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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07. 2024

<룩백>과 플롯아머



<룩백>의 명제는 간단하다. 만화 속 세상에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후지노와 쿄모토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이었다는 점이다. 쿄모토가 후지노에게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하자, 후지노는 그녀에 화를 낸다. 이 장면은 나무를 가운데 두는 식으로 두 사람의 갈등을 표현하고 있어서 오히려 영화쪽이 만화의 컷 분할을 흉내 낸다는 인상을 준다. <룩백>에서 중점으로 다뤄야 할 건 이 장면이다. 원작 만화에서는 도리어 영화처럼 분할되었던 숏이 도리어 영화에서는 만화처럼 연출되기 때문이다. 영화로서 호평받았던 만화는 이제 만화 같은 연출을 한 영화가 됐다. 원작 만화에서는 시선의 방향에 컷과 컷 사이의 공백이 자리하지만 영화는 이를 한 컷에 담는다. 특히 만화에서는 시선의 방향을 따라 페이지를 다음으로 넘기는 게 가능하지만, 영화는 그저 스크린의 바깥을 가리킬 뿐이다. 이 경우 기회가 있는 쪽은 만화인 것으로 보여서 영화가 더 끝을 향해간다는 인상을 준다. 바꾸어 말하자면, 영화가 만화의 방법론을 가져온 건 영화야말로 끝을 마주해야 하는 매체여서다. 모든 영화는 행복했던 한때를 보내고 난 후에 세상 안으로 사라지고야 만다. 이 사실이 두 사람의 모습에 적용될 때 후지노의 마음은 쿄모토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인상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관계를 이어나갔던 건 두 사람의 선택이었다. 의지가 개입한 일이었고 그래서 더 각별했었다. 후지노는 자신의 삶이 쿄모토로 이어졌다고 생각했고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자신이 이어가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쿄모토가 테러로 죽고 나면 후지노는 이제 그런 작용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쿄모토의 죽음 이후, 창작행위는 그저 우연만이 지배할 뿐인 세상에서 헛것을 취하려는 일처럼 느껴진다. 만화는 본디 우연이 개입하지 않는 매체인데 어찌 우연을 말할 수 있을까. 후지노는 쿄모토의 죽음 이후 연재를 중단한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이유를 찾으려 노력한다. 후지노가 B 전개에서 마주한 것은 두 사람이 서로 만나지 않았더라도 결국 삶은 이어졌으리라는 점이다. B 전개에서도 후지노는 만화를 다시 그리기로 했고, 쿄모토도 대학에 진학해 미술을 공부했다. 후지노는 무언가를 창작하는 일이 우연에 상반된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꿈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고 이는 한 세계가 우연에 사로잡힌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영화가 우연을 말하지만, 창작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끝을 마주하는 일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룩백>은 영화의 관점에서 만화를 말했을 것이다. 


앞서 말해두었듯, 만화는 우연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와 상반된 위치에 있다. 만화를 흉내 낸 영화 <룩백>은 영화가 남긴 공백처럼 한 세계를 우연으로 덮고 싶어한다. 영화는 정해진 시간이 다 되고 나면 언젠가 끝나게 되어있으며 그런 점에서 필연이다. 하지만 그럴 뿐이라면 쿄모토의 죽음도 이야기의 전개라든가 세계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든가 하는 식으로밖엔 말해지지 않는다. 극의 진행을 위해 캐릭터가 소비된다는 것, 이런 플롯이 정당한 처사인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영화의 관점에서 쿄모토의 죽음은 누구나 결말을 마주하게 된다는 점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배트맨에게 부모님의 죽음이나 스파이더맨에게 삼촌이나 숙모가 죽는 것과 같은 부류의 ‘사건’ 말이다. 이 경우, 쿄모토는 전적으로 후지노의 성장을 위해 소모되면서, 동시에 세계의 준거점이 되어 후지노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후지노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쿄모토라는 이름의 플롯아머인 셈이다. 흥미롭게도 영화가 만화의 방법론을 도입함으로써 얻은 것도 플롯아머다. 영화는 언젠가 끝이 난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도리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이미 죽음을 획득한 이에게 결말은 피해 갈 수 없는 무언가고, 이는 곧 우리가 그런 결말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플롯아머는 편리한 전개를 위한 소모품쯤으로 취급되지만, 그와 같은 필중을 통해서라도 이으려 하는 게 무엇인지 만큼은 주지할 필요가 있다. 플롯에 의해 보호받는다는 건 바꾸어 말해 플롯의 ‘바깥’이 명실상부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화와는 달리 영화만이 해낼 수 있는 이 ‘바깥’은 만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세계를 묘사하는 것과는 달리 한 세계를 ‘등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제목인 <룩백>처럼 만화와 영화는 이를 표현하는 일에서 약간의 차이를 둔다. 가령 영화 후반에 후지노가 쿄모토와의 일상을 추억하는 장면은 뒤를 돌아볼 때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A 전개는 이야기가 선형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이들이 앞서 가는 일을 보여주지만, 반대로 후지노가 과거를 돌아보는 B 전개에서는 영화가 담지 못한 ‘바깥’을 만화의 판본으로 보여줌으로써 부감이나 사이드 숏 같은 다양한 사례가 등장하게 된다. 이는 만화가 영화를 모방할 때가 아니라 영화가 만화를 모방할 때, 둘 사이엔 인연이 생겨난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언가 이어져야만 한다면, 플롯 아머는 한 결말로 귀결되려는 움직임에 대한 보호본능이 아니라 결말을 응대하는 한 개인의 사무적인 방식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이 서로 다투는 장면에서 후지노의 태도는 그리 성숙하진 않다. 다만 이후 뉴스를 보고 연락처를 뒤질 때 쿄모토의 연락처를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점이 밝혀진다. 후지노는 쿄모토를 깔보거나 미워하지 않았고, 마음을 전하는 법이 서툴렀다고 보는 편이 더 옳다. 아마 후지노는 쿄모토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화는 이 간극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지만 여러 컷이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하는 만화의 특성상 두 사람이 동시대를 살아갈 뿐, 여기에 간극이 있다고 보는 일은 합리적인 해석이다. <룩백>의 흥미로운 점은 그와 같은 배치의 형태를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바깥의 사건과 연결한다는 점에 있다. 이른바 시대의식이라 부르는 이 감각은 과거 우리가 지식인들의 사회참여를 요구했던 분위기와도 일치한다. 가만히 자리에만 앉아있으면 그게 진정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은 맞는 것인지라는 의문. 후지노는 쿄모토의 죽음 이후 세계가 우연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무언가에 의해 촉발되기만 할 뿐이고 한 세계를 닫을 수는 없는, 영원한 사실의 구덩이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우연이 지배하지 않는 만화 속 세상에 더는 몸담을 수 없었고 어쩌면 ‘바깥’은 부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영화는 ‘바깥’이 원플롯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를 하나의 ‘플롯’으로 사유하게 한다. 그야말로 플롯아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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