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각 슈트는 컴퓨터에 표출되는 오브젝트와의 상호작용을 기기에 보내 피드백하는 웨어러블 디바이스의 일종이다. 처음에는 VR 기기의 연장선에서 HMD와 같은 기기의 보조도구로 사용되었는데, FPS 게임에서 총을 맞을 때의 반향을 몸으로 체험하게 해준다고 보면 된다. 기기 자체의 가격이나 사용상의 문제, 이를 지원하는 게임이 다양하지 않다는 등의 문제로 일반적으로는 잘 찾아보기 힘든 장비가 되었다. 그러나 오브젝트와의 상호작용 신호를 두고서 음향 피드백에 연결하는 소프트웨어가 발명됨에 따라 이 도구는 의외의 사용처를 갖게 되는데, 그건 바로 버츄얼 스트리밍이다. 음향 피드백을 오브젝트 신호로 치환하는 이 변형 소프트웨어는 스트리머의 화면에 영상을 송출하는 때에 빛을 발한다. 시청자가 영상을 도네이션하여 스트리머의 화면에 송출하면, 스트리머의 컴퓨터에 입력된 음향 신호가 이를 촉각 슈트에 전달하고, 이 신호는 스트리머의 리액션으로 표출된다. 즉 촉각 슈트는 음향 신호를 스트리머에 중개하는 장비가 됨으로써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로 변환하는 도구가 되었다.
언제부턴가 버츄얼 스트리밍에서는 촉각 슈트가 유행이다. 주로 자극적인 쪽으로 흥미를 유발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스트리머의 기묘한 반응은 물리적으로 접촉하거나 소통할 수 없는 버츄얼 스트리밍에서, 시청자가 물리적인 접촉을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즉, 촉각 슈트는 시청자가 스트리머의 신체에 물리력을 행사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다양한 형태의 ‘감각’을 제공했다. 촉각 슈트가 화면 상의 디지털 오브젝트를 물리력으로 변환하는 것만큼이나, 시청자의 방송 참여 행위가 스트리머의 신체에 대한 물리력으로 변환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웨어러블 햅틱 기기라는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스트리머의 기묘한 반응을 획득하는 일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인다. 시청자는 촉각 슈트를 경유해 스트리머 신체를 간접적으로 통제하에 둔다. 평소에 도네이션 행위는 디지털 대 디지털 신호로만 관계되나, 촉각 슈트를 통하고 나면 이 신호는 스트리머의 물리적 현실에 관섭한다. 즉 평소라면 스트리머와 시청자는 물리적으로 접촉이 불가한 ‘비대면’ 상태이지만, 촉각 슈트를 통해서라면 상호 간에 위계가 성립한다.
촉각슈트를 입은 상태에서 시청자는 스트리머를 상대로 우위에 선다. 비대면 채널에서는 ‘접촉’이 불가하기에 일반적으로라면 상대방에 실질적인 위해를 가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나, 촉각슈트는 시청자의 영상 도네이션을 물리력으로 변환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위해의 기능을 수행한다. 화면 너머에서는 자신들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지만, 그 역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행사는 양측 간에 합의되었기에 놀이로 기능하는 것이다. 스트리머는 촉각 슈트의 연결을 중단하는 것으로 그와 같은 감각을 차단할 수 있으며, 이는 통제와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연결은 양측이 이를 어트랙션으로 즐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와도 같다. 어떤 면에서는 합의된 폭력이라는 점에서 BDSM의 일환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촉각슈트를 검색하면 나오는 여러 성인향 콘텐츠는 이런 면을 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BDSM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제권의 박탈에서 흥분감을 느낀다는 점에서, 촉각슈트는 자신이 통제되지 않는 영역을 흥미본위로 변환하는 효과가 있다.
