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보고 들은 것 중에서는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한다.”라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게임 [스타레일]의 페나코니 지역에서 종장에서 언급된 이 말은, 의미 있는 꿈을 지속하는 것보다 무의미한 현실을 살아가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의미는 언어의 이후에 자리 잡는다는 점에서, 현실은 언어에 포섭되지 않는 몇몇 사건들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꿈에서는 모든 게 의미 있지만 현실에서는 의미를 갖지 않는 게 무수히 많다. 꿈은 무의식에 영향받기에 그게 뭐든 간에 자신이 본래 갖고 있던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은 언어의 바깥에 있고, 그래서 현실에서는 가끔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에게 꿈은 본래부터 갖고 있던 가치를 드러내기에 긍정되지만 반대로 현실은 아직 우리가 되지 못한 무언가를 바라게 한다는 점에서 부정이나 우울, 압박에 시달리는 장소이다. 특히 현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게 자신과 충돌함에 따라 벌어지는 몇몇 사건이 있다는 점이다. 아직 갖지 못한 것은, 자신의 언어로 설명될 수 없으므로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꿈에서는 설사 그게 진정한 이해는 아닐지라도 어쨌거나 상대방과 통하는 느낌, 혹은 어떤 것이든 간에 말이 되는구나 싶은 때가 있지만 현실에서는 서로가 서로에 관해 말이 안 된다고 여겨서, 우리는 오히려 말이 통한다고 여겨지는 영화로 도피한다.
말의 앞뒤가 맞는 게 영화라면 누구라도 영화에서 의미를 찾고 싶어할 것이다. 이는 주로 현실이 힘들거나 할 때 더 ‘약한’ 균열의 지점을 찾아가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나마 의미의 연결고리가 허술한 곳에서 앞뒤를 짜맞추는 일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의 흔적으로 작업하고, 무언가 말이 될 만하다 싶으면 그 자리에는 항상 ‘영화’가 등장해왔다. 그러니까 ‘영화 같다’는 건, “그럴 법도 하다.”는 말로 들린다. 어쩌면 청춘 영화나 로드 무비의 마지막 장면이 난데없이 멈춰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일에도 그런 연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을 마무리 짓는 방식으로 프리즈 프레임, 혹은 그와 같은 부류를 택한 영화들은 출구를 제거함으로써 영화의 세계를 공공연히 하고자 시도했다. 꿈의 세계를 유지하려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시도가 존재했다는 점은 영화와 불멸이라는 표현이 관객의 삶과 유비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한 순간이 가치 있는 건 우리가 한순간을 살다가는 존재임을 잘 알아서다. 모든 영화는 한 개인의 삶보다 먼저 끝나므로 자연스레 영화는 우리 삶 안에 자리하는 사건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무언가를 말한다는 건, 그에 앞서 무언가를 한번 끝냈다는 뜻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영화를 말할 수 없고, 한 사건에 대해 말하는 건 일이 다 끝나고 나서 자신의 언어로 체화되었을 때다. 그런 점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영화를 끝냈다는 것과도 같다. 분명하게도,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한다.
대화나 활동, 경험 등에서 얻었던 것들로 우리는 꿈을 작업한다. 그 꿈은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될 수도 있고, 밖으로 꺼내기 힘든 신비체험에서 비롯된 무언가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렇게 무언가를 끝내고 다시 시작하는 일이 추락과 비상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어떠한 실패를 마주하는 일은, 한 시대를 끝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꿈을 형상화하기 위한 예비작업이며 이는 영화가 기본적으로 ‘깨어남’의 예술임을 뜻한다. ‘언어’가 자신을 가둔다면, ‘깨어남’은 자신을 끝내는 것과도 같다. 결국 영화를 보는 건 모두와 연결되는 일이고 우리와 영화 간에 존재하는 공통점은 말하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건, 삶에는 말할 수 없는 여러 많은 사건이 있기 때문이고 이런 것들을 다시금 말이 안 되는 것으로 되돌리는 게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영화를 더 많이, 자주 보아야 한다고 말해두고 싶다. 영화가 직접 무언가를 말하지는 않아도, 이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우리가 꿈을 잃지 않게 해준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는 일을 두고서 우리가 말을 맞춰보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까? 사람들이 꿈을 꾸는 것은 결국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서다. 각자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면 여기서 ‘영화’는 화합을 이루어내는 조건이 될 수 있다. 한 사건이 언어로 정립되는 상황을 가리킨다면, 영화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사건이다.
