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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19. 2024

영화는 연대를 패잔병의 서사처럼 말한다


“종교의 요점은 깨어나는 것이다. 

‘다른 세계로 가려는 꿈은 그저 꿈일 뿐이며, 

어쩌면 깊은 죄악일 수도 있다.” -애덤 S. 밀러- 

  

얼마 전에는 학부 시절에 글이 좋다고 말씀해주셨던 교수님을 만나 식사와 커피시간을 보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글이 예전보다 더 좋아졌다는 말이 나왔고, “주변에서 그렇게 말하더라. 점점 늙어가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잘하는 것과 못하는 일을 구분하는 것. 끼어들어야 할 구석과 빠져야 할 구석을 알아보는 것. 한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한 개라도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닐까. 처음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확실히 정했었다면, 삶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하지 않았을까. 면접에서도 무언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었을 테고,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일도 없었을 테다. 어쩌면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남은 걸지도 모른다. 마음속 한 구석에 있는 자신을 외면하면서,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불안을 설득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미래에 대한 환상과 심적인 풍요가 사라지고 나면, 겉에 걸친 것을 의식하는 일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무엇이 하고 싶은지를 모르겠다는 말에 대한 하나의 가설은, 그 무엇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얻은 노하우는 무언가를 버리는 일이었고, 자연스레 자신에 품었던 기대도 내려놓게 됐다.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영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소시민적인 가치만을 요구하게 됐다. 


KMDB에 올라온 웹진 해파리의 글을 읽었다. 이 글에서 특기할 만한 단어는 크게 세 가지인데, 폐허, 주변, 비주류다. 누가봐도 좁은 판에서 주류와 비주류가 나뉜다는 것도 신기한데 거기서 또 프로와 아마추어가 나뉜다. 아마추어는 프로를 추종하고, 반대로 프로는 아마추어를 자청한다. 단순히 겸손이라고 보기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듯한 이 모습은, 이여로가 말하는 한 현상을 연상케 한다. 그는 아마추어리즘을 박탈이나 부재로 느끼기보다 이를 제도화하자고 말한다. 수동적인 상태에 머물기보다는, 주변부에 머무는 상태의 조건상황을 두고서 실천의 계기와 전제로 삼자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서 주변인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걸 떠올리게 됐다. 젊은 시네필의 특징은 스스로는 시네필임을 자칭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씨네21은 설명한다. 영화 문화를 외부의 ‘객체’로 바라보면서, 자신은 그 주변을 맴돌 뿐이라고 여기는 게 오늘날의 시네필이다. 이와 같은 점은 근래의 영화 문화가 몸담은 현실계와 어떠한 관념을 묘사하거나 투사하는 현상계가 서로 분리되어있음을 보여준다. 혹자는 교과서로 배운 시네필이라는 존재를 우상화한 결과라고도 말하는데, 이 주장에서 시네필은 외부에 자리하면서 원본을 탈환하려 했던 투쟁을 형상화한 것에 가깝다. 


