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의 몸을 책임지는 것이다. 나이를 먹는 건 몸에 대한 권한을 잃는 일이다. <인사이드 아웃2>에서는 라일리가 사춘기에 접어드는 일을 묘사하는데, 이 시기의 특징은 정신적 성장이 몸의 성장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점이다. 유년기의 신체 특징이 팔다리에 비해 큰 머리라면, 점점 더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에서 몸은 머리를 붙드는 형태가 된다. 그러니까 몸이 점점 사회에 뿌리를 내리며 마음을 붙드는 과정이 바로 어른이 되는 일이라 보아도 좋다. 점점 더 자신의 주관이 생기고, 취향이 생기고 나면 법적으로 ‘자기’를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된다. 계약이나 혼인 같은 법적 규율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해야 한다. 청소년은 부모나 다른 대리인이 신원보증인으로 나서지만, 성인의 몸은 온전한 자신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몸의 규율에 사로잡혀 어디에서도 정신을 도피시킬 수가 없다는 점을 뜻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점에서 정신을 감금하는 일이기도 한 것 같다. 처음에는 모두에 열려있던 사람도, 점점 더 마음의 벽을 세우면서 몸의 중심을 되찾으려 한다. 왜냐하면 걷는다는 것은 중심을 잃는 것과 수복하는 일련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수면이 일렁일 때 마음을 잃지 않는 법은 컵 안에 물을 담는 것뿐이다. 어른은 더는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 없다. 어른은 슬프거나 힘들 때 자신의 내면을 진솔하게 털어놓을 곳도 줄어든다. 혹은 외부에 섞여드는 과정에서 자신이 밟고서는 땅에 스며들지 않으려면, ‘자기’로 바로 서려면 세상을 밀어내야만 한다. 이처럼 내면을 지키기 위해 바깥을 설정하는 과정은 사춘기의 자아가 행동하는 주요 과제 중 하나이다.
이와는 반대로, 나이를 먹으면서는 점점 더 몸이 제 뜻대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어른이 되는 일이 아기가 첫 발걸음을 내딛는 일에 비견된다면, 나이를 먹어가며 다리에 힘을 잃는 일 또한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정신을 담기 위해 몸이 발전하는 과정은 몸이 늙어감에 따라 정신에 가해지는 부하를 버틸 수 없는 일이 된다. 점점 더 자기를 추구하는 과정은 이제 자기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이 된다. 이 점에서 사춘기는 몸과 마음에 대한 교차지점으로서 흥미로운 레퍼런스가 된다. 몸과 마음의 균형 잡기는 이 둘이 서로 불균등 분배를 이룬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몸과 마음 각각에 부여하는 의미관계를 씨줄과 날줄로 잇는다. 개인적으로 사춘기에 대한 묘사는 그 점에서 아이가 아니라 어른에도 어필할 수 있는 요인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요인을 점검해볼 수 있겠다. 우선 TVA나 극장용 애니메이션,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향유하는 연령이 과거보다는 상승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콘텐츠 또한 늙었고, 또 새로운 어린 연령대가 보기에도 쉬워야 하므로 양쪽 모두에 매력적이고 납득가능한 이야기를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의미의 이중논리가 전면에 내세워진다. 아이가 보면 이야기고, 어른이 보기엔 우화가 되는 몇몇 것들이 작품 안에 세워진다. 가령 <인사이드 아웃2>이 주로 내세우는 감정인 ‘불안’은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을 경계한다는 뜻에서 사실 보편적인 감정에 가깝다. 그렇다면 작품에서 갈라서는 건 라일리의 사춘기에 관한 묘사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보며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른들은 그와 같은 사춘기에서 몸과 마음의 불균형을 감지할 공산이 크다. 어른이 된 이후로는 몸의 무게를 따라 자연스레 정신이 바닥에 정렬하는 것, 우리는 이를 두고서 “철이 든다”고 일컫는다. 몸의 무게에 사로잡히는 느낌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일이나, 생각에 앞서 몸이 먼저 행동하는 영웅의 면모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매일 출퇴근길에 붐비는 인파로 인해 강제로 서 있게 되는 현실, 또는 파도치는 해변의 한가운데에서 바다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일이 그렇다. 몸의 변화가 마음을 견인한다면 반대로 마음을 다잡기 위해 발을 내디딜 수도 있는 것이다. 수영에서는 가라앉지 않으려면 다리를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 있다. 정신을 다잡기 위해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하는 일도 그렇다. 사춘기는 몸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시기라는 점에서 삶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모두에서 겪을 수 있는 감정을 전한다. 사춘기는 객관적 현실을 돌아보아야 할 시기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삶의 전환점이나 기로에 선 이들 모두에 영향을 준다. 영상 매체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사춘기라는 소재는 누구나 겪는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감정을 전하지만, 정작 매체를 향유하는 연령대가 높아짐에 따라 실제 사춘기를 겪는 당사자가 아니라 자신의 한 과거를 다시 들어올려야 하는 입장을 더 부각하게 된다. 여기서 감정은 몸에 휘둘리는 와중에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상위에 노출해야 하는 처지다. 낡은 감정이 판매되려면 줄곧 끌어올리기 버튼을 눌러야만 한다.
