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가 되려는 이는 대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향이 있다. 현역에서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는 이들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일은 꽤 흔하다. 어느 분야나 공부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잠시 생업을 멈추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굳이 논의할 만한 일인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영화평론가는 직업이 아니어서다. 그냥 영화를 공부하는 일에 관심이 있고, 학업을 하는 과정에서 부연으로 영화평론을 하게 되는 일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영화평론 자체에 관심이 있는데, 이걸 더 잘하고 싶어서 학업을 하는 일은 꽤 특이한 경우다. 영화평론은 직업이 아니라 작업이므로, 영화평론만을 위해서만 대학원에 진학하는 일은 순수해 보이기 때문이다. 전업 예술인이어서 고결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우리가 한 미래를 가꾸어가는 과정은 자기 기술과도 같아서, 영화평론이라는 건 영화로서의 자기 기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영화이론은 자신이 영화를 보며 생각한 것을 표현하기 전에, 영화에서 자기를 발견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영화 매체에 대해 잘 알고 싶을 뿐이라면 영화 이론을 공부하는 일은 학계에 진출해 공부를 이어가는 쪽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세상에 자신이 포함될 수 없다고 생각되면 그때부터 삶은 지옥이 된다.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영화 안에 살고 싶지만, 현실을 버릴 수 없으니 차라리 영화 안에서도 자신이 살아가고 있음을 밝히고자 함이다.
영화를 두고서 삶을 생각하는 건, 영화가 끝을 가리켜서가 아닐까 한다. 독서를 할 때는 이 이야기가 언제 끝날지를 알 수 없고, 그림은 결국 한 대상을 바라보기 위해 가공의 프레임을 상정하게 된다. 여기서 이야기는 예측할 수 없거나 혹은 실시간으로 외부를 수혈받는다. 프레이밍은 한 세계를 가두기보다는 만화에서 말하는 강조선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들은 “여기를 보세요.”라고 친절하게 말한다. 그러나 영화는 무엇보다 시간의 발명과 밀접하게 관련되었고 이는 곧 영화가 ‘시작’과 ‘끝’을 함께 갖는다는 점을 의미했다. 영화는 결국 무언가를 보는 일만큼이나, 그걸 하고 난 이후를 고려해야만 하는 매체였다. 즉 영화엔 항상 ‘간극’이 있다. 영화를 본다는 건 우리가 보는 것과 꿈꾸는 게 얼마나 다른 일인지를 생각하는 일과도 같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이 좋다고 해서 그걸 직업으로 삼기 어렵듯이 영화는 한 사람의 삶보다 항상 먼저 끝나버린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건 우리가 아는 현실과 바라는 삶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되새기는 일이다. 그래서 이따금 영화에 관해 글을 쓰는 건 굉장히 무기력하게만 느껴진다. 이런 글을 쓸 시간에 차라리 영화를 찍거나, 아니면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무엇보다, 삶을 영유하며 일상을 이어가려면 영화에만 머물러있을 수가 없는 현실이 그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하면서는 무기력함을 자주 느꼈다. 일반화할 수 없는 감정이지만, 학계에 있다 보면 다른 친구들이 사회생활을 하는 일에 자신을 견주는 때가 잦다. 남들이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갈 때, 자신은 행복했던 한때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룩백>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영화가 비평적으로 언급될 만한 점은 재난 사회에 대한 시대감각이 한국에도 여전히 유효한 해석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미래가 없다고 느낄 때 과거로 도피하곤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현재는 더는 나아갈 구석이 없다는 점에서 실질상의 한계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잦다. <룩백>에는 그게 재능에 대한 문제와 죽음에 대한 성찰로 묘사된다. 후지노는 쿄모토의 배경 작화 실력을 시기하고 쿄모토는 후지노의 이야기 능력을 동경한다. 후지노는 쿄모토를 보고 자신의 실력에 한계를 느껴 절필하지만, 반대로 쿄모토에 의해 펜을 들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재능의 한계에 대한 직시는 이후 쿄모토의 사망을 겪고 난 후, 후지노가 잠시 만화를 쉬어가는 과정에서 다른 형태로 복귀한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이미 끝나버린 영화가 더 진행될 수는 없다는 것. 후지노는 자신의 창작이 세계를 구할 수 없음에 탄복했다. 이미 구할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 더는 세계를 태어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꿈을 향해가는 과정은 이 순간이 영원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다. 그게 현실에서 발돋움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중력에 의해 바닥에 끌어내려질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 말은 결국 예술 분야에 대한 일반론이기도 하다. 모든 예술인에게는 자신이 겪는 현실과 이상 간의 괴리가 존재한다. 자신이 하는 일은 결국 고고학자 비스름한, 과거를 추모할 뿐인 일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예술이 비단 순수한 창작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외부를 반영하기보다 자신에게로 돌아가기를 명령하는 쪽에 가깝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일이 세상이 돌아가는 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영화에 대해 쓰는 일은 영화가 현실이 아니라는 점으로 인해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영화 비평을 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창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추억하기만 할 뿐이다. 이 둘은 분명 동시에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순되진 않는다. 배중률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간극의 문제다. 영화를 보는 일이 불이 꺼진 극장에서 혼자이면서 공동체로 존재하는 ‘간극’을 즐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간에 [세계]란 지켜지는 게 아닐까. 장-뤽 낭시는 간극을 두고서 우리가 왜 고독하면서도 동시에 서로와 연결되어있는지를 말했다. 마치 영화가 간극으로 작업하듯, 무언가를 창작할 수 없다는 마음이야말로 삶을 태어나게 한다.