그러나 원본은 없다. 모두가 각자의 세계를 살아가는 상황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만이 외부에 객체로서 놓여있을 뿐이다. 저 멀리에 놓인 영화가 태양이라면, 영화 문화는 짙게 드리운 그림자라고나 할까. 오늘날 영화 문화가 소수자 같은 퀴어 문제와도 결합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런 일은 단순히 영화에 관한 것만으로 보이지 않기도 한다. 자신이 속한 문화의 중심부로 들어가지 않는 것은, 철두철미하게 세계의 관찰자로 남으려는 것만이 아니라 더는 우리가 현실을 바꿀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모두의 현실이 사라지게 됨으로써 ‘영화’가 점점 더 이데아 같은 관념에 가까워지는 한편, 서로를 등진 상황에서 ‘문화’는 항상 영화에 관해서만 존재하는 무언가가 되고 만다. 사람들은 자신을 표현할 때 항상 무언가에 관한, 혹은 무언가를 하지 않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는 한다. 중심과 주변부의 관계도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 있다. 중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곳이 주변부라는 말은, 한편으로 자신을 중심에 두지 않기에 가능한 생각이다. 동창회의 의미가 퇴색되고 같은 반에 있는 친구들이 더는 ‘친구’로 여겨지지 않게 된 세상에서 영화 문화는 더는 제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이 영화의 주요 기능이 된 이후부터 우리는 더는 영화에 살지 않게 됐다. 오히려 실패를 토대 삼아 미래를 상대화하거나, 반사되지 않는 과거를 저버리게 됐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앞날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우리가 자기를 투영할 반사면이 생성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울이란 것은 본디 유리의 반대편을 칠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 세계가 중심을 잃어버렸다는 말은 도리어 자기반영의 문화가 부상함을 보여주며 이는 곧 실패에 대한 인식이 반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반사되지 않는 미래는 도리어 자유낙하의 세계를 헤쳐나갈 바닥이 되어준다. 한 세계를 반사하는 표면은 우리의 얼굴만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걸을 수 있게 해준다. 거울 속에는 세계가 없지만, 그렇기에 실패는 오히려 주변부를 회집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이전 시대가 중심부의 이야기가 전체를 휘두르는 양상을 했다면, 오늘날에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 간에도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는 일이 더 잦다. ‘바깥’에 있기에 뭔가 가시적이거나 구체적으로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새총이 결국 날아가는 반대편에 힘을 가하는 일이듯이 지평선을 향해가는 여정은 서로와의 거리감을 ‘운동’으로 치환한다. 설사 메인시스템과 연결되지 않더라도 약한 연결에서 파생되는 분자구조는 그 자체로 거대한 생태를 이룬다. 꽃가루의 무작위 운동이 원자의 존재를 입증했듯이, ‘외부’는 꿈세계를 증명하는 일에서 그리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큰 이야기가 사라지고 작은 이야기가 내부 구조를 대체한 이 세상은 우리가 거대한 담론을 꺼내기보다 자신이 아는 소소한 이야기를 꺼내놓는 일에 더 적합하다. 아즈마 히로키의 말대로, 더는 세상을 바꿀 만한 힘을 상실했다고 여겨지는 오늘날의 비평은 흥미를 유발하거나 신변을 잡는 일상 속의 이야기에 더 가까워졌다.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오히려 서로와 이야기할 기회를 늘려주기 때문에 긍정적인 지점은 분명 있다. 가령 젊은 시네필은 자신을 영화에 ‘관한’ 것으로 위치 지으면서, 그 위치성을 자신이 아는 세계에 대입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위치는 자기폐쇄적인 시스템에 의해 왜곡될 우려가 있지만, 작은 이야기의 증가는 외부잡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그와 같은 왜곡이야말로 영화를 두고서 서로를 이야기하는 계기 삼게 해준다. 서로 다른 꿈을 꾸더라도, 결국에는 하나의 꿈세계에 있다는 점을 말해주기에 이는 귀중한 경험이 된다. 꿈속에서는 그게 꿈인지를 알 수 없지만, 서로에 대한 신변잡기야말로 도리어 ‘이상현상’이 되어 이곳 세계가 아직 끝나지 않는 미완의 현실임을 말해준다. 즉 ‘끝나지 않는 전쟁’은 그곳이 폐허이기에 가능한 게 아니라 상대화하는 것들 사이에서 발생한 ‘차이’다. 혼자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기보다 이를 보완해줄 동료를 구하는 편이 더 낫다.


영화는 그 자체로 어떠한 꿈세계로 기능하기보다 우리가 쏟아져나온 장소가 바로 현실임을 말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가령 영화가 종교라면, 종교의 기능은 현실의 구조를 고착화하고 이를 합리화하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었음을 떠올려보자. 영화는 세계의 탈출구나 해방구이기보다 우리의 세계가 최종판본임을 말한다. 영화가 끝나면 그제야 우리는 다시금 한 세계를 회복한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변을 흩어보면서, 돌아온 이곳에 현실 감각을 되찾으려 노력한다. 그곳에 아무런 지평이 없더라도 항상 그 너머에 있던 무언가를 잊지 않으려 한다. 즉 우리가 모든 것의 최후에 있기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다. 이곳에서 ‘외부’란 존재하지 않으며 도리어 모든 것의 끝이 바로 이곳이다. 영화는 연대를 패잔병의 서사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방되었다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젊은 시네필에 만연한 주변부의 감각은 ‘하나의 서사를 구축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한 무기력감이 주류를 이룬다. 영화를 중심부에 두면 확실히 개인은 로컬이 될 수밖에 없고, 작은 세계와 큰 세계를 연결해야 한다는 주변의 역할은 이미 큰 세계가 폐허로 변해버린 상황에서 연결 없이 표면만을 타고 미끄러지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한 세계에 깨어나는 일은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던 사실을 마주하는 게 아니라 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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