영화를 보는 것은 대개 언어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이를 되찾으려 하거나, 혹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걸 풀어보려고 시도할 때다. 여기서 영화는 단순히 의미의 논리를 촉발하는 단서로만 사용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이야기하는 일에 대한 실마리가 되어준다. 영화는 한 개인에 관해 말하는 언어가 되어주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사건은 자기를 반향하는 가치가 되고, 우리는 불안을 느끼기 싫어서 사건을 인위적으로 유발하거나 혹은 그에 노출되려 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충분히 있을 법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삶을 긍정하는 일은, 단순히 우울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만 필요한 처방전은 아닐 것이다. 영화도 하나의 꿈이지만, 결국 그 꿈은 깨어져야 마땅하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은 될 수 없었다. 태생부터 영화는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꿈이었고 반대로 그런 바깥이 영화의 세계를 공공연하게 비준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었다. 이를 통해 관객은 극장을 나오며 자신을 하나의 사건으로 ‘촉발’시킬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의 끝을 알고 산다는 것은, “각오한 자는 행복하다”는 일순의 마음이었다. 영화를 죽음에 빗대는 몇몇 설명들에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게 그렇다. 자신을 찾고 싶을 뿐이라면 그 꿈은 깨져야 마땅하다. 언젠가 꿈이 끝날 것을 알고 있기에 도리어 꿈을 선호하게 된다는 아이러니는 그 실질상에서 ‘꿈’이 죽음을 위해서만 존속 가능한 ‘현실’에 가깝다는 점을 보여준다.
영화가 한 세계의 끝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일은 우리가 죽음에 초연하기를 요구하는 게 아닐까. 꿈-영화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날지를 미리 알고서 임하는 게임과도 같다. 매체로서 게임의 특별한 점은 ‘할 수 있는 것’의 반대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게임에서 디자인의 역할은 유저가 상호작용하는 영역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서로 상반되게 배치하지 않는 것이다. 맵의 한 구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일이 반대로 이 안에서만 세계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게임은 유저에게 ‘선택 가능하다’는 착각을 심어주어야만 하고, 이와 같은 디자인은 불가부 여부에 판가름나지 않는다. 설사 그게 ‘그럴 듯한’ 자유에 불과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이곳 세계는 ‘말이 되는 것처럼’ 여겨져야만 했다. 영화도 그렇다. 영화는 진짜 현실에 있을 법한 이미지로 작업하지만, 이곳에서 ‘말이 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의 반대말이 아니다. 영화에서 디제시스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계속 보여주고, 이를 따라 기대할 만한 것도 있다고 여기게끔 하지만 사실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깥은 없다”. 만약 영화가 우리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무언가라면, 바깥이 우리 세계 안에 속한다고 보는 것은 막연한 희망일 뿐이다. 영화는 특정한 조건 안에서 언어가 되기를 선택한 것들이고, 언어로서 드러난 게 있다고 해서 그 반대편에 언어의 바깥이 있는 건 아니다.
영화에서 ‘우연’은 현실을 장악하는 가치와도 같아서, 우리는 우연한 마주침을 기대하거나 우연한 행운을 고대하기도 한다. 영화는 그와 같은 현실의 바깥에 자리한 것들을 두고서 “말이 될 법한 것”으로 사유하며,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건 현실이 그런 언어화의 바깥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불행한 것은 그와 같은 ‘만남’이 모두 예비되었다는 점이다. 모든 건 이미 주어졌고, 영화는 그걸 근사하게 드러낼 뿐이라는 점은 우리로 하여금 어느 한 곳에 안주하게 한다. 한 사건을 통해서라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은 무언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벌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일 것이다. 가령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나 <와이키키 브라더스> 같은 옛날 영화, 혹은 <걸즈 밴드 크라이>와 <봇치 더 락> 같은 최근 애니메이션에서는 꿈을 꾸는 일이 성공에 대한 전제보다는 실패에 반사된 표면을 응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에게서 꿈을 수행하는 것은 마치 꿈의 청산작업을 마치고서 자기를 재구성하려는 일처럼 여겨지는데 이때 ‘자기’는 무언가를 담기보다 오히려 ‘바깥’을 포집하는 구성물로 활용된다. 이른바 바깥이 한 세계를 구성하는 일과 연결될 때 우리는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고, 꿈이 현실과 교배하지만 그게 근친이 되지 않는 건 오롯이 자기살해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