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보는 일은 항상 리스크를 짊어진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의 최종화가 다음 주 월요일에 나오지만 유통과정에서 책을 미리 빼돌려서 주말을 앞두고 유출된 결말만큼이나 말이다. “무개성인 소년이 우연한 기회로 개성을 얻어 자신이 바라던 우상을 거머쥔다”는 플롯의 이 만화는 수미상관으로 끝이 났다. 아니, 정확하게는 나이를 먹은 채로 끝났다. 무개성이었던 소년에서, 무개성이 된 어른으로. 한바탕의 결전을 치룬 후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원포올이 소멸한다. 이후 무개성이 된 미도리아를 따라 에필로그를 진행하던 작품은 시간을 따라 8년 뒤로 건너간다. 이 시점에서 미도리아는 자신이 졸업했던 고등학교의 선생이 되었고, 마지막에는 친구들이 자금을 기탁해 제작한 히어로 슈트가 완성됐다는 연락을 받는다. “무개성이 됐지만 아직 마음속에는 히어로 활동에 대한 잔불이 남아있다.”는 뉘앙스를 주는 이 결말은 그 표현방식이나 과정에서 생략된 게 있었고, 이에 팬들에겐 아쉬움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가령 바로 앞에서 히어로 활동을 하는 친구들과 그에 소속되지 못한 미도리아의 장면 대비는 더는 작품의 무대가 ‘소년’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도 그럴 게, 고등학교 1학년 시점에서 8년이 지났으면 이미 대학을 졸업해 취업했을 시점이다. 어른이 될수록 삶의 분기와 방향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작가는 말하려는 듯하다. 어른이 되면 어린 시절에 미도리아가 꿈꾸었던 것도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평생 좋아할 것만 같았던 열광의 대상도 결국 나이를 먹으면 한때의 꿈으로 치부되는 일도 현실에서는 꽤 흔하다. 특히 삶의 궤적이란, 처음에는 약간만 달랐던 것도 계속해서 이어가다 보면 결국에는 사다리꼴 도형처럼 한 화면을 이탈해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소년만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게 어른이 되어 소년 시절에 꿈꾸었던 것을 모두 부정해버리는 결말이었던 건, 꽤 치명적이다. 소년만화를 보는 이유는 자신이 소년이거나 또는 그런 시절을 잊고 싶지 않아서라는 점을 염두해야 한다. 삶 전체로 보면 이 이야기는 미도리아의 삶에서 이루었던 영광에 그칠 테고, 나이를 먹을수록 술자리에서 꺼낼 법한 일화 정도로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다시금 일상을 되찾았을 뿐인 이 결말은, 작품 전체의 기조가 능력주의 사회의 표본을 따라간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개성의 세기나 활용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고, 혹은 계급이 나뉘기도 하는 일은 2010년대 이후 매체에서 보기 흔한 설정이지만, 미도리야의 경우는 아무런 개성이 없었다는 점에서 ‘가진 게 없거나’, ‘무능력하다고 자책하는’ 사회초년생이 이입할 여지가 많았다. 예를 들어 개성사회의 특이점은 후대로 갈수록 점점 더 기본 능력치가 올라감에 따라, 한 개인의 일탈만으로도 사회와 국가, 혹은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으리라는 불안을 낳는다. 이는 현실에서 세대가 바뀌고 사회가 고도화할수록 사람들의 기본 능력치는 올라가서 간단한 일자리를 얻는 것조차 높은 스펙과 능력을 요구하게 된다는 걸 연상케 한다. 가진 건 없지만,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이룰 수 있다는 건 이미 부모 세대에서 끝나버린 꿈이었다. 현실의 시점으로 바라본 미도리야는 무기력하고 자조로 가득한 청년들의 한 면으로 이해됐다. 결말에서도 언급되듯, 사람들의 능력이 상향 평준화되면 소수의 능력자만 영웅으로만 활동하고 나머지 사람은 다른 생업에 종사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각자의 역할과 자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개인에 타고난 재능과 능력을 활용하는 것은 꽤 합당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능력의 상한선이 주어진다면 이는 평생 한계에만 머물러야 하고, 그 한계가 다시금 서로를 나누는 기준이 되고야 만다. 계급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결말에서 다시 무개성으로 돌아가 현실에 체념해버린 미도리야의 모습은 본래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계급론처럼 보인다. “개성이란 건 신체의 일부나 마찬가지여서, 본래라면 이를 마땅히 활용하는 방법이나 다루는 법 등을 따로 익힐 필요가 없다”는 작품의 전제도 떠올려보자. 이는 마치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어서, 무언가를 ‘날 때부터’ 지닌 이와 이를 새로 ‘배워야 하는’ 입장은 본질적으로 섞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작품은 실제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이런 연상은 비약일 수도 있지만, 미도리야가 다시 무개성인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른’은 비루하고 남루해질 수밖에 없다. 너덜너덜했던 소년의 신체가 널브러진 어른의 마음으로 바뀌기만 했을 뿐이다. 신체결손을 겪으면서도 마음이 꺾이지 않았던 작중 히어로와 신체는 보전했지만 마음을 상실해버린 미도리야, 둘 중 우리가 이입할 수 있는 쪽은 어디일까? 그저 어른이 되어 현실에 꺾여버렸을 뿐인 모습으로 결말을 마주하는 것은 이미 현실에서도 그들 스스로가 잘 아는 사실이었다. 이 결말은 누군가에게 “당신은 주어진 여건과 능력이 부족하니까 영웅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테다. 시가라키는 히어로 사회의 모순을 부쉈지만, 정작 미도리야는 개성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중요한 건 능력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라는 편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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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문구 하나가 있다. 