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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27. 2024

복수로 호명되는 것


최근에 중학생을 대상으로 <400번의 구타>에 관한 짧은 토크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딱히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학생을 상대로 하니 진행에는 부담 없겠지만, 취업 관련해서는 언제 일정이 생길지 모르는 터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성사되었다면 여러모로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간에, <400번의 구타>를 두고서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가령 <400번의 구타>는 본래 프랑스어 제목이 영미권에 소개되며 번안된 것이라는 점이 그렇다. 일설에 따르면 “faire les 400 coups”라는 프랑스어 제목은 대포 400여 발을 쏘아도 항복하지 않고서 축제를 계속했던 민간의 전쟁 설화를 바탕으로 한다고들 한다. 진위는 역시 알 수 없지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coups라는 프랑스어가 단순히 ‘구타’라는 말로 축약되어버렸다는 점이다. coups에는 구타 이외에 발포 등의 뜻도 있어서 영화이론에서 말하는 Shot의 의미에 정합한다. 그리고 또, faire les 400 coups는 프랑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어리석은 짓을 하다”라는 관용어구로도 읽혀서 소위 ‘문제아동’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짱구나 단비 같은 아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400번의 구타>는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말썽을 부리는 아이를 교정하려면 400번의 구타가 필요하다.” 는 정도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 사랑의 매라는 표현이 한국에도 있었으니, 그런 쪽으로 이해되어도 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프랑스는 해당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기도 해서,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분분하게 토론이 이루어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아이는 때려서 키우는 것이라는 점, <400번의 구타>라는 제목은 그런 면에서 감독 자신이 어린 시절의 고민이나 고충을 호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말썽꾸러기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면서도, 동시에 영화의 숏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이 관용어구는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두들기는 행위가 아니라 ‘축제’를 계속하는 쪽에 더 뉘앙스를 두고 싶었던 듯하다. 영화이론에서 ‘숏’은 이미지와 폭력을 연결하는 징검다리로 여겨졌는데, 그 반대편엔 수없이 두들겨 맞음에도 굳건히 살아가는 ‘세계’가 있다고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소년은 바다를 마주 보는데, 파도는 차이와 반복을 은유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라는 점에서 축제가 계속될 것임을 보여준다. 숏의 반복은 영화적 세계를 허구로 이끄는 게 아니라 한 세계를 실물에 겹쳐놓는다고. 


아마도 트뢰포에게 영화는 자신의 ‘지난’ 날을 보여주는 것이기보다, 현재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쪽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초반에 철창이 일종의 구치 역할을 한다면,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가 철창을 넘어 바닷가로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Coups라는 말처럼 철창을 두들기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부드럽게 넘어가는데 이 장면에서는 숏도 나뉘어 있지 않다. 영화 초반에 문제아로서 제멋대로 굴던 모습은 사라지고, 오히려 그런 역할은 다가오며 부서지는 파도에로 이관된다. 즉, 이제 세계에 주먹질을 하는 것은 소년이 아니라 세계 그 자신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알 수 없는 시간, 무수한 외부를 향해 열린 [세계]보다는 소년의 삶이야말로 비교적 어른의 모습에 가까운 건 아닐까. 영화로 찍은 자신의 유년기란 일반적으로 과거를 묻어둔다는 쪽에 가까워서, 영화 밖의 자신은 그에 상반되어 ‘어른’으로 이해되는 때가 잦다. 그들은 과거를 대상화하면 이를 물리적으로 변형하거나 파훼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허나 영화가 객관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영화를 ‘객체’로 오인하는 때가 있는데, 중요한 건 거울 속에 세계가 없으며 영화 또한 한 인간의 내면을 고스란히 비출 수는 없다는 점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도리어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이유로 인해 생각을 접어버린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생각을 뻗다 보면 점점 의식할 만한 곁가지가 사라지면서 끝내 세계를 완전히 창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때 그런 현실과 상상을 잇는 건, 단지 무엇에 관할뿐이라는 과거의 반성뿐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한 존재의 의미를 제한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유년기의 형태를 닮았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려 하고, 또 현황을 구속하려 드는데, 마찬가지로 개인의 삶에서 유년기의 기억은 현실에 수반한 ‘억압’으로 인식된다. 영화는 분화 이전의 현실처럼 이해돼왔고, 그 점에서라면 유년기가 바로 어른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문제는 그 길에 여러 방식이 있음에도 어느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거주의 자유가 있고,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어릴 때는 자신이 꼭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믿어서 반대로 스스로 상상의 폭을 좁혀버리는 경우가 있다. 아이는 자신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여겨서 도리어 그 자신에 ‘관한’ 무언가를 요구하며, 이 대목에서 ‘어른’이라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목표가 되어버리곤 한다.