이때 슈트는 스트리머 개인의 선택을 따라 디지털 수신호를 몸으로 체험한다는 점에서, 한 세계를 여행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통제되지 않는 영역을 흥미로 변환하는 게 촉각슈트라면, 이는 손으로 만져지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 세계의 외연을 끌어오는 장치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즉, 우리의 몸이 현실계에서 한 세계의 ‘바깥’으로 기능하듯이 촉각슈트는 비가시화된 디지털 세계의 ‘바깥’으로 기능한다.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정의는 오늘날 영화가 관객에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과도 같아서, 오브젝트와 바깥, 관객의 신체와 스크린에 관한 몇 가지 단상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오브젝트의 정의에 내포된 시각 정보를 청각 정보로 치환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스크린에 내비치는 이미지가 디제시스 바깥의 정보를 불러오는 것과 유사하게도 보인다. 특히 스크린은 관객의 시야와 특정한 면에서 위계를 갖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폭력이 합의에 이르지 않은 건 아니다. 시각적 스펙터클은 관객의 신체가 ‘바깥’의 것에 앞서 존재하는 물리성을 갖고 있음을 직접 드러낸다.
예를 들어 영화가 디제시스를 암시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데드풀>처럼 작중 인물의 대사나 시각 효과를 통해 스크린의 존재를 관객에 알리는 게 있다. 이는 영화를 보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만 그쳐서 무언가 더 세심히 점검할 구석은 없다. 한편으로는 <델마와 루이스>(1991), <자유의 이차선>(1971), <복수는 나의 것>(1979)처럼 매체의 물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면서 관객 자신의 현재성을 부각하는 사례가 있다. 이들 영화는 자기를 구성하는 물질적 지지체를 드러냄에 따라, 관객 자신에게도 현재를 구성하는 단서에 접근하게 한다. 그러니까 사유가 직관이라면, 이 직관은 어떤 경로로 운반되고 있는가? 우리의 시간 인식에서 ‘현재’는 ‘지금’이지만, 반대로 ‘지금’을 인식하려면 한 시간의 외부에 나서야만 한다. ‘지금’은 깨어남으로만 사유될 뿐이며, 이는 우리의 신체가 사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사유의 대상임을 말해준다. 우리가 일상에서 신체를 인식하게 되는 것은 대개 ‘통증’을 느낄 때라는 점을 떠올리자. 우리의 몸이 상처 입고 병들 때, 우리는 자아가 육신에 갇혀있음을 깨닫곤 한다.
촉각슈트의 역할은 버츄얼 스트리머 또한 물리적으로 촉발되고 피상되는 육체를 가진 존재임을 말해준다는 점에 있다. 버츄얼 스트리머가 방송 안에서 하나의 캐릭터성을 지닌 연기자로서 ‘매체’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담지한다면, 여기서 그 물질적 지지체를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버츄얼 스트리머는 시청자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절시의 대상이 되므로, 둘 사이에는 오직 방송만이 둘 사이에 합의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촉각슈트를 통해 시청자가 버츄얼 스트리머의 신체에 관섭할 때 이와 같은 행위는 매체의 물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된다. 즉 촉각슈트는 버츄얼 스트리머의 방송에서 그와 같은 버츄얼을 초과하는 가상에 가깝다. 평소의 방송에서 버츄얼 스트리머는 안의 사람과 외부에 노출되는 캐릭터를 서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연기자로 기능하나, 촉각슈트를 통해 물질적 지지체에 간섭할 때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디제시스가 노출되는 것이다. 촉각슈트가 캐릭터와 안의 사람을 분리함에 따라, 평소라면 보여질 수 없는 디제시스를 시청자는 감각하게 된다.
촉각슈트가 행사하는 물리력은 기존 시각 매체에서 진행되는 절시를 대체하는 감이 있다. 오브젝트와의 상호작용을 소리반응으로 치환하고, 이를 다시금 물리력으로 변환하는 촉각슈트는 시각적 응시가 폭력성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연상케 한다. 예를 들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경우 영화는 화면 외부를 보여주는 것을 의도적으로 제한하지만, 출처가 불분명한 낮은 소음이 화면 전반을 에워쌈에 따라 해당 비주얼이 내포하지 않은 외부가 있음을 관객에 간접적으로 알린다. 평소라면 보여질 수 없는 디제시스는 소리반응으로 유입되는데 그렇다면 이때 영화의 기능은 일종의 촉각슈트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초기 영화의 매체적인 관점에서, 신체 감각에 대한 일방적인 소통을 응용하는 놀이공원의 어트랙션은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감각을 일시적으로 교란한다는 점에서 유희대상이 된다. 어트랙션은 감각을 받아들이는 주체가 한 개체의 신체에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 개인의 인식을 초과하며 이는 곧 영화가 본격적으로 꿈세계로의 진입을 요구하는 ‘대중’매체임을 증명했다.
