구하고 보편타당한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공적인 지면은 대개 독자의 성향이나 분포를 염두에 두는 경향이 있어서 생태계에 대한 헌신이나 기여분을 고려한다. 그러나 블로그 비평은 수신자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쌓는 일에 집중하기에 아마추어 비평의 분과에 속한다. 공적인 지면과 사적인 지면은 서로의 반대 측면에 서서 각자의 위치를 고수한다. 전문성을 지닌 한 사람이 공적 지면과 사적 지면에 쓰는 글에는 방향성의 차이만이 있을 뿐, 둘 중 어느 하나를 아마추어의 영역으로 보기는 곤란해진다. 그저 축적의 의미에서 운동 이미지의 강하를 선택할 뿐이고, 오히려 의식의 고임에서 파문을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언더만이 할 수 있는 위치지정학적인 장점이 있기도 하다. 즉 특정 수신인을 목표로 꾸려가는 블로그 비평은,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언더’지만 그럼에도 한 생태계를 꾸리며 끌어간다는 점에서 프로의식을 갖기도 한다. 그렇다면 ‘언더’는 표면에 포섭되지 않는, 의식의 잔흔을 따라가는 여행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의미화와 포섭에 미끄러지면서, 이를 서로를 떠나보내는 쓸쓸함과 마주하지 못한 후회로 오인하지 않으면서. 아마추어 비평은 영화가 무언가를 포착하는 일이 한편으로는 시간의 여분임을 직시한다.
이런 정의조차 적확하게 들어맞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상상의 영역이지만,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킬러 같은 경우라면 쓰임과 역할은 그리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앞뒤 맥락 없이, 해당 동작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것은 프로의 준비된 자세다. 도구는 무언가를 가능하게 할 뿐,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돈의 유통이나 재화의 소모 같은 측면이 아니라, 한 개인의 손길이 다른 누군가에 닿는 일에 관해서라면 위의 정의는 적확하다. ‘언더’의 관점으로 바라본 프로는 아마추어의 다음 단계나 층위에 관하지 않으며 도리어 생태계의 순환과 자생원리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프로’는 지위를 자신의 쓰임과 역할을 잘 이해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와 같은 지대 형성의 역할은 표층과 언더를 분간하는 일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프로’는 자기만의 영역을 갖고서 움직이는 존재에 더 가깝다. 무빙 이미지에 관한 예술사의 합의된 정의처럼, 이미지는 특정한 면에 고정되어 감각을 ‘방출’하는 게 아니라 자아를 세계에 발산한다. 따라서 우리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두고서 위치 에너지의 격차를 발산하는 게 아닌, 자신을 위치 지으면서 힘의 역학을 응용하는 무술가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모두 언더에서 자생하면서 자기만의 영역을 획득하고, 익힌 기술을 토대로 표면에 올라가 훌륭하게 비즈니스를 해낸다고 볼 수 있다.
언더에서 활동하는 비평가는 스스로를 비평가로 의식함으로써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한다. 어디에서 활동하는지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하나의 글이 자신이 속한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는지를 줄곧 고려하는 일이다. 비평은 자신이 한 세계에 소속되어 있다는 믿음에 기반하지, 자격을 이루어 이를 토대로 자기를 증명하는 일은 아니다. 한 세계에 소속될 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자문하는 것은 기실 모든 노력가의 고민일 테니, 후자는 전자에 포섭될 수도 있겠다. 다만 이 모든 일에서 중요한 건, ‘언더’는 아마추어나 프로라는 말로 구분되는 영역이 아니라 같은 빌딩에 입주한 다른 층의 입주민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믿지만, 결국 한 지구에 산다는 점은 동일하다. 홍콩 지구의 높은 용적률은 이곳이 살기 힘든 땅이어서가 아니라, 한 세계에 모두를 살아가게 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와 유사하게 ‘언더’는 숨어들면서 물 밑의 연결을 꾀하는 것, 사방으로 흩어진 감각들을 한데 모아 우리 모두를 한 세계에 어울리게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지구에서 ‘바깥’은 우리를 우주 안의 한 생명체임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같은 하늘을 바라봄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각자가 익숙해진 세계를 향해 외부로 열린” 윤리성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