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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10. 2024

과거를 묻고, 과거를 묻는 일

씨네21 제29회 영화평론상에 대한 단상


함연선은 2019년에 「씨네21식 비평」이라는 글을 썼다. 솔직히, 이 글이 기고되었을 때는 이걸 다시 읽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2024년에 글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씨네21의 평론상이 구설에 올랐기 때문이다. 29회 평론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그들은 “신인을 뽑고 싶었지만 마땅한 인재가 없어 경력직을 뽑았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지면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는데, 하나는 평론가로 활동 중인 사람이 상을 받은 건 신인에게 돌아가야 할 기회를 빼앗은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씨네21은 고정적이면서 지면적인 지면을 제공하므로, 문학계의 등단 관행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이 둘은 각각 사태를 신인과 기성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셈인데, 이 이야기의 핵심은 간명하다. 팩트는 응모조건이 나이, 학력, 성별, 경력 무관이므로 문제로 거론될 만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신인이 되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점도 분명 옳은 말이다. 씨네21 평론상이 등단을 위한 자리이든, 아니면 지면확보를 위한 자리든 간에 무언가 분위기를 바꿔줄 수 있겠다고 기대하게 되는 쪽은 분명 ‘뉴페이스’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큰 틀에서 보면 영화 비평계 자체가 갖는 한계를 기반에 두므로 양측이 서로 대립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함연선은 위의 글에서 오늘날 영화 평론계에서 부재한 건 ‘메타비평’이라고 말하면서, 영화에서 무빙 이미지의 가치는 언어화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글로 움직이는 이미지를 묘사하겠다는 집념”이 메타비평을 주저하고, 지양하게끔 한다는 이 지적에서는 단순히 좁은 사회 안에서의 예우 차리기 그 이상의 분위기가 감지되는 듯하다. 한 다리 건너 다 아는 사람이니까 메타 비평을 지양하게 되는 게 아니라, 영화를 언어로 적확하게 표현하는 일이 그들을 현실에 붙잡아두는 일이라고 오인할 뿐인 것이다. 오늘날 완전영화의 이상 아래 세워진 만신전은 이런 원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믿음을 구현하려는 시도란 언어를 물신숭배하는 것과도 같아서, 영화비평은 곧 영화가 아니라 영화언어에 대한 가치화의 작업이다. 결과적으로 현대 영화 비평은 영화 자체가 아니라, 영화 자체에 대한 메타비평을 영화 언어로 수행하고 있다. 마치 원본으로는 구동이 불가능해서 다시 에뮬레이터로 구동하는 프로그램처럼, 영화비평은 이런 번역 과정에서 일정량의 손해를 보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쪼록 더 프로그램이 가볍고, 호환성이 좋게끔 코딩하는 일이 우선시되므로 필자를 발굴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숙련된 코더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 대한 분과 정의가 희미해지고 영화비평이 위기론에 봉착한 지금, 세계는 점점 더 방어적이 된다. 


위의 문장과 더불어서, “경력자를 또 수상자로 선발하는 일에 고민이 있었다”는 서두의 제언이 눈에 들어왔다. 평론상의 특성상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일에 목적이 있을 테니, 아무래도 신인이 있다면 그쪽을 살펴보는 게 더 좋을 텐데 그럼에도 기성이 뽑혔다는 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해 당선자인 이병헌 평론가가 말하듯, 영화평론계는 점점 고인물 시장이 되어간다. 원래 영화평론을 하던 사람이 다시 영화평론에 도전해서 글을 쓰는 것, 여기서 신인의 존재는 점점 보기 힘들어지며 순수하게 영화평론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중고신인의 증가가 시사하는 바는, 곧바로 실무에 투입할 수 있는 인재를 선호하게 됐다는 뜻이고 바꾸어 말하면 신인을 키우기보다 이미 완성된 사람을 뽑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씨네21이 말하는 ‘최우수상’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이미 완성된 사람을 뽑는 것이라면 구태여 신인을 지목하는 이유가 있을까. 저 심사평에서는 ‘신인을 찾고 싶었는데…’라는 말은 사족에 가깝다. 나는 씨네21에 응모하는 참가자들은 자신이 괴물신인으로 인식되기보다, 그동안 해왔던 노력을 인정받으면서 이를 토대로 활동의 저변을 넓히는 쪽에 더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 간에 경쟁하는 일이 공평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신인 부문과 기성 부문을 분리하든가 해야 한다. 


