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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05. 2024

영화는 이미 한 세계가 끝을 결정했다고 말한다

<룩백>(2024)


후지노에 의해 구해진 쿄모토는 구급차에 실려있는 그녀에게 묻는다. “정말 신기한 우연이네요.” 이후 구급차의 문이 내려지려는 때에 후지노는 쿄모토를 바라보며 이렇게 답한다. “이번에 다시 만화를 그리려고요.” 만약의 전개를 보여주는 이 장면은 다음 두 가지 메시지를 전달한다. 첫 번째는 모든 일은 결국 우연에 불과하며,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후지노는 자신이 쿄모토를 그 방에서 꺼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리라고 믿으며 자책한다. 후지노가 쿄모토의 졸업장을 전달했던 그날, 공백으로 남겨진 네 컷에 이야기를 채워넣은 것도, 그게 문틈으로 들어갔던 것도 모두 우연이었다. 그래서 작품의 후반에 덧붙여진 전개도 그와 같은 만약에서 출발하며 이때 작품은 현재의 후지노가 찢은 네 컷 만화가 과거에 전달되는 방식을 택한다. 편지가 전달되었던 방식으로 다시금 이야기가 전달된다는 것, 하지만 제목인 <룩백>이 말 하듯이 이미 한번 걸어왔던 길을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뒤를 돌아보는 것만이 가능하기에 이야기도 과거로 가지 못한다. 후지노가 마주한 건 쿄모토의 공백이고 그녀가 채워야 하는 건 펼쳐야 할 앞날이다. 이후 B 전개에서 집으로 돌아간 쿄모토는 공란으로 남겨진 네 컷 만화에 답하고, 편지는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통해 현재로 돌아간다. 후지노는 문틈으로 새어나온 만화를 품에 안고 다시금 앞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만화라는 매체의 형식에 질문을 던져보자.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영화와 같은 실사와 대비되는 지점이 바로 우연이다. 영화에서는 우연이 개입할 수 있지만, 만화는 작가가 모든 순간을 창작하므로 우연이 개입할 수 없다. 즉 만화가 그려내는 게 우연이라면 만화가라는 직업은 무언가를 기다리기보다 어떠한 순간을 ‘결정’짓는 것이다. 하지만 삶에서 한순간이나 사건을 결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따금 한 죽음에서 의미를 찾아보려 노력하지만, 모든 일이 우연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어떤 죽음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결과로서 다가온다. 후지노가 방 안에 갇힌 쿄모토를 꺼내주었던 것도 어쩌면 상상의 세계를 종이에 끌어낸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만화가에겐 우연이 없다는 점에서, 그녀는 쿄모토를 방에서 끌어낸 것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건, 방 밖으로 나온 건 쿄모토의 선택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의 선택이 작용한 결과였고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협업했던 만화가 그랬다. 분명 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우연일지 몰라도, 두 우연이 마주하면 그건 필연이기 마련이다. 벌어질 일은 벌어지고야 말 것이라는 점, 혹은 다시 이어져야 할 것은 이어지게 된다는 것. B 전개는 펜을 내려놓았던 후지노가 만화를 다시 그리거나 두 사람이 재회하는 모습에서 그 사실을 잘 표현한다.


테러의 속성 중 하나는 우발성이다. 후지노는 티브이에서 흘러나온 대학교 테러 사건을 보며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후 화면이 전환되어 예감이 적중했음이 드러나고, 쿄모토의 영정사진이 비치고 나면 후지노가 상복을 입은 모습이 보인다. 후지노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쿄모토가 죽었다고 여기며, 그녀로 시작됐던 만화를 더는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만화는 무엇이든 가능했던 세계였지만, 그녀의 죽음은 우리가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을 뜻했다. 주인공은 죽었고, 이야기를 더 진행할 수 없다는 이 상황은 후지노가 과거에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숱하게 들어왔던 말들을 상기시킨다. “언제까지 만화를 그리고 있을 것이냐”는 물음은 만화를 무언가 현실로 도피하거나 혹은 정지시키는 매체로 바라보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지금의 후지노에게 필요한 건 오히려 만화를 그리는 일은 아닐까. 후지노는 죽었던 사람이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후지노는 사람이 죽는 일에 이유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이미 나아간 이야기에 무언가를 더 보탤 수도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쿄모토의 방문 앞에 주저앉은 후지노는 두 사람이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기보다 뒤로 돌아가는 일을 택한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고 싶은 후지노는 두 사람의 만남이 불운한 우연이 아니라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우연으로 이해되기를 바랐다. “나오지 마.”에서 찢긴 네 컷 만화는 한 사람의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가두고 있었다.


