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애니메이션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나이나 성별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유아용' 혹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떠올릴 것이다. 전자도 맞고 후자도 맞다. 중요한 건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부정적인 맥락에서 볼 때, 유아용이라는 단어엔 '나잇값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어엔 '오타쿠'라는 뜻이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필자는 나잇값을 못하는 오타쿠다.
하지만 필자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잇값을 못해서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감독의 의도가 완벽하게 구현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실사 영화 한 편을 만들기 위해 카메라의 앵글, 조명의 세기, 후시녹음과 동시녹음을 택해야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영화는 감독의 의도를 구현하기 위해 치밀한 계산을 거치지만, 애니메이션은 콘티를 짜서 바로 그리기만 하면 된다. 단적인 예로, 후시 녹음과 동시 녹음을 들 수 있다. 여기서 후시는 촬영과 녹음이 따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동시 녹음은 말 그대로다. 대부분의 영화가 후시 녹음을 택하는 건 동시 녹음을 할 때 상황이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멀어지는 소리, 행인들의 발걸음 소리, 바람 소리 등. 자크 티티가 <플레이 타임>에서 했던 것처럼 도시 하나를 통째로 세우지 않는 이상 완벽한 동시 녹음이란 불가능하다. 설령 도시 하나를 세워 자동차와 행인의 발걸음까지 모두 계산해서 소리를 만든다고 해도, 바람이나 구름 같은 자연적인 요소는 통제할 수 없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은 그게 된다. 어차피 허구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이유는 필자가 오타쿠이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종류, 모든 국가의 애니메이션을 공평하게 사랑하지만 일본의 셀 애니메이션 시장이 전 세계의 70~80퍼센트를 차지하는 탓이다. 그 수많은 작품 중에서 상업성이 아닌 작품성을 찾긴 어렵고, 작품성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찾는 건 더욱 어렵다. 물론 TV 애니메이션도 작품성이 있는 작품이 많다. 다만 TV라는 매체의 특성상 영화와는 분리해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애니메이션' 영화
어쩌다가 작품성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나오면, 사람들은 그 작품이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영화임에 비중을 둔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이기 이전에 애니메이션이다. 사람들은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인간의 상상력을 스크린 위로 펼쳐낸다는 공통점으로 묶어 생각하고 만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 애니메이션은 인간의 상상력이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매체다. 영화는 상상력이라기보단 현실을 변형하는 것에 가깝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이 대표적인 예다. 현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현실적이지 않은 게 영화인 셈이다.
그래서 서로가 되고자 하는 애니메이션과 영화는 항상 특별하게 여겨진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때문이기도 하고, 쉽게 보기 힘든 (잘 만들기 힘든) 풍경이기 때문이다. 영화 중에선 <반지의 제왕> 삼 부작, 애니메이션 중에선 <퍼펙트 블루>를 들 수 있겠다. 판타지 장르가 유독 애니메이션에서 많은 건 '현실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인데, <반지의 제왕>은 그것을 훌륭하게 해냈다. 애니메이션은 모든 것이 완벽한 창작이기에 괴리감을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지만, 실사 영화는 현실에 있을 법한 것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3차원에서 태어났고, 우리의 뇌는 그렇게 작동하므로 그렇다.
아마 당신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전통적인 SF영화나 근래에 유행한 히어로 영화는 무엇이느냐고. 당연하게도, SF영화나 히어로 영화는 '판타지'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판타지는 작은 의미로, 완벽한 허구의 세계를 뜻한다. <스타워즈>의 제국이나 혁명군, 우주선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배경은 우주이기만 할 뿐 우리와 생활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 <스파이더 맨>은 아예 뉴욕 한복판에서 날아다닌다. <트와일라잇>은 도시를 배경으로 이루어지며, <해리포터> 시리즈도 어쨌거나 도시에서 출발하기는 한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허구'다. 그 세계부터 세계에 통용되는 물리법칙, 그 세계의 주민, 그 세계의 자연환경까지 모두.
