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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20. 2024

영화의 정상화: 영화평론가 VS 영화 문화의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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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글을 되게 프랑스 사람처럼 쓴다는 말을 듣곤 한다. 미묘한 평가지만, 아무래도 이 말은 언어유희를 즐긴다는 뜻에서 그렇게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가령 문장 하나를 구상할 때는 항상 의미를 열어둔 채로 작성하곤 한다. 이렇게 읽는 게 맞나 싶은 문맥을 여러 개 겹쳐두면서 의미를 중층으로 표현하는 일을 좋아한다. 일본 문화에 빗댄다면 혼네와 다테마에라고나 할까. 일설에 따르면 일본의 속마음과 겉마음 문화는 말 한마디로 목숨이 날아가는 전쟁 사회에서 비롯되었다고들 한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싸움이 나니까 완곡어 표현이 자리 잡았다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면 한 개인으로서 그럴만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되짚어보게 된다. 말 한마디를 잘못해 구설에 오르는 세상을 살아가기에 그런 성향이 된 것은 아닐까. 혹은, 에티튜드를 운운하며 하고 싶은 말을 돌려 말하는 것에 불과한 건 아닐까. 그것보다는 차이에 대한 관심이 더 크기 때문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의미가 하나의 형식에 자리 잡는 일은,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나’를 상기시킨다. 두 세계를 서로 다른 곳에 두는 게 아니라, 둘 모두에 포섭되지 않는 위치야말로 우리가 한 세계에 소속되었음을 보여준다고 말이다. 


어느 곳에도 소속될 수 없는 주변부의 감각은, 앞으로 나서가나 뒤로 숨지도 않으면서 항상 적절한 ‘선’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일본식 문화의 한 감각에 부합한다. 그러니까, 한 문화에 소속된다는 건 내집단이 되거나 외부인이 되는 것 말고도, 인력에 사로잡혀 궤도를 공전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게 영화 문화에서 일컫는 주변부의 감각인 것 같기도 한데,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구분 짓는 일이 그렇다. 혹자는 아마추어가 프로를 참칭하고 프로는 아마추어를 자칭하는 일을 두고서 영화 문화의 특징으로 일컫는다. 어느 곳이나 다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만. 이는 단순히 과시와 겸손의 영역을 넘어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감이 있다. 특히나 평론가라는 직함에 대한 인식이 이를 잘 보여준다. 영화평론가라는 직함은, 영화 문화에서 지식의 한 척도처럼 사용된다. 내가 영화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다른 사람 앞에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말이다. 즉, 영화 문화에서 평론가는 우리가 학력에 대해 갖는 편견과 정확히 같은 맥락이다. 무언가를 하기 위한 행위기준이 아니라, 애써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영화 문화의 평론가는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지 않음의 관점으로 파악된다.”


영화는 영화를 전공하거나 분과에서 활동하지 않는 이들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사회학이든, 심리학이든, 문학이든, 여러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영화에 관해 수준급으로 말하면서도 자신은 정작 ‘영화에 관심이 없다’거나 ‘영화에 짧은 식견이 있을 뿐이다’라고 자신을 낮추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은 영화의 분과적 정의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무엇이면서 무엇이 아닌 영화의 성격을 생각해보게 한다. ‘영화’ 평론가는 영화를 하고 싶어하지만, 반대로 영화 ‘평론가’는 자신이 영화에 대해 씀을 부정함으로써 완성된다고 말이다. 이 경우 영화 문화의 범주는 굉장히 넓어지는데, 영화를 두고서 ‘자기’를 특정하기 위한 좌표 지점으로 사유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영화를 객체 삼으면서, 그에 관한 외부 집단으로 존속하는 일이 이들의 현재를 구성한다. 영화는 어떠한 현상이나 담화가 공통으로 발견되는 장소에 불과해진다. 이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현재를 살고 싶지 않아하며, 이와 같은 사실은 자신이 이야기하는 게 마치 자기 삶의 터전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 일에서도 관측된다. 자신은 그저 주변인에 불과하니 가타부타할 권리가 없다면서, 그게 사람 살 곳은 아닌 것처럼 말한다. 


영화평론가는 영화 문화가 제로그라운드이기에 무언가를 상대화하는 일에 사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이들에게 영화는 항상 최종판본이며, 폭풍의 고리나 파국의 징후가 선명히 관찰되는 장소이므로 이에 맞서 싸울 자신을 가져야만 한다. 이른바 영화평론가는 자신이 프로이기를 자청해야 하고, 이는 자신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자신이 영화의 현재에 존속한다는 인식 아래 완성된다. 이처럼 영화평론가가 폐허를 자신이 살아갈 곳으로 주장한다면, 반대로 영화 문화의 평론가는 그게 보존되어야 할 폐허라고 말한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복원하기에는 관계자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므로 차라리 그냥 망가진 채로 두는 게 낫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둘 사이에는 하나의 현장에 대한 두 가지 생각이 존재한다. 정상화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한국어에서 정상화라는 말은 영어로 두 개 단어로 번안될 수 있는데, 하나는 비교군 형성을 위해 단위계를 하나로 맞춘다는 점에서의 표준 형성이며(Normalization), 하나는 마이너스 상태에 있던 것을 다시 제로 값으로 돌려두는 회귀 과정이다(Standardization). 이를 각각 정규화와 표준화로 칭하며, 전자가 영화 문화의 평론가의 관점이라면 후자는 영화평론가의 관점이다. 