과거를 잊는 것보다 중요한 건, 과거를 안고 살아가는 법이다. 출판된 원작 만화는 시작과 끝에 Don’t와 in anger를 기입하면서 작품의 주제의식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관찰한다는 측면에서, 작품이 강조하는 등은 한 세계를 끝내기보다 그런 세계 안에 남겨진 독자의 입장을 강조하는 듯한 느낌이 있다. 가령 하스미 시게히코는 <존 포드론>에서 존 웨인의 뒷모습에 관해 다음처럼 언급한다. “즉 이 여러 개의 숏의 연쇄는 던져진 물체가 저 멀리 사라져가는 운동을 우리 관객에게 틀림없는 ‘던진다’.” 존 웨인의 등진 모습에 관한 서술이기도 한 이 말은 사물을 던지는 행위가 대상의 운동성이 아닌 남겨지는 쪽의 반향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니까 카메라가 무언가를 찍는다는 것은 한 세계를 포착하는 것만이 아니라 거대한 외부를 동반한다는 점을 뜻한다. 만화 또한 컷 안에 있는 것만이 작품의 전부는 아니며, 만화는 컷과 컷 사이의 간극으로 작업한다고 볼 수 있다. 컷 안이 상상의 영역이라면, 컷 밖은 상상할 수 없거나 상상하지 않은 영역이다. 이와 같은 틈새는 우리를 한 세계에 던지며, 한 세계를 등진다는 건 우리가 무언가를 저버렸다기보다 우리 자신이 해방되어야 할 과거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후회와 실패를 끌어안은 것은 도리어 안쪽, 영화나 만화 같은 내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은 작업실로 돌아와 원고작업을 하는 후지노의 모습을 보여준다. 쿄모토의 네 컷 만화가 붙어있는 커튼 월은 한편으로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 자체를 네 컷에 넣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만화의 바깥에서 만화를 바라보는 모습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그런 만화 밖에 있는 도시를 보여줌으로써 도리어 만화의 안쪽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점에서 추론한다면, 아마도 그녀는 계속해서 삶을 이어갈 것이다. 후지노가 초등학생 때 그러했듯, 이야기를 ‘졸업’하고 새 시대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아픈 몸을 부여잡더라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테다. 말하자면 창작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남겨진 것들에 관해서도 말한다. 영화를 마친 우리는 영화가 끝난 세상에 남겨진 게 아니라 그저 살아갈 뿐이다. 누군가에게 영화는 삶을 바꾸어놓을 만한 힘이 있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끝나는 것과 달리 삶은 끝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한다면, 테러를 겪은 세계는 생존자를 남기는 게 아니라 생존을 등지고 앞으로 나아간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만화를 그리게 된 배경에 관해 동일본 대지진을 언급하며, 한쪽에서는 세상이 뒤집어질 만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만 하는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며 수해복구 현장에 봉사를 갔던 일을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아무리 진흙을 퍼내도 진전이 없던 현장을 두고서 ‘창작이란 건 사실 아무런 것도 창조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재해에서 우리는 생존자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이 콤플렉스는 어쩌면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귀인한다. 마치 성인병처럼, 우리의 몸에 남아 평생을 함께해야 하는 이 아픔은 이 세계에 결코 있을 수 없는 변수가 아니다. 후지모토는 구명 활동에서 자신의 무기력감이 해소되기는커녕 증폭되었던 일을 언급하면서 무언가에 가로막히는 기분이 도리어 뒤를 돌아보게 했던 경험에 관해 말한다. 룩 백(Look back)은 눈에 비치는 세계를 모두 담을 수 없다는 사실과 그런 우연 밖으로 나서려는 활동에 대한 자기 진술이다. 후지노가 쿄모토의 만약을 가정한 다음에 펼쳐지는 순간들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운동성이 아니라 순간을 추모하는 것 또한 운동성의 일종임을 깨닫는다. 두 사람은 꿈을 향해 달렸지만 정작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만화는 우연을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화가 모든 일에는 원인이나 이유가 있다고 말할 때 영화는 이미 한 세계가 끝을 결정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룩백>은 창작에는 암울했던 시절만이 아니라 좋았던 기억도 있었다고 말한다. 한 기억이나 시대를 등진다는 건, 이를 버리거나 실패로 간주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무언가를 안을 수 있어서다. 한 영화를 끝내고 자리를 박차는 일은, 세계를 상상의 여지로 넘겨둔 채 우리의 삶을 기막힌 우연으로 돌려놓는 일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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