앞서 있으면서 동시에 과거가 되어버린 자신은, 영화비평이 갖는 주변부, 간극, 거리두기 등의 문제의식을 형성한다. 무언가를 보기 위해 거리를 벌려놔야 하는 것처럼, 영화는 우리에게 ‘이후’를 생각하게 하고 또 염두하게 한다. <룩백>은 그런 점에서 뒷모습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후지노는 쿄모토의 죽음 이후 연재하던 만화를 잠시 멈추고 과거를 돌아보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쿄모토의 방에 들어선 후지노는 초등학교 때 자신이 등에 해두었던 사인과 만화 단행본 등을 발견한다. 후지노는 자신이 하는 일은 무언가를 새로 만드는 것이기 전에, 한때 자기였던 것으로 돌아가는 일임을 깨닫는다. 그녀의 창작에는 세상을 바꿀 만한 힘은 없더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힘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커튼 월 너머로 보이는 세상처럼, 이제 뒷모습은 과거에 갇힌 것만이 아니라 바깥을 기약하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을 한 언어로 표현하고자 영화이론을 공부하는 일은 그런 뜻에서 한 세계를 감각하는 일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영화를 보며 무언가를 느꼈다는 건, 자신이 그곳에 속할 수 없다는 슬픔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반대로 자신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앞으로 나아가며 무언가를 창작하고 있었고, 하지만 좋았던 시절은 이내 끝나고야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화의 뒷모습을 마주하며 무엇을 해야 할까?
예전에나 지금에나 영화에 대해 묻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영화평론가를 지망하거나, 그게 아니라도 관련된 글을 쓰는 이들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사람들은 왜 영화이론을 공부할까? 국내에 작고 크게 운영되는 영화 관련 공모전을 보면 많은 경우 당선자의 이력에서 영화 관련 학위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간과할 만한 일은 아닌데, 왜냐하면 영화평론가가 되려면 꼭 대학원에 진학해야만 한다는 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평소 영화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지만, 상을 받은 사람들의 이력에서 대학원 등의 학위가 관측될수록 이런 인과관계가 뒤집힌 채로 오인될 수도 있다고 보는 일은 합리적이다. 마치 대학원에 가서 영화평론가가 될 수 있었다는 쪽으로 말이다. 하지만 영화비평이 대학원 학위를 통해서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점은 우리 자신이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오히려 대학원에 가서 영화이론을 공부하는 일은 외국어를 공부하는 일과 같다. 가령 우리는 무언가에 끌릴 때 그게 왜 그런지를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말로 꺼낼 만큼 구체화되지 않아서 그런 건데, 이 경우 ‘언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감정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려면 이를 적시하는 방안이 필요하니 말이다.
살다보면 우리가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얼마나 고독해질 수 있는지를 느끼곤 한다. 인간이 독립된 개체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은 아주 솔직한 자기진술이다. 흥미롭게도 이는 영화가 삶을 어루만지는 한 가지 방식이기도 하다. 좋아한다고만 해서 잘하는 일일 수는 없다는 것, 대학원에 진학하는 일은 전자가 후자를 따라잡으려는 시도의 일환인데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을 억지로 맞춰보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 두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비평가가 되고 싶을 뿐이라면 대학원에 진학해 학위를 받지 않아도 된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일이 현실과는 거리가 있고, 또 아무런 것도 긍정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도리어 그와 같은 거리감이야말로 우리를 느슨하게 잇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우리가 서로에 느끼는 마음의 벽이 단순한 간극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데 필요한 거리일 뿐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돌아올 곳이 바로 여기라며 잠시나마 하나의 삶을 끌어낸다. 이런 관점에서 대학원 진학을 “영화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서”라고 축약하기엔 너무 아쉽다. 이따금 공백은 더 많은 것을 내포하니 말이다. 고립계의 삶을 구원하고 이를 타인과의 연대로 잇는 일은 영화 이론이 갖는 언어와 발명의 필요성이다. 언제나 돌아올 수 있을 집이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줄 가능성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