영화 문화의 평론가에게 영화는 여러 문화가 혼성되기 위한 준거점에 가까우므로 표준계의 역할을 한다고 보면 좋다. 이들에게 영화는 자신의 관점을 표현하기 위한 단위에 불과하므로 어디까지나 ‘자기’는 주변부에만 자리 잡게 된다. 반면 영화평론가는 영화를 자신이 생각하는 본래로 돌려놓고자 노력하기에 영화는 표준화의 대상이다. 지금의 영화는 실패하거나 패배했고, 이를 다시 원점으로 회복하려는 게 영화평론가이므로 이들에게서 ‘위치’는 전선이 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 둘 모두는, 영화계에 나타날 수 있는 이상수치를 줄이며 최대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목표가 있다. 주변부와 전선은 서로 상충하는 가치가 아니며, 이상현상을 보며 뒤돌아서지 않기 위한 노력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이례성을 파괴하거나 추방하는 게 아니라 한 세계가 시작되고 있음을 수식하는 사건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폐허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비참하다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 세계를 무너트릴 만한 힘에 관해 사유하게 해주기도 한다. 세계는 한순간에 끝나지 않기에, 우리는 이 폐허를 두고서 정상화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 


우리가 아는 영화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가려는 시절은 어느 때일까. 지금이 틀렸고 그때가 맞다면,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제로그라운드는 어디일까. 영화평론가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전선이지만, 그 방향이 꼭 미래라는 법은 없어서 과거에 대한 맹목적인 회귀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영화평론가는 영웅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독재자가 될 수도 있다. 영화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려는 작업은, 파묻힌 사례에 대한 복권을 동반하지만 반대로 시체들의 밤을 형성하기도 한다. 영화를 이끌어갈 노동력이 부족해서 이미 안식을 찾은 것들마저 다시 끌어와야 하는 이런 상황은 전황의 불투명함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고전 영화에 그치지 않고서 영화의 외연을 확장해 영상 미디어 전반에 영화를 끌어오는 일은 가용자원을 최대한 늘려 전선에 투입한다는 점에서, 이 전쟁이 총력전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개 역사에서는 총력전을 집행했던 사례가 좋게 끝난 것을 본 적이 없다. 설사 전쟁에 이긴다 해도 나라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온갖 인력이 사라지고 난 후이기에 복구 작업도 더디다. 


영화 평론가라는 존재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본래 돌아가야 할 장소를 제시하는 일은, 도리어 현재를 마이너스 값에 둔다는 점에서 상실이나 회복이라는 말에 쓸데없이 에너지를 쏟는 일이 아닐까 한다. 쉽게 말해 영화 문화와 폐허는 서로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 지금 우리는 낙원에서 추방됐을 뿐일까? 위대했던 영화의 시절이 지나고, 영광스러운 순간들을 곱씹으면서 복권되어야 할 영화 목록을 작성하면서, 하지만 긴급하게 호소해야 할 것은 제3세계의 국민이 아니라 우리 곁에 소외된 이웃이 아닐까?  한 언어가 갖는 중의성은 무언가를 지향하기 위함이 아니라 무언가에 대한 지향을 암시할 뿐이다. 서로 다른 의미 층위가 한 자리에 공존하는 일은 둘 사이의 차이가 의미생산 기지가 되어주게끔 한다. 여기서 정상화는 영화가 하나의 꿈으로 이해되기보다는 모두에게 꿈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보는 일이다. 아주 분명하게, 폐허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위에 영유하는 삶을 바라보지만 무엇이 좋은 삶인지, 정상의 삶인지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서로에 대해 말하기 위해 주파수를 맞춰야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평균치로 작업하는 일은 피하고 싶다. 돌아가야 하는 것은 후퇴를 뜻하지 않는다. 


글을 쓰면서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의미가 달리 보이게, 의미의 다층적인 면을 보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지만 결국에는 주변부에만 머무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다. 스스로에 대한 인식도 그렇지만 이미 영화에 ‘관해서만’ 쓰고 있을 뿐, 영화를 쓰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무언가 ‘외부’에만 머무른다는 것이다. 이는 한 문화에 대해 저술하려면 최대한 중심에서 멀어져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부정한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에 대한 반발심리이기도 하다. 정상화라는 말의 문화적인 어원을 생각하면, 더 나서거나 너무 숨거나 하는 일을 구분 짓는 일을 돌아보게 된다. 정전은 영화를 보존하는 일일까 아니면 영화를 살아가게 하는 것일까? 영화의 정전을 작업하는 일은 현재의 활동적인 구성들을 정전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정전을 작업하는 일은 한 세계가 회복해야 할 가치를 지정해서 이에 파생되는 차이를 회복에 대한 원동력으로 삼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서로 간에 벌어지는 것도 있는데 이와 같은 일을 단순한 잡음으로 취급해버리면 화음을 형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상적인 것을 두고서 이상하다고 말하는 일은 그에 대한 교섭권을 갖는데, 부정한 것으로 무언가를 부정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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