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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05. 2024

모험 또는 서곡: 영화 비평과 도메인 확장


얼마 전 게게가 연재한 만화 <주술회전>이 끝났다. 정확하게는 아직 ‘안’ 끝났지만 어쨌든 곧 끝날 예정이다. 이야기의 전개와 관계없이 재미만큼은 확실했다는 평가를 내린 가운데, 비슷한 시기에 연재됐던 소년만화 중에서는 그나마 논란 없이 끝났다고 생각된다. 우선 <진격의 거인> 같은 경우는 전례 없는 실언으로 나락을 갔었지만, 늦게나마 단행본 분량을 추가로 넣고 여기에 애니메이션으로 정사를 수정한 경우다. 작품이 말하듯 이미 벌어졌던 과오를 되돌리기란 불가능하나, 그래도 책임을 졌다는 점에 위안 삼을 만하다. 한편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는 1화에서 제시됐던 목표를 부정한 채, 모든 걸 잃어버린 채로 원점으로 돌아가는 듯한 인상을 줌으로써 ‘소년’점프답지 않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데쿠는 개성이 없으면 히어로도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여서, 독자는 ‘뻔하지만 그래도 행복한’ 결말을 원한다는 걸 손수 증명한 사례가 됐다. 현실에 똑같이 좌절해버린다면 우리가 만화를 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 만화는 컷과 컷으로 분절된 꿈세계에 가까워서, 영화가 그걸 최대한 지워버리려 하는 것과는 달리 만화에서는 현실인식이 보다 적극적으로 작용한다. 영화에서 관객의 지위는 ‘자기’의 위치에 등장인물의 입장을 새로 기입하는 자리고, 만화에서 독자의 지위는 현실을 부수어 다시 상상을 불어넣기를 반복하면서 주인공이 극을 끌어가는 데 사용하는 상상력이라는 ‘근육’을 키우는 것에 있다. 이 상상력은 특정한 결로 축적되어 그런 쪽의 방향으로만 힘을 발휘하지만, 일상을 영유하거나 더 복합적인 활동을 함에 있어 그게 실패하거나 좌절될 것이라는 ‘피로감’을 덜어주는 일에 효과를 발휘한다. 


피로감이라는 표현에 관해 생각해보고 싶다. <주술회전>에서 자주 사용되는 개념인 영역전개는 영어로 Domain expansion으로 풀이되는데, 사실 이 번역이 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있다. 도메인은 개인이 전문성을 지니고서 활동하는 영역을 뜻하므로 ‘영역전개’란 자신이 더 잘 활동할 수 있고, 담론이나 이야기의 정합성을 더 잘 발휘할 수 있는 장소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잘 아는 만큼 확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 어찌 보면 피로감이 줄 것 같기도 하다만, 영역 안에서는 외부의 도전자나 위협 등에 쉴 새 없이 노출되기도 해서 오히려 숨어있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자신이 하려는 말을 계속 유지하면서 무언가를 하려면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일이 필요하고 적어도 이는 비평가로서 가져야 할 미덕임은 분명하다. 그냥 무언가를 두고서 말하고만 싶을 뿐이라면 굳이 전면에 나서거나 할 일 없이, 도구로서만 자기를 대하면 그만이다. 도구는 항상 중립적이었고 선악은 그걸 사용하는 사람에 달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의견이든 간에 사람들을 끌어모으거나 이에 대응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서, 이 안에서는 자신의 의견이 들어맞도록 정합성을 키우는 일이다. 비평가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는 지지의 의사를 굽히지 말아야 하고 또 이를 방어하면서 내부를 활기차게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비평가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이고, 그런 뜻이 없으면 단순히 영화를 잘 분석하는 기술자에만 불과해진다. 어떤 이는 단지 비평을 자신을 전달하려는 도구로 삼으려고도 하고, 이런 때에 영화는 그저 영역을 유지하는 데 소모되는 연료에 불과해진다. 