씨네21은 새로 발굴한 영화평론가를 자신들의 지면에 데려옴으로써 신규 평론가의 시장 진입과 성장을 응원함과 동시에, 어느 정도는 자기들의 문화에 맞는 인물을 선발하려 든다. 채용 시장으로 본다면 아직까지 2010년대의 공채 방식을 유지 중인 건데, 사실 이직이 활발해진 것만큼이나 정말로 신규 영화 평론가의 존재감이 희미해진다는 점도 확실하다. 혹자의 지적을 따른다면, 씨네21에서 등단했던 필자의 80퍼센트 이상이 영화평론계를 떠난 전례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씨네21의 최근 5년 간 당선인 경력을 살펴보면, 영상문화나 영화이론과에 학부 이상으로 공부했거나, 영화 뉴스레터 혹은 유튜브 등으로 활동하면서 경험을 쌓은 숙련인이 대다수다. 그러니까, 이들은 정말로 신인인가? 채용시장에서는 신입을 키우는 것보다 “관련 경험이나 실무 경력이 없는데 이 직무에는 왜 지원한 건가요?”라는 말이 나오곤 한다. 씨네21 평론상도 그렇다. 우리는 당선을 위해 영화 관련 활동을 해야 하는 현실에 놓인 것만 같다. 모 소설의 도입부를 인용한다면, “아무래도 우린 좆된 것 같다.” 그러니 이렇게 방어적 입장을 고수하는 일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건 아니다. 한 세계와 싸우기보다는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는 시도가 더 많아졌다. 개척자보다 방랑자가 더 많아진 지금, 영화평론상은 점점 더 인재를 찾기 힘들어졌다.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을 지원하는 일이 평론상의 주된 목적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누가 과연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고려할 필요는 있다. 평론상에 당선되고자 영화이론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영화이론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영화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하는 과정에서 영화평론상을 받는 게 아니라, 영화평론상을 받기 위해 영화에 대해 잘 알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이 경우, 영화평론상은 영화 공부에 대한 동인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 자체로 영화에 대한 관심인 것만은 아닐 테다. 이를테면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좋아하는 자신에 대한 이색적이면서 고색적인 도취가 그렇다. 등단에 대한 환상이 거둬지고 엘도라도가 실존했던 도시로 밝혀진 오늘날, 씨네21 평론상은 영화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보다 영화를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비례대표 선발전으로 변모했다. 평론상을 받은 사람이 대권주자가 되어 커뮤니티 순회를 다니는 이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영화 문화의 수행성이 정치와 파벌 싸움으로 변모한 것만 같다는 인상도 준다. 가령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 않는 사실 중 하나는 시네필은 본래부터 통합될 수 없는, 분열의 양상으로 전개했던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젊은 시네필’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일은 그냥 자신에게 표를 던지는 유권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에 불과해 보인다. 


이런 자리가 아니라면 서로 엮일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목표 삼는 것과 영화에 대해 글 쓰는 건 확실히 다른 일이다. 완전함은 한편으로 닫힌 세계이기도 해서 자칫하면 고립되기가 쉽다. 그런 점에 매료되어 영화평론을 읽게 되지만, 영화평론이 세계의 최전선에서 임전무퇴의 각오로 전투에 임한다면, 여기서 ‘외부’는 실패나 패배처럼 무언가 비천한 일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하고 항상 생각한다. 한 영화를 두고서 이에 골몰하는 일은 미학적으로 우수한 평론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완성도로 인해 외부와 소통할 때 별도의 번역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서로 다른 세계에 살더라도, 영화를 향한 마음이나 의도가 같음을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언젠가 씨네21은 밀레니엄 시네필을 두고서 ‘어디에’라는 말을 주어로 사용했다. 오늘날 영화 담론은 마치 지하생활자의 수기처럼 쓰인다. 영화에 대해 말하는 건 특정 영화 위주가 아니라 특정 커뮤니티를 따라 이어진다. 더쿠, 펨코, 디시인사이드, 엑스(구 트위터), 인스타그램, 무코과 익무, 그리고 이 모든 표면에 포섭되지 않는 움직임이 수면 아래 꿈틀댄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한 편의 영화를 말하는 좋은 글이 모두를 통합할 수는 없다고 느낀다. 글 하나에 대한 생각은 파편처럼 부서지고 나면 여기엔 다시금 ‘어디에?’라는 문제의식만이 남고야 만다. 


우리는 멀티버스를 살아가면서 서로를 변종으로 상대화한다. 자신이 원하는 성향이나 분과가 아닌 사람이 대선주자로 선발되었다고 해서 커뮤니티 전체가 움직이는 일은, 아무쪼록 우리가 바라던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혹자는 영화의 완전함에 반해 영화 속에서만 사는 것, 즉 영화를 통해 내부에 사람들이 포섭되어 통합되는 일이 영화에서 선지자의 기능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영화가 완전하다면, 그 완전함에 자신이 끼어들 구석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영화는 흔히 영화관이라는 공간설정에서 무언가를 내포하거나, 포집한다는 뉘앙스가 있다고 여겨지지만, 결론적으로 영화는 우리의 삶을 대리하지 못한다. 영화가 무빙 이미지인 건 그런 영화의 움직임에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상대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황금향에 모두가 삼켜져야 한다고 믿는 일은 영화가 갖는 상대화의 기능을 박탈하고야 만다. 쉽게 말해, 영화는 “알아보기 쉬운 천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런 천장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누가 세계관 최강자인지를 가리는 우열논쟁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는 꼭 영화를 닮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영화를 대하는 태도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더 가까워야 한다. 개방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끝내 둘 중 하나를 택하지 못한 채로 몰락해버리는 것은 몰락이 아니라 과거를 묻고, 과거를 묻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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