일반적으로 인터넷 방송의 특징으로 실시간성, 상호소통성이 부각되곤 하지만, 시청자와는 달리 스트리머는 시청자의 존재를 텍스트 기반의 대화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점에서 정보 비대칭성이 있다. 이와 같은 정보의 비대칭성은 무대 위에 오른 배우가 무대 밖의 군중을 인지할 수 없다는 점에 빗대어질 수 있다. 무대에 오른 배우와 관객은 서로를 볼 수 있지만, 배우는 관객의 존재를 의식해서는 안 되며 이를 어기면 공연의 물질 기반이 흔들리게 된다. 즉 ‘무대’는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합의가 물질적으로 드러난 형태로 볼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점은 인터넷 방송의 플랫폼적인 형식에 빗대어진다. 예를 들어, 버츄얼 스트리밍은 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존재가 암묵적으로 합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거나 공표하는 일은 금기시된다. 이는 버츄얼 스트리밍의 물질적 지지체가 바로 이와 같은 ‘무대’의 양식이라는 점을 보여주며, 나아가서는 신체의 기능성에 의지될 가능성을 타진한다. 버츄얼 스트리머의 아바타는 연기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시청자가 의지할 것으로 합의된 ‘물질적 지지체’다.
연극에서 무대의 기능은 매체에 대한 양측의 합의를 비준하는 것이면서, 그와 동시에 한 세계의 법칙을 설정하는 ‘영역’을 전개하는 것이다. 무대 위의 배우가 한 캐릭터의 정체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상을 연기한다면, 이 가상은 오직 무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와 유사하게 버츄얼 스트리밍은 인터넷 방송의 범주에서 대중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 버츄얼 스트리머는 실물 이미지가 아닌 버츄얼 아바타의 형태를 빌린다는 점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과 보고 싶은 것 사이에 공통분모를 찾는다. 이와 같은 점에서 버츄얼 스트리머의 버츄얼 캐릭터는 그 자체로 무대의 확장으로서 신체로 기능한다. 무대 위에서 배우의 연기는 무대의 ‘바깥’에서 존재하는 자신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만 성립하는 정체성을 가정한다. 버츄얼 스트리머의 방송 또한 자신이 내세우는 버츄얼 아바타의 외부를 나서지 않으며, 이는 아바타의 정체성을 통한다기보다 해당 스트리머의 물질적 지지체로서 이 세계가 구성되기 위한 구성에 가깝다. 이때 촉각슈트는 한 신체의 감각을 교란하고 외부의 관섭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버츄얼을 초과한 가상 존재자의 현전을 가리킨다.
버츄얼 스트리밍에서 가상은 버츄얼 캐릭터의 양식 안에서만 연기되며, ‘무대’는 배우와 관객 상호 간에 직접적인 접촉을 이루지 않겠다는 선언이면서 공연을 위해 지켜야 할 합의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무대’란 외부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개개인의 신체와 ‘바깥’의 관계에 대응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방법은, 소리를 디제시스를 초과하는 가상의 형태로 들여와 버츄얼로 가공하는 것이다. 시각적 응시의 범주를 넘어선 지평선이 있다면, 그와 같은 넓이에서의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여 허가된 예측을 따라 불안을 적절히 통제하는 게 바로 이 신체의 역할이다. 버츄얼 스트리머의 신체는 한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작용 패드에만 불과한 게 아니라, 우리가 신체를 얻고 감각하는 행위는 보여지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등속 운동이 일치한 결과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 점에서 이 신체는 우리가 한 세계의 가늠자로 사용하게 되는, 혹은 세이브와 로드의 관점에서 현장성을 갖는 ‘객관성’을 지닌다. ‘신체’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려면 지켜내야 할 구획이라는 점에서 인간 존재의 물질적 지지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