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은 욕구의 요구들에 순응하지만 욕구의 요구들과 등치될 수는 없다. 또한, 반드시 승리했어야 하는 이 기만의 순간에, 그 실패의 의미가 수치심을 통해서 부각된다." -엠마누엘 레비나스-
유운성은 『식물성의 유혹』에서 사진적 불안의 정의를 “영원히 변치 않은 채로 사는 인간의 모습”으로 진술하고, 이를 ‘무빙 이미지’의 시대에 억압되기에 우리가 마주하게 된 ‘불안’이라고 말한다. 영화를 두고서 시신에 빗대는 관습은 어쩌면 우리가 부질없는 것에 빠진 게 아닌지를 자문하게 한다. 영화는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점에서 불멸하는 것이지만, 바꾸어 보면 필히 사라져야 할 게 줄곧 유지된다는 점에서 ‘과오’이기도 하다. 죄책감이라던가, 상처라던가 하는 단어는 인생의 궤적에서 어느 기억을 붙들어 썩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젊음’의 속성을 획득한다. 가령 우리는 타인과의 경쟁에서 밀리지는 않을지를 두려워한다. 혹시라도 뒤처질까 하는 마음은 남들이 앞서 갈 때 자신은 한 곳에만 머물러있는 게 아닌지를 걱정하는 일에서 비롯된다. 젊다는 건, 어리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지만 우리가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하는 것 같다. 젊음이 불안의 속성인 건 지금의 삶이 영원히 변치 않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고, 그와 같은 ‘억압’을 떨쳐내야만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면 그렇다.
말하자면 ‘변하지 않는 것’은 모더니티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사유 형식이다. 데이터 레이블을 세워 이를 통제의 영역 안에 넣는 일은 데이터 사회에서 필수적인 요인이 되었고, 인간의 조건 또한 어떠한 분과 안에서만 존재하며 이에 포섭되지 않는 건 모두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다. 이는 오늘날에 사람들이 ‘폐허’라는 장소에 끌리는 이유이면서(<내언니전지현과 나>), 더는 변할 수 없게 되어버린 과거의 추억들을 끄집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김홍중은 『마음의 사회학』에서 “사유의 타자들을 문화적 모더니티의 영역에서 생존시키려는 전략”으로 멜랑콜리를 꼽으면서 이를 다음처럼 이어간다. “사회적 모더니티의 표면적 세계에서 사라진 모든 근원적 가치들은 문화적 모더니티의 지배적 정조인 멜랑콜리의 전략 속에서 이처럼 보존되고 있었다. 요컨대, 그것은 문화적 근대가 창출한 새로운 타자의 형식이다.” 영화가 근대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눈에 비치는 세계’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영화는 과거의 세계, ‘억압’된 것이자 ‘불안’에 빠진 무언가다.
억압(suppress)은 불안(depress)과 운율이 맞는다는 점에서 하나의 맥운으로 이어진다. <인사이드 아웃>의 2편이 다루는 이야기는 이것과 관계있어 보인다. 영화에서 ‘불안’이 공황에 빠졌을 때를 떠올려보자. 라일리는 고등학교에 올라가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이를 따라 이 자리를 ‘성공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자신이 기억할만한, 혹은 ‘기념비적인’ 순간만을 기록하던 레코드가 ‘자기’에 대한 편집증으로 발전하는 순간 그녀는 공황에 빠진다. 좋은 꿈이 파산하고, 더는 기억 경제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이제 라일리는 완전히 주저앉게 돼버린 걸까. 물론,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정확하게 자신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자리에 있다. 영화의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여러 기억이 하늘에 두둥실 올라가 아이디어의 기후변화에 포섭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라일리의 꿈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때 고양되고, 반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의식의 흐름에 처박힐 때는 재기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감정에 사로잡힌다.
라일리의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어른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기쁨을 느끼는 일보다 나머지 감정을 느끼는 때가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한번의 기쁨이 더욱 소중해진다는 뜻에서 현재와 순간의 가치를 더 강조하는 면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부류의 애니메이션 영화에서는 으레 가족과 우정의 소중함으로 이야기가 귀결되고는 한다. 하라 케이이치의 <어른제국의 역습>에서 짱구가 말하는 “어른이 되고 싶으니까”의 의미 같은 것, 이 일화에서 ‘어른’은 어떠한 수행적 정체성이거나 신체의 노화이기보다는 유년기의 끝을 가리킨다. <인사이드 아웃>이 2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감정을 들여오는 일이 그렇다. 유년기를 끝낸다는 건 더 복잡한 감정을 요구한다는 점을 뜻하지만, 반대로 원래 있던 걸 저버리라는 게 아니다. 좋든 싫든 간에 모든 어른은 유년기의 감정과 기억을 갖고 살아가기에 ‘어른’이란 항상 최전선이거나, 최상부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멀리 보거나, 널리 살아갈 수는 있지만 그만큼 떨어지거나 마주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은 추락과 충격을 온전히 감내해야만 한다.