 인플루언서와 비평가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인플루언서가 자신을 하나의 브랜드로 내세우면서 이를 토대로 파생상품을 제작하기도 하는 것처럼 비평가도 자신의 생각이나 주관을 상품화한다. 한 개인이 곧 브랜드로 가치화되는 상황에서 ‘담론’은 비평가 고유의 기술이 된다. 비평가들이 자기만의 용어나 설정을 밀어붙이는 것에도 그런 이유가 있다. 인플루언서의 시대에 비평은 사실상 상품과도 같아서 한 발화를 통해 시장을 변동하거나 특정 의견의 주가를 요동치게 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 특정 주식이 상장폐지를 당하는 것처럼 비평가가 나락에 가는 때도 있고, 그럴수록 자신의 주주들을 끌어모으는 일은 더욱 중요해진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무언가 의견을 표하거나 따르는 길이 다르더라도 모두가 하나만을 지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상화라던가 단일화라던가 하는 의견보다는 큰 틀에서 보면 모두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는 점을 염두하고 싶다. 이 세계는 다양한 인물이 목표를 안고 살아가는 군상극과도 같아서 모두가 하나의 꿈에 속하지만, 반대로 각자 꿈을 꾸는 방식만큼은 다르다. 사람들의 꿈을 한 세계, 어느 한 영역에 종속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가능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또한 그래서도 안 된다. 모두가 하나의 종에 속한다면, 판데믹이 벌어졌을 때 우리는 모두 같은 위협에 시달리면서 아무런 외부활동도 하지 못하게 될 테니 말이다. 오히려 겉보기에 분쟁이라던가 이견을 보이는 일이야말로 생물학적인 다양성을 보여주는 게 된다. 유전적 다양성을 품지 않은 생물계는 특정한 위기에 극도의 취약성을 안으므로, 교배를 통한 특성 교환은 필수적이다. 


한 개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은 의견을 이끌어가거나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을 소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바꾸어 보면 우리가 무언가를 상상하기보다 더 큰 수준의 생물학적 종말을 가정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더 큰 힘이나 영역을 지닌 누군가가 이곳에 방어막을 쳐주어야 한다고 말하며, 모두가 결말 이후를 상상하기보다 단지 그에 생각이 가로막힐 뿐인 상황 말이다. 그렇지만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꼭 어느 하나만의 희생만으로 끝날 이유는 없다. 서로 다른 종은 교배나 분배의 갈림길에 서기도 하면서 서로의 특성을 교환하게 된다. 모두가 자기만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이를 혼자만의 것으로 두고만 있을 수는 없듯이 한 개인이 갖는 영역은 의견을 향한 것이기보다 서로를 향해 이어지는 쪽으로 필중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영향력이 큰 개인에 종속되기보다 다양하게 산포하는 소집단간의 교류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언젠가 비평가가 되려면 동시대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또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던 때가 있었다. 당시에는 비평가를 곧 지식인으로 여겼어서 그렇게 생각했고, 가만히 앉아 생각만 하는 자신이 무언가 비평가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비평가는 앞에 나서 자신의 의견이나 영향력을, [영역]을 확장하려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다 주는 길잡이 역할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대개 여행을 떠나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얻고 싶어하지만 정작 여정을 보내는 동안 길을 잃거나 조난하거나 할 것을 우려해서 이를 접곤 하는데, 비평가는 이에 관한다. 


만약 자신의 꿈이 세계 전체로 확대되었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한 영역 안에서 자신의 목적하에 의견이나 담론이 필중한다고 보면, 이 꿈세계는 사람들에게 이견을 달리할 수 없게 하고 또 교섭 가능성조차 지워버리고야 말 것이다. 물론 개인으로서는 자신의 의견이 더 멀리까지 전달하고 싶어할 수 있다. 비평가에게 자신의 입지를 다지면서 영역을 확장하는 일은, 유명세의 크기가 곧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열기’에 대응한다는 점에서 자아실현과 깊게 관련되니 말이다. 하지만 한 열기가 모두의 꿈세계를 집어삼키는 일은 이곳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힘과 기회를 빼앗는 일이다. 어느 비평가의 영역이 커지면서 한 세계가 꿈에 잠식되어버린다면, 이런 꿈은 겉보기에 질서정연할 수는 있어도 그 안에서 무언가 진정으로 화합을 이룬다고는 볼 수 없을 테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여행할 마음을 접은 것이지 그 여행을 누군가 대신해주기만을 바라고만 있는 건 아니다. 이 꿈은 질서정연한 게 아니라 오히려 느슨하게 연결되어 사람들 사이의 염원이 돌아올 구석을 만들어두어야만 한다. 이른바, 우리가 현실에 깨어나야 하는 것은 이 꿈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염원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분명 우리에게 다음 여정으로 갈 수 있을 여유를 제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영 그곳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 영화는 모두에게 꿈을 균등하게 분배하지만 반대로 한 개인의 일상을 그곳에만 붙잡아두지는 않으므로, 영화를 평하는 일도 우리를 마냥 한 곳에만 붙들어놓을 수는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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