유년기에 떠올리는 어른의 모습은 현실에 있는 사실을 토대로 한 게 아니어서 도리어 목표가 될 수 있다. 즉 유년기에는 어른이라는 말이 영화를 대체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어른이 되고 나면 사회가 요구하는 어른이라는 말에 관한 실질적인 지표를 알게 됨으로써 더는 어른이 목표가 될 수 없게 된다. 어른은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없으며, 그저 인생의 과정에서 수행해야 할 ‘가치’일 뿐임을 깨닫고 나면 스스로의 운신을 좁게 둘 수는 없게 된다. 어른은 책임에 대응하기 위해 판단을 외주화하고, 이를 토대로 사물은 그 자체로 외부 신체가 된다. 법률에서 말하는 어른이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지만, 반대로 그런 자유로움이 미래의 ‘열림’에 대응하게끔 한다. 그러니 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현실적인 이유를 따라가는 성인 시절보다 비현실적인 공상에서 사로잡힌 유년기야말로 자신의 능력을 따라 한 가지 명징함을 수행하는 시기에 가깝다. 무언가 설명되는 언어적 세계 앞에 자신이 있다고 말하면, 아이들은 흔히 어른의 세계가 언어화를 거친 이후로 보곤 하지만, 오히려 어른이야말로 언어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문턱 앞에 선 존재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400>으로 돌아가 보자. 트뢰포는 수없이 두들겨도 굳건한 세계를 영화에 담았다. 이 유년기의 기억은 아무리 해도 바꿀 수 없고, 또 돌아갈 수도 없으니 존재는 항상 문 앞에 설 수밖에 없다. 이 기억을 통과하지 않으면 어디로도 갈 수 없고, 한 인간이 이름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대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이름과 기억의 문제 모두가 영화에 담겼다고 보면 좋다. 무엇보다 이 해석은 관점 차이라기보단 앞선 말한 뉘앙스에 상반되는 중첩 문구에 가깝다. 영화를 만들 당시 트뢰포는 이름난 독설가로 악명이 높았고, 그런 와중에 직접 영화를 찍겠다고 나선 결과가 바로 <400>이었다. 자신의 유년기를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현재 작업하는 비평의 과제를 한 번에 요약한 이 결과물은 숏이 지닌 두 가지 성격을 종합한 것이었다. 보존하거나, 보전하거나 하는 것. 해변을 따라 뜀박질을 계속하는 소년의 모습을 보면 바다야말로 마스터 플롯의 일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유레카>에서 소년이 자수한다고 말하고 난 뒤의 풍경 같다고나 할까. 바꿀 수 없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았다. 결국 영화의 결말은 어딘가를 향해가는 것, 철창이라는 이름의 ‘언어’를 넘어가는 일이 되어야 했다.


사실 이런 영화들에서 왜 사라지는 쪽이 어른이 아니라 ‘아이’인지에 관해서는 더 깊이 있는 토론이 필요하다. 더는 바뀔 수 없는 쪽이 어른이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성장의 여지가 없으므로 아이의 편을 들어주는 쪽이 옳다. 어른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규율이나 규칙에 자신을 ‘대응’할 수 있으므로 영화가 요구하는 통과의례를 무난하게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어른은 망설이는 존재라는 점이 이 의견에 발목을 잡는다. 어른은 자신의 영역을 자각한 나머지 바다가 자신을 설명하는 모든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래서 바다 너머를 설명하는 일에서도 해변을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 지평선을 넘어가 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반면 영화의 마지막에서 소년은 아이들이 뛰노는 배경을 넘어 바다에 도달한다. 문제는 그 소년이 바다에 한번 몸을 담갔다가 다시 방향을 돌려 빠져나온다는 점이다. 소년은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 영화는 부숴야 할 것이 아니라 부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coups는 아무리 해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말괄량이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혹은 비평의 전선에서 자신을 굽히지 않는 혁명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주먹을 날리려면 우선 단단한 주먹이 필요하니, 부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귀신이 지평좌표계를 요구하듯, 영화에서 유령성은 자신을 언어의 이전에 두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유명해지기를 자청하는 것과 더 많은 기회를 잡고 싶다는 말 사이에는, 막연한 뉘앙스 차이가 있다. 대개 유명해지고 싶은 사람은 다양한 기회를 얻고 싶어하므로, 아무쪼록 전자는 후자를 내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하지만 유명해지기 싫으면서도, 동시에 기회를 잡는 일에 소극적일 수도 있는데 아마추어리즘이 그렇다. 자신은 이 세계에 살고 있는 게 아니며,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고 말하며 관찰자의 역할을 하기를 자청하는 것. 매번 하는 생각 중에는 특히 그런 게 있는데, 자신이 프로답지 못하다고 여기는 일은 단지 어른이 되기 싫을 뿐인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있다. SNS 나 모임 같은 대외 활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엔 주변부의 감각이 있다. 그래서 둥지 안에서 그냥저냥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기성 평론가로 호명된 걸 보고 꽤 재밌었다. 평론이 이름을 건다면, “의미도 체계도 없는 하나의 기호로서” 블로거의 역할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관해’ 생각할 때 그에 이름이 묶이지 않도록 한다. 이런 점에서, 무언가에 관해 말하려면 어쩔 수 없이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는 일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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