<퍼펙트 블루>는 영화로 기획되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기획 당시의 콘티가 하나도 변하지 않아 영화 같은 애니메이션이 됐다. 이런 종류의 애니메이션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준다. 영화와 연출이 완벽하게 같지만, 단지 3D에서 2D로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느낌이 다르다. 더 나아가, 3D에서 2D로 전환되는 과정에서의 잉여 에너지가 영화 전체에 휩싸인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일이다. 단적인 예로 일본은 만화 강국인 만큼 만화 원작의 영화가 많은데, 완성된 영화에서 우린 미칠 듯한 괴리감을 느낀다. 이상한 게 당연하지만 당연하기에 왜 이상한지 알 수 없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의 상상력이 영화의 구현력보다 우월하기 때문일 테다. 위의 말을 뒤집어 말하자면, "영화 전체에 에너지가 부족하다." <반지의 제왕>에서 알 수 있듯, 2D가 3D가 되기 위해선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퍼펙트 블루>의 연출, 거울에 비친 주인공의 모습이 실제와 다르게 표현되는 것은 CG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만약 실사영화에서 그런 묘사가 나왔다면 우리는 진작에 그것이 '거짓'이라 인식하고 만다. <퍼펙트 블루>가 애니메이션이기에 거울상의 왜곡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퍼펙트 블루>의 감독 '곤 사토시'는 그런 면에서 탁월하다. 그의 영화는 꿈과 현실을 자연스레 오고 가는데, 실사 영화였다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장면이 많다. 이를테면 <파프리카>의 오프닝에서, 평행선을 달리는 시점에서 2D로 표현되던 주인공이 그 다음의 비스듬한 앵글에선 3D로 표현 된다던가 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XY축과 영화의 Z축을 교묘히 섞은 연출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TV' 애니메이션
영화와 TV는 매체의 특성이 다르다. 영화는 가만히 앉아 2시간여를 내리 봐야 하지만, TV는 영화보다 많은 분량을 나누어서 보여준다. 영화가 TV에 가며 드라마가 됐고, 애니메이션은 TV에 가며 TV 애니메이션이 됐다. TV 애니메이션은 1편에 20 여분 정도로, 방영 중간에 광고가 들어가 필연적으로 흐름이 끊긴다. 드라마와는 달리, 12편 정도를 모아 1기를 구성하고 작품의 흥행에 따라 2기와 3기 같은 속편이 제작된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전체적인 분량이 많다'와 '그 분량이 차근차근 끊어져 방영된다'는 점이다.
<반지의 제왕>은 톨킨의 원작에서 한 페이지에 불과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나마도 대다수를 잘라내어 겨우 3부작을 완성했다. 거기에 극장 상영으로 칼질을 당해 2시간이 또 줄었다. 팬들이 <반지의 제왕>에서 아쉬워하는 게 그 부분이다. 거대한 세계관에서 어쩔 수 없이 생략해야 했던 부분, 다 하지 못한 이야기에 대한 설움. 만약 <반지의 제왕>이 TV 시리즈 였다면 영화보단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자꾸만 끊어지는 이야기에 불만을 품을지도 모른다. TV는 그러한 것, 시청자의 아쉬움을 통해 시청률을 차근차근 높여 나간다.
하지만 요즘의 TV 애니메이션은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는다. 잘 나가서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동영상 서비스의 보급으로 TV 방송을 제때 챙겨보지 않아도 되고, TV엔 없고 인터넷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더 재밌다. 이를테면 인터넷 방송이나 유튜브 같은 것들이다. TV의 등장으로 영화가 위협받았던 것처럼, 동영상 서비스의 보급은 TV를 위협한다. 드라마는 그런 동영상 서비스 대열에 합류해 웹 드라마의 형태로 활로를 찾았지만, TV 애니메이션은 DVD나 파생 상품(굿즈)에 의존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확실한 '마니아' 층에게 어필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
그것이 요즘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작품성이라곤 참새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게 된 이유다. 그 마니아층이란 '오타쿠'이기 때문이다. 오타쿠 대다수를 차지하는 10대 20대 '남자'의 취향에 맞추어진 작품들은, 오로지 '굿즈'를 팔아먹기 위해 '화려하고 예쁜' 캐릭터를 뽑아내기 바쁘다. 책을 읽지 않으니 하락한 독해력에 맞추어 이야기가 단순해지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니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작품의 품질은 떨어지고 만다. 시장 상황이 영 좋지 않으니, 고정 팬층이 생겨 흥행이 보장된 캐릭터를 이용해 억지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러브 라이브>라던가 <소드 아트 온라인>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니까, 결국 소비층이 탄탄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 그것을 증명하듯, '잃어버린 10년' 전에 나온 애니메이션은 내외적으로 우수하다. 79년에 시작된 <건담> 시리즈는 '이유 있는 악행'을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작품이다. 우리로선 그들이, 그들로선 우리가 '악'일수 밖에 없음을 상기시킨다. 90년대의 <에반게리온>과 <공각기동대>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물음을 인간과 기계로 치환한 작품이다. 우리 밖에 존재하며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도구'에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내면에 존재하는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밖으로 끄집어낸다. 88년의 <아키라>는 3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된 네오 도쿄를 다시 한번 무너뜨리며 재건된 사회의 '재건'을 꿈꾼다.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며 이번만큼은 성공할 것이라며 '영원회귀'를 꿈꾼다.