<인사이드 아웃2>에서 부각되는 건 불안이라는 감정에 대한 묘사보다, 왜 불안이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다. 라일리는 친한 친구 그룹에서 홀로 떨어져나와 고등학교에서 새 친구를 사귀어야 했다. 평소라면 라일리는 그냥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주면서 즐겁게 놀다 오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 거취에 신경 써야 할 일이 생기면 몸은 불안을 반영한다. 자신이 예측해왔던 미래 궤적이 흩어지고 나면 정신 또한 흐트러지고야 만다. 여기서 먼 미래를 걱정한다는 ‘불안’은 무너진 미래의 잔해를 헤쳐나가야만 한다. 폐허의 한복판에서, 제로그라운드가 암시하는 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를 예측을 전부 헐어버리고 아예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재시동의 움직임이다. 이런 뜻에서 ‘사춘기’는 재시동의 열망으로도 읽힌다. “데리다는 어떤 사건을 완벽히 재현하려 하고, 간극 없이 기억하려 하는, 총체성의 신화를 향한 아카이브의 열망을 ‘열병’에 가깝다고 말했다(안진국).” 사춘기를 두고서 열병에 빗댈 수 있다면 아마도 어른에 대한 갈망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사춘기는 우리가 간극 없이 매끄러운 신체 움직임을 선보이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어긋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한 실질상의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신체를 매끄럽게 움직인다는 이 총체성의 신화는 어른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에게서 자신이 바라는 완벽한 ‘어른’의 모습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부각한다. 어른은 실질상에서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훌쩍 커버린 몸은 나이와 연령, 지위에 걸맞은 사회역할을 요구하며 이때 우리의 당면과제는 바로 ‘어른’이다.
<귀멸의 칼날>은 오니에 맞서 싸우는 탄지로의 처지를 부각하면서, 동시에 오니의 개인사와 탄지로의 개인사를 분리해 보여준다. 작품에서는 서로의 사적 내면이 각자의 처지에서 정당화하지만, 이것이 공적 영역에 도착할 때 공사는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다. 탄지로는 오니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동시에 그를 처치하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특히 탄지로의 여정에서 강조되는 것은 올곧은 마음만큼이나 굳건한 신체이다. 탄지로는 무식할 정도로 강인한 신체 스펙의 소유자이지만, 신체의 움직임만큼이나 마음이 이를 잘 따라잡기에 행동과 판단에 어떠한 고민도 침투하지 않는다. 신체와 정신 사이에 틈이 생긴다면 내딛는 발걸음에 진동이 생길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자면,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은 이 둘 사이에 틈을 열어주는 것이다. 오니의 마음을 헤집는 건 칼날처럼 몸과 마음이 일체화된 탄지로만의 결단이다. 작품의 전반부에 렌고쿠를 살해하는 아카자는 자신은 약자가 싫다고 말하며 탄지로를 죽이러 든다. 여기서 렌고쿠는 “마음을 불태워라”는 점을 보여주면서 검을 휘두르는 일에는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탄지로와 대결하는 아카자는 자신이 검을 부러트리는 일이 마음이 꺾이기 전에, 스스로를 열병으로 태우기보다 젊고 팔팔할 때 무탈하고 평온하게 죽는 것이었음을 떠올린다. 이후 사후세계에 간 아카자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다고 스스로를 되뇌며 자신의 마음을 꺾지만, 지옥불이 태워야 할 것은 마음이 아니라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는 완전함의 신화였다.