씨네21의 전 편집장이었던 조선희가 이창동을 두고서 했던 말이다. “주민등록증을 지갑에 넣고 우리 곁에서, 삶에 섞여 살아갈 것만 같은 인물을 그린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 술회는 이창동의 영화가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설득력 있는 논조를 제시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를테면 「일상계 전사」라는 글에서의 언급을 보자. 일본의 넷상 블로거 키노는 “’미묘하고 섬세한 사정’을 제3자로서 읽어내는 일은, 영화적 기법에 대한 독해력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진술한다. 이와 같은 진술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사에서 ‘영화적’이라는 문구를 미완의 현실을 구현하는 일에 사용했던 것에 더불어서, ‘일상계’라는 단어에 ‘If’의 성질을 부여한다. 일상계라는 애니메이션 장르가 반복되는 시공간, 혹은 한정된 시간 안에 캐릭터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일에 중점을 둔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망한다는 말은, 바꾸어 생각할 때 관계로 엮인 것 이외의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게 된다. 그래서 일상계 애니메이션은 인물의 양친이나 다른 문제를 ‘인위로’ 생략해버리는 일이 잦고, 조금 더 만화적으로 가면 다치거나 죽는 등의 일도 무시되고는 한다. 일상계에서는 반복을 위해 차이가 무시되는 경향이 있고, 심지어 여기서는 죽음이나 상처 같은 무게조차 다시금 원반으로 복귀하게 된다. 즉, 일상계는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현실의 ‘바깥’을 다루는 쪽에 더 가깝다. 한 현실을 대체로 구상하지만, 그런 대체를 현실에 끌고 오려면 당장에 중력이 사라지고야 말 것이므로 이와 같은 구상은 어디까지나 삶의 징후로만 남아야만 한다.
‘일상계’는 삶의 징후를 보여주는 장르라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 삶에서 ‘일상’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엮인 관계 안에 있으므로 의식하기에 쉽지 않지만, 매체 속에서는 제3자의 시선으로 이들의 일상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일상계 작품을 따라가는 일은 우리가 바라고 마지 못해 있는 현실을 다루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바꾸어 보고 싶지만, 당장에 밟고 서 있는 곳이기에 그게 사라져버리면 ‘추락’할 뿐이라는 사실이 전제된 그런 암울함을 안고 있다. 이른바 일상계란 부재와 결여를 내포한다고도 볼 수 있고, 그런 점에서는 현실에서는 해낼 수 없는 ‘객관성’에 대한 반달행위처럼 보이는 면도 분명 있다. 자신의 세상에 남은 마지막 오점이 바로 자신이라면, 이와 같은 의식에서의 탈출은 자기살해가 아니라면 결국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뿐이다. 여기서 일상계의 문제가 개입한다. 일상계는 이야기에 이입하거나 관찰하는 대상이 부재하면서, 동시에 독자의 의식 또한 결여로 남는다는 특징이 있다. 일상계는 표면적으로 투명한 스크린룸 형태를 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바깥의 관찰자가 지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오직 작품뿐이다. 작품을 벗어나면 독자는 이와 같은 공간 안에서 있었던 일을 말끔히 잊어야만 한다. 역설적으로 일상계는 닫힌 공간이라는 점에서, 독자가 이입할 여지와 틈새가 없고 또한 바꾸어보려고 시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보기 좋은 조형에만 그친다. 즉 ‘일상’을 제3자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이런 일은 우리의 세계를 제3 세계에 빗댐으로써 스스로를 경계에 세우고 또는 타자화한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일상계는 우리에게 ‘if’를 보여주는 미래 거울로서 기능하게 된다.
아마 이창동의 영화가 영화답게 느껴지지 않던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창동의 영화에서 일상은 각자의 인물에 담긴 미묘하고 섬세한 사정을 묘사하지만, 이를 이해받거나 답변해야 한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화가 영화답게 보이지 않는 순간 ‘영화’라고 여겨지는 것은 그런 화면 ‘바깥’의 현실이다. 정말로 살아갈 것만 같은 인물의 모습이 보여주는 건 우리 현실에 그런 인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전제로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 일상에서 묘사되는 인물은, 없어야만 하는 것을 표면에 드러낸다는 점에서 영화와 같은 매체만이 할 수 있는 장점을 십분 활용하는 셈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나의 히어로>의 결말을 생각해보고 싶다. 오시이 마모루가 ‘영화적’인 것에 대한 묘사를 애니메이션에 도입했을 때, 그 기조는 사회적으로 실패했던 일본의 운동에 대한 의식과도 같았다. 즉, 애니메이션에서 ‘영화적’이라는 표현이 도입될 때 ‘일상’은 깨어나지 못한 채 죽어버린 몸과 의식, 그런 공상을 안고 살아가는 ‘예비’였다. 그리고 <나의 히어로>의 결말은 이를 개발하는 것조차 사회적 인프라에 접근하는 방식을 따라갈 뿐이라고 말한다. 이 전제는 능력주의를 따라 집안이나 신체 스펙처럼 바꿀 수 없는 ‘제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런 상황에서 “잠깐이나마 꿈을 이룰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냥 이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미도리야의 8년 뒤를 다룬 이 결말은 큰 틀에서 볼 때 과업을 마친 영웅이 일상으로 복귀하는 플롯처럼 보인다. 자신이 바라며 함께했던 것은 한여름밤의 꿈처럼 떠나버렸지만, 패배가 실패의 수행조건이 아니듯이 반대로 실패도 패배의 필요조건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