구관이 명관, 명관은 구관
그것이 우리가 '고전'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추억에 젖어 과거를 부르짖는 것과는 다르다. 요즘의 애니메이션이 12 ~ 16프레임으로 만들어지는 것에 반해, 예전에는 24프레임으로 나오는 게 대다수였다. 제작진 스스로 작품을 사랑했고, 그만큼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해 부드러운 프레임을 뽑아냈다. 지금의 우리가 유튜브의 5초짜리 광고에 싫증 내는 것처럼, 과거의 시청자도 툭툭 끊기는 프레임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눈이 나빠도 프레임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프레임은 몰입의 정도이자 증표였다.
지금의 일본엔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애니메이션이 없다. 포켓몬, 짱구, 코난, 도라에몽, 원피스, 나루토, 모두 오래전에 등장해 지금껏 인기를 끈 작품이다. 이것 자체가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이 더는 신선하지 않다는 증거다. 경제가 불황이니 새로운 시도가 나오지 않는다. <포켓몬>시리즈는 작년에 20주년을 맞아 늙지도 않는 지우를 다시금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코난>은 수십 년 째 추리 게임만 진행 중이며, <원피스>는 자기들이 찾는 게 뭔지 모르는 것 같다. <드래곤 볼>과 <나루토>는 죽은 사람을 자꾸 살려내더니 이제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말하자면 '억지 세습', 여러모로 북한을 떠오르게 한다.
그나마 <원펀치 맨>과 <진격의 거인>정도를 흥행작이라 부를 수 있다. <원펀치 맨>은 앞길이 막막한 젊은이들의 일탈욕이며, <진격의 거인>은 그들 사회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젊은이들의 변태(變態)욕이다. <원펀치 맨>의 주인공 '사이타마'는 별다른 노력 없이 강한 힘을 얻고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사바나의 수사자처럼 아무런 라이벌이 없으니 태평하게 늘어질 수 있다. 당신도 골방에 들어앉아 빌 게이츠의 통장을 꿈꾸며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을 것이다. 오죽하면 욜로(YOLO)족이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다. <진격의 거인>의 주인공 '에렌 예거'는 거인의 힘을 가족에게 물려받았고, 그건 곧 자기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를 죽였다고 해서 세상의 거인을 모두 제거하겠다는 말은 세상을 등지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그 만화에서 거인은 '저항할 수 없고', '세계를 이루는 근본'이다. 그러니까 '에렌 예거'는 그를 둘러싼 사회, 성벽을 깨부수고 더 나아가 세상을 개혁하겠다는 의지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처럼 물려받은 힘이 없다. 결국 남 이야기다.
꿈은 어디에, 꿈은 현실에
<시로바코>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업계를 묘사한 작품으로, 2015년에 큰 인기를 끌었었다. 일하기도 싫은 데 만화 속에서마저 일하는 걸 보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시로바코>는 자신을 묘사해내는 메타픽션이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에게는 '나 자신을 만드는 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작품에서 '업무'가 아니라 '탄생'을 본다. 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본다. (예쁜 주인공은 덤이다.) 우리는 주인공에게 자신을 투영해, 웃고 울음을 같이 한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 흥행했던 <미생>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두 작품은 <반지의 제왕>보다 더한 판타지다. <매트릭스>보다 더한 허구의 세계다. 분명 작품 속의 그들도 힘들게 살아가나 내가 겪는 현실의 고통보단 덜하다고 느낀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즐기기 때문이며, 작품 스스로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검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슬픈 일 중 하나, 기쁜 일 중 하나. 하지만 삶은 그 작품들처럼 1기와 2기,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해, '대본'은 없다.