레나타 살레츨은 불안이 “결여라고 하는 곳에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고전 영화가 내화면과 외화면을 일치시키려 한다면, 현대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카세티에게 외화면은 카메라가 자리한 곳이면서 동시에 불완전한 현실이다. 카메라에 비친 내화면이 잘 조감된 양식을 한다면 외화면은 통제할 수 없고 또한 중단되거나 다시 시작될 수도 없는 불완전한 ‘현실’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가 연결되고 속박된 관계 사이에서 영화의 픽션이 등장해온다. 아마도 이게 좋은 꿈은 선별되고, 나쁜 꿈은 추락하는 영화의 첫 장면을 설명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첫 장면에서는 추락하는 게 나쁜 꿈이지만, 이들이 밖으로 쫓겨나 라일리의 자아를 회수하는 모험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을 현실의 영역에 풀어놓는다. 감정을 조절하는 작업대가 영화의 내화면이라고 본다면 오히려 외부로 밀려난 ‘유년기’야말로 ‘나쁜 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의 교훈이 ‘진짜 나’를 가꿔가는 일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들 나쁜 꿈이 작업대로 돌아오는 일은 살레츨의 교훈을 충실히 복기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기쁨’이 내놓은 해결책은 기억의 저편에 있던 ‘나쁜 꿈’을 불러와 그 모든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꿈’은 포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포섭되지 않고 남은 ‘잔여분’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가 보여주는 게 편집본이라면 현실을 살아가는 건 무편집본이고 우리가 지울 수 있는 건 없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꿈이 편집될 때 주체가 호소하는 증상이 바로 ‘편집증’이라 불렀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의 판단을 고수하는 일이 편집증이라면, 계속해서 좋은 꿈에 머무르려는 시도가 바로 편집증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초반에 기쁨이는 그와 같은 일을 두고서 ‘라일리를 위한 것’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라일리는 그동안 자신이 지녀왔던 ‘나다움’에서 빠져나와, 꿈의 영역은 내화면이 확장하는 형태가 아니라 외화면을 벗어난 곳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다큐멘터리의 실천이 무언가를 카메라에 담는 일이 아니라 그와 같은 행동에서 세상을 바꿀 힘을 바라는 일이라는 걸 떠올리자. 여기서 ‘잔여분’은 ‘잔존’으로, 도깨비불은 반딧불로 변화한다. 마찬가지로 라일리의 감정도 불꽃의 춤처럼 요동친다. 두려움에서 불안으로, 슬픔에서 당황으로 변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주요 악역이 불안인 건 흥미롭다. 왜냐하면 불안은 좀 더 멀리 있는 미래에 대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게 두려움이라면, 불안은 의식의 영역 밖에 있어서 육안으로 관측되지 않고 또 대비하기가 힘들다. 무빙 이미지를 재론하면 우리는 그와 같은 관측이 결국 고정좌표계 안에서만 실현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불안’은 어떠한 순간에서 비롯된다는 것,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순간을 위해 헌신하는 도구 가치가 아닐까. 스스로가 성장하지 않거나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끼는 건 오히려 닥쳐올 위기를 감지하면서 이를 마주하기 위한 초석이 되어준다. 그러나 우리가 불안에 대해 할 수 있는 말 중 하나는, 어디에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마주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야구를 할 때 타자는 공의 궤적을 알지 못하지만 그래서 더 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공을 받아치려면 그 공을 마주해야만 한다. 마치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이 항상 기다림이라는 전초 작업을 동반하듯이, ‘꿈’은 우리의 눈에 비치는 세계가 아니라 담장을 넘어간 곳에 있다.
영화는 라일리의 감정 중 추억을 내세우지 않는다. ‘추억’이 좋았던 시절을 가리킨다고 볼 때 ‘어른’의 바깥은 좋은 꿈으로 가득하다. 그러니까 라일리의 모든 순간이 소중하거나 기쁘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는 영화가 바로 좋은 꿈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좋은 꿈을 가꾸면서 확장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는 좋은 꿈을 적대하게 될 것이다. 좋았던 시절에 머무르려는 힘은 좋은 꿈을 두고서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한다. 매듭지어지지 않는 것들에서 시작된 탈구는 추락에서 부유의 감각으로, 중력에서 신체의 그릇으로 이어진다. 불안에 대해 할 수 있는 말도 그렇다. 어떠한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와 같은 울타리 너머의 일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일에 불안감을 느끼는데, 이는 대개 예측불가능성에 관한다. 어디에서 시작될지 알 수 없다면 시시콜콜 주의를 기울이면서 다른 감정을 느낄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될지를 결정하는 일만큼이나 미래에 관한 예측은 추상적이다. 좋거나 나쁜 건, 유년기와 어른이 아니라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을 우리가 알아챌 수 없다는 사실이다.