<최애의 아이>는 아이돌을 동경하던 두 사람이 동경하던 아이돌의 자녀로 환생해, 이후 살해당한 부모의 행적을 따라간다는 플롯으로 진행된다. 작품은 안의 사람이라는 시대문화를 몸과 마음의 다름으로 이용하면서 이와 같은 다름에서 오는 열기를 ‘아이돌’ 장르에 접목한다. 아이돌문화는 직업적으로 볼 때 춤과 노래를 자신의 캐릭터성에 결합해 선보이는 엔터테인먼트지만, 본질에서는 무언가를 연기하는 것이기도 해서 무대 위와 아래의 모습은 확실히 다르다. 여기서는 무대에서만 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무대가 아니라면 하지 않는 무언가도 있다. 즉, 무대는 신체를 아래에 붙잡아둔다는 점에서 세계를 밖으로 밀어내는 환경을 조성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발을 내디딜 때처럼 무대는 항구적인 세계에 일시성을 부여함으로써 개인이나 관중이 각자의 정체성에 타아를 틈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즉 아이돌은 어떤 면에서 아이와 어른의 바깥에 선 존재이고, 다시금 자기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바로 무대의 열기를 결정한다. 누군가가 생각하는 완벽한 모습에 가까워지려는 이 노력은 오히려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이돌을 신화적인 존재로 만든다. 달성 불가능한 과제는 오히려 그 자체로 업적이 되기 마련이니까. <최애의 아이>는 아이돌과 환생이라는 구미가 당기는 두 장르의 콜라보레이션이지만, 연기는 그저 목적에 다가서기 위한 수단이거나 춤과 노래는 대체될 수 없는 환영을 삼켜보려는 과업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밤의 해파리는 헤엄칠 수 없어>, <걸즈 밴드 크라이>, <봇치 더 락> 같은 전대 음악 장르를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애니메이션에서 음악을 소재로 선택하는 건 흥행이나 사업 확장 같은 외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무언가를 연주하는 일이 사실은 한 사람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음에도 무언가를 ‘드러낸다’고 여기게끔 하는 점이 더 크다. 일반적으로 소리는 몸에서 새어나오는 무언가로 여겨지는데, 이는 ‘발화’가 공기를 성대에 투과해 울림을 형성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항상 틈새를 요구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 공기가 통과해버리면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기에 소리의 발생은 무언가 접촉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효과가 있다. 이 점에서 소리를 내는 악기들의 갖은 조합인 음악 활동은 한 개인과 다른 개인 간의 접촉 간에 벌어지는 틈새를 보여주기에 적합하다. 음악은 아마도 틈새를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방법일 것이다. 이별이 척력이고 만남이 인력이라면, 사람 간의 우정이나 연대에서는 으레 맞지 않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힘을 교환하는 일은 항상 정지상태에만 있는 게 아니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이 있으려면 늘 간극을 양산해야 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를 열정으로 치환하고, 드러내는 일은 항상 어딘가를 향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매번 느끼는 ‘정신의 틈새’를 긍정하는 좋은 방법이 된다. 혹은 어딘가를 향해가는 과정에서 전면을 응시할 수밖에 없는 소실점의 세계에서는 정신보다는 몸이 더 틈새를 만들어내기에 유리한 환경에 있다. 엔진에 불을 붙이는 건 마음을 다잡거나 열기에 몸을 맡기는 아카이브의 충동, 자기 보존의 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