우리가 '꼰대'라는 말을 불편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꼰대'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우리는 꿈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꿈'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 꿈은 미래로 가는 게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기 위함이다. 현실은 고달프고 만화는 상상력으로 보답한다. 하지만 그 꿈에 파묻혀 버린다면, 우리는 전기장판 위에 이불을 덮은 것처럼 밖으로 뛰쳐나갈 수 없다.
과거의 애니메이션은 행복한 미래를 꿈꾸곤 했다. 무한한 상상력은 어린 시절 읽던 동화를 어른의 눈으로 보게 해주었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는 해저 2만 리를 향해 떠나는 모험담이며 <미래소년 코난>은 발전하는 기술에 대한 경각심을 품었다. <철완 아톰>은 우주 시대를 꿈꾸며 하늘로 날고, <카우보이 비밥>은 안주하는 것들에 대한 재즈, 연탄곡이다. <데스 노트><강철의 연금술사><은하철도 999>은 인간을 만들고 판단하고 변형하는 것들에 대한 기준을 내보인다. <빨간 머리 앤><파트라슈><엄마 찾아 삼만 리>는 가족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만드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단언컨대 확고한 기준을 제시하는 건 '스튜디오 지브리'뿐이다.
언젠가 돌아올 날을 위해
TV 애니메이션이 죽은 뒤, 애니메이션 영화도 죽어버렸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선언은 그것을 가속한다. (2020년에 개봉예정인 작품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 TV 애니메이션이 확실한 마니아층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애니메이션 영화는 가족에게 열려 있어야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가족'이 보아도 된다는 것이 꼭 '아이들'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가족 영화는 가족 구성원 중, 누가 보아도 개인에게 와 닿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거대한 코끼리를 만지고 각자 묘사한 모습이 달랐던 장님들처럼 말이다.
만약 내 딸이 <월령 공주>에서 늑대를 타고 달리는 강인함을 부러워한다면, 그녀가 자연의 수호자임을 넌지시 말해주어야 한다. 만약 내 아들이 <천공의 성 라퓨타>의 악당을 보며 나쁜 놈이라 욕한다면, 자연과 함께 살면서도 기술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가르쳐야 한다. 만약 내가 <벼랑 위의 포뇨>를 보며 그들이 굳이 해안가 절벽에 사는 이유를 묻는다면, 당신은 나에게 자연 앞에 사는 게 인간임을 상기시켜주어야 한다.
앞에서 했던 단어를 정정해야 할 듯싶다. 가족보단 사회라는 표현이 낫다. 분명 <공각기동대>나 <파프리카>는 가족을 위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아니다. <너의 이름은>과 <목소리의 형태>는 10대 20대가 좋아할 만한 소재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은 호소다 마모루의 가슴 따듯한 가족 이야기와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 영화들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그 작품들은 하나의 꿈을 꾸어 관객에게, 이 사회에 전달한다. 그 메시지에 감명받는 어느 누군가가 있다면 그 작품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다. 설령 <러브 라이브>처럼 별다른 의미가 없는 작품이라도 그렇다. 설령 그것이 헛된 희망일지라도 병은 치료되기 마련이니까. 플라시보.
분명 일본은 어디를 둘러봐도 애니메이션으로 넘쳐나는 '애니메이션 강국'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수요층인 10대 20대조차 애니메이션을 외면하고 만다. 애니메이션의 본국, 일본의 사정이 그러한데 다른 나라는 어떻겠는가. 꿈꾸지 않는 우리가 있는데, 어떻게 애니메이션이 꿈꿀 수 있을까. 21세기의 코앞에서 미래를 걱정했으니, 22세기의 코앞이 다가와야 다